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사이드의 탄생과 역사
사실 스코틀랜드는 한국인들에게 그리 친숙한 지역은 아닌 듯하다. 스코틀랜드의 중심부 글래스고는 더 그런 것 같다. 이 도시에서 머무는 나흘 동안 한국인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해서다. 곰곰 생각해보니 스코틀랜드에 대한 한국 내 이미지가 잉글랜드에 비해 별로 없는 듯하다. 남자들이 입고 다닌다는 치마처럼 생긴 전통 의상 킬트와 손에 들린 백파이프, 애주가들이 즐기는 스카치위스키가 전부가 아닐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웃 도시 에든버러보다도 한국인들에게 덜 알려진 도시라는 얘기도 인터넷에 접했다. 확실히 관광적 측면에서는 그리 추천하고 싶은 곳은 아니다. 영국 어딜 가든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좋은 경치를 보기 힘들다지만, 글래스고는 특히 심했다. 축구 유랑자들을 유혹하는 매력적인 라이벌리 ‘올드 펌’이 있다고는 하지만, 뭔가 생뚱맞은 곳에 제 발로 온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글래스고는 정말 중요한 도시다. 약간의 과장을 하자면, 전 세계를 통틀어 가히 첫손가락에 꼽힐 천재들의 도시라 생각한다. 인류 근현대 역사가 이곳에서 태동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 등장하는, 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자본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바로 이곳 글래스고 대학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 기초를 다졌다. 철도와 자동차 발명의 초석이자, 이를 통해 전 세계 물류 이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증기기관을 탄생시킨 위대한 발명가 제임스 와트 역시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글래스고 대학 출신이다. 뭔가 만들어 내는 데 기발한 재주를 가진 기운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도시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축구의 측면에서도 그 기질이 발동했다.
“잉글랜드가 진정한 ‘축구 종가’인데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 잉글랜드가 축구의 산파 구실을 하긴 했다. 하지만 패스로 공격을 만들어나가며 골을 넣는 지금의 축구 형태가 기준이라면 원조는 스코틀랜드, 더 정확히는 글래스고를 연고로 둔 퀸스 파크 FC라 본다. 그 퀸스 파크 FC의 과거와 오늘을 스코틀랜드 축구의 성지 햄던 파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퀸스 파크 FC가 현대 패스 게임의 원조라고 평가받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축구 규칙의 변천사를 짚어야 한다. 축구와 럭비의 뿌리가 같다는 건 꽤나 유명하다. 이들은 경기 중 손의 사용 유무를 두고 다퉜고, 1868년 최초의 축구 규칙이 제정됐을 때만 하더라도 두 종목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럭비나 미식축구에서나 볼 수 있는 페어 캐치(注釋: 상대가 찬 볼을 손으로 잡은 선수가 곧바로 공격을 진행시키지 않겠다는 신호를 주심에게 보낸 후, 데드볼 상태에서 방해받지 않고 프리킥 등으로 이후 플레이를 진행하는 규칙)가 허용됐었다.
그런데 초창기 축구와 럭비가 손을 사용해도 된다는 규정과 더불어 공유하던 규칙이 있었다. 바로 오프사이드다. 럭비 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일렬로 대형을 유지한 후 플레이를 펼치는 걸 볼 수 있다. 럭비에서는 볼보다 앞서 있는 선수에게 패스하는 건 비신사적이라고 여겨 파울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축구도 그랬다. 볼을 기준으로 상대 골문으로 앞서 있는 선수에게 주어지는 패스는 파울이었다. 이런 축구가 변화를 꾀한 게 바로 1866년 3인제 오프사이드 룰의 등장이다. 3인제 오프사이드 규칙을 설명하자면, 상대 골라인 기준으로 상대 선수 세 명(보통 골키퍼 포함 두 명의 수비수)보다 골문에 가까이 있는 아군 선수에게 볼을 투입하면 파울이다.
손을 못 쓰게 하고, 제한적이라고는 하나 전방 패스를 허용하는 룰까지 도입하자 럭비 지지자들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럭비 지지자들은 1871년 FA(잉글랜드축구협회)를 탈퇴한 후, 럭비 풋볼 유니언(RFU)을 창설하고 딴살림을 차렸다.
FA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프사이드 규칙을 가다듬어 나갔다. 이 3인제 오프사이드는 1925년 2인제 오프사이드로 또 한 번 개정됐다. 상대 골라인 기준으로 두 명의 상대 선수(보통 골키퍼 포함 한 명의 수비수)보다 앞서 있는 아군 선수에게 패스하면 반칙으로 선언됐다. 이전 3인제 오프사이드 규칙을 적용할 때보다 한 명의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다. 이 2인제 오프사이드 룰이 바로 우리가 지금 경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 규칙이다.
이 오프사이드의 변천사를 소개한 이유는, 축구 경기의 플레이 스타일이 규칙에 따라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럭비와 오프사이드 룰을 공유할 때는 일렬로 늘어서 마치 벌판에서 전투를 벌이는 창기병처럼 상대팀과 맞붙어야 했다. 전방 패스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방 패스가 가능해지면서 포메이션이 횡(橫)에서 종(縱)으로 바뀌게 됐다. 그에 따라 오프사이드 규칙이 허락하는 한에서 상대 골문과 가장 가까운 아군 선수, 즉 공격수에서 볼을 전달하는 게 중요해졌다.
그래야만 득점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태동한 것이 바로 원시적인 축구 전술과 포메이션이다. 상대 견제를 뚫고 골문으로 다가가는 효과적인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법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선수들의 탄탄한 기본기, 그중에서도 패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패스를 활용하며 시대를 지배한 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변화된 오프사이드 규칙의 틈을 이용해 골을 얻어내려는 시도 자체는 잉글랜드에서 먼저 있긴 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른바 ‘셰필드 룰’을 주창해 축구 규칙의 변천사에도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끼친 셰필드 FC와 당시 잉글랜드 내에서 가장 전술적인 클럽으로 찬사 받았던 로얄 엔지니어 AFC가 대표 주자였다.
셰필드 FC는 잉글랜드 중북부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던 ‘셰필드 룰’을 통해 전방 패스를 허용한 축구를 이미 하고 있었다. 그 플레이가 상대 골문 앞에 골 전담 공격수를 배치한, 마치 ‘군대 속 병장 축구’를 연상케 하는 원시적 패스 축구긴 해도 어찌 됐든 그들의 플레이에 패스는 대단히 중요한 공격 수단이었다. 로얄 엔지니어 AFC는 잉글랜드 사상 최초로 선수간 콤비네이션 플레이를 펼친 팀으로 기록되어 있다. 드리블과 패스를 적절히 섞어 쓴 로얄 엔지니어 AFC는 이런 조직적인 플레이를 통해 1874-1875 잉글랜드 FA컵 우승이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 두 팀은 당대에도 ‘별종’으로 불렸다. 그런데 특색 있는 팀이라고 인정받았을지언정 그들을 추종하려는 팀은 거의 없었다. 성적 면에서도 로얄 엔지니어 AFC의 FA컵 우승을 제외하면 주목할 만한 것도 없다. 한마디로 영향이 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파격과 변화 자체를 터부시 하던, 그리고 이상한 구석에서 고집을 부리던 당시 잉글랜드 축구계 내부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애당초 전방 패스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던 본래의 오프사이드 규칙의 등장 배경에는 일대일 승부가 아닌 패스는 비겁하다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오프사이드 규칙 개정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시각에서는 이해가 안 될 법한 종가의 고자세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이 두 팀의 아이디어를 활용해 챔프로 등극한 팀이 나타났다. 바로 글래스고에 둥지를 튼, ‘현대 패스 축구의 개척자’라는 이명을 갖고 있는 퀸스 파크 FC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