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은 아약스하면 요한 크루이프를 떠오른다. 암스테르담이 곧 아약스의 도시이기에, 크루이프 역시 암스테르담을 대표하는 인물로 지목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명가’ 크루이프가 네덜란드 내에서 가지는 위상은 두말할 것 없다. 단순히 축구를 잘하던 영웅 정도가 아니라 ‘신’이다.
암스테르담에서 1시간 30분가량 떨어진 로테르담은 수도인 암스테르담과 지독한 라이벌 의식을 가진 도시로 유명하다. 대양을 향해 뻗어나가던 네덜란드의 전성기 시절 로테르담은 최전선에 자리한 도시였고, 그만큼 이 도시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하지만 지금은 ‘제2의 도시’, 도시가 품었던 최고의 품격과 위상은 암스테르담으로 내준 지 오래다.
그 안타까운 현실의 아쉬움은 축구로 폭발된다. 로테르담 대표 클럽 페예노르트와 암스테르담의 주인 아약스의 대결을 뜻하는 ‘드 클라시커르(De Klassieker)’라는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혈전으로 유명하다. 페예노르트 팬들은 유럽에서도 거친 성정으로 굉장히 유명한 그룹인데, 여느 라이벌전이 다 그렇겠지만 사소한 것 하나라도 아약스에 밀리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네덜란드인이라면 누구나 추앙하는 크루이프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물론 로테르담 사람들은 ‘오라녜(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칭)’의 일원으로서 크루이프를 레전드로 추앙하긴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에게도 크루이프 못잖은 슈퍼 레전드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 주인공인 코엔 마울라인이다.
한국에서는 사실 생소한 이름이다. 네덜란드하면 크루이프를 시작으로 마르코 판 바스텐·루드 굴리트·프랑크 레이카르트·데니스 베르캄프 등 슈퍼 레전드를 보통 떠올리지만, 마울라인은 정말 처음 접한다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로테르담인들에게는 엄청난 실례다.
해서 마울라인을 소개하겠다. 마울라인은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네덜란드를 대표하던 슈퍼스타였다. 당대에 스탠리 매튜스·가린샤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왼쪽 날개 공격수로 평가받았던 마울라인은 페예노르트 소속으로 에레디비시에에서 다섯 차례 우승을 거머쥐었으며, 1969-1970시즌 유로피언컵(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도 손에 넣었다. 참고로 유로피언컵 우승은 네덜란드 클럽으로는 역대 최초의 정상 등극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즉, 크루이프보다 먼저 유럽 정상을 밟은 네덜란드 에이스였다.
페예노르트의 유로피언컵 우승을 상징하는 벽화. 셀틱을 물리치고 빅 이어를 가져왔다. 이 벽화는 홈 경기장 드 쿠이프 선수 출입 터널에 새겨져 있다. @풋볼 보헤미안
“마울라인은 중앙으로 치고 들어갈 듯 위협하다가 반대편으로 상대 선수를 제치고 돌파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선수로서 뛰어난 축구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전형적인 네덜란드 스타일의 선수다.” - 요한 크루이프
축구계의 ‘독설가’로 유명했던 크루이프마저도 이처럼 극찬을 남겼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였다. 그래도 이 마울라인을 크루이프와 비교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크루이프 이전 시대에도 축구계에는 숱하게 많은 별들이 존재했고, 마울라인 역시 그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여겼을지 모르겠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페예노르트가 배출한 선수 중 가장 크루이프에게 ‘비빌 만한’ 레전드이기에 가져다 붙이는 게 아니냐고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로테르담 사람들이 마울라인을 크루이프에 비견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미스터 페예노르트’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오로지 클럽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프로 데뷔를 한 1954-1955시즌 로테르담의 작은 클럽 크세르크세스에서 1년을 뛴 후 페예노르트에 입단해 17년간 오직 페예노르트에서만 뛰었다.
부름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바르셀로나가 1970년대 중반 크루이프를 영입해 화양연화를 누린 건 축구팬들에게 대단히 유명한 이야기다. 바르셀로나와 네덜란드의 끈끈한 유대 관계를 상징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르셀로나가 크루이프보다 먼저 눈독을 들였던 ‘플레잉 더치맨’이 196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마울라인이었다. 마울라인은 소속팀과 도시에 대한 애정을 이유로 이를 물리쳤다는데,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만약 마울라인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오로지 페예노르트 밖에 몰랐던 ‘바보’ 같은 선수가 바로 마울라인이다.
페예노르트 드 쿠이프에 소개되어 있는 마울라인 @풋볼 보헤미안
그런데 그 충성심은 비단 페예노르트에 국한된 게 아니라 로테르담 전체에 향했다. 마울라인은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로테르담에서 별이 되어 죽을 때까지 로테르담을 떠나지 않았다. 마울라인이 전성기를 누렸던 1960년대는 나치 공습 이후 잿더미가 되어버린 로테르담이 전후 복구를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었는데, 이때 로테르담 사람들의 자긍심을 넘치듯 채워준 선수가 바로 ‘로테르담 토박이’ 마울라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울라인의 신념은 전후 실의에 빠진 로테르담인들을 일깨우는 매개체였다. 네덜란드인들이 마울라인을 떠올릴 때까지 두 가지 말을 떠올린다.
“일하라(handen uit de mouwen)”
“말이 아닌 행동(Geen woorden maar daden)”
마울라인이 직접 남긴 말들이라 한다. 특히 말이 아닌 행동이라는 이 말은 로테르담을 상징하는 말로 남았다. 아흐메드 아부탈레브 로테르담 시장이 직접 이 말을 로테르담이 가져야 할 좌우명이라고 평가했으며, 심지어 ‘말이 아닌 행동 축제’까지 만들어 도시를 대표하는 이벤트로 꾸미고 있을 정도다. 이 문구가 들어간 페예노르트의 응원가도 네덜란드에서는 굉장히 유명하다. 2011년 마울라인이 뇌경색으로 사망하자, 도심지 중앙을 가로지르는 마라톤베그 거리를 코엔 마울라인베그 거리로 명칭을 바꾸는 등 도시 차원에서 추모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페예노르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마울라인. 총 487경기인 그의 출전 횟수는 페예노르트 역대 최다이다. @풋볼 보헤미안
이처럼 그의 말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도시 재건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던 로테르담 사람들이 더욱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격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로테르담이 유럽에서 손꼽히는 항구도시의 위상을 유지하고, 나아가 최첨단 건축물의 도시로 유명해진 건 황폐화된 도시에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 전후 로테르담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울라인의 격언은 전후 로테르담 사람들이 땀과 노력을 쏟을 수 있게끔 한 촉매였다.
암스테르담의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가 온통 크루이프를 치장했다면, 페예노르트의 안방 드 쿠이프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로테르담인들이 가진 마울라인을 향한 애정을 곳곳에서 살필 수 있다. 페예노르트는 구장 외곽에 로빈 판 페르시·지오바니 판 브롱코스트·피에르 판 후이동크 등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페예노르트 출신 축구 스타들을 위한 명예의 전당을 마련해놓고 있다. 선수들의 이름이 타일에 새겨져 있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마울라인만 타일과 더불어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적어도 로테르담 안에서는, 마울라인은 크루이프에 못지않은 신격화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