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리즘 최후의 보루
퀸스 파크 FC는 골대 골문으로 향하는 번개처럼 빠른 패스 플레이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현대에도 그렇지만, 이 패스 게임이라 불리는 경기 운영법은 선수들의 기본기와 체력, 그리고 영특한 축구 지능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선수들에게는 수를 읽고 더 좋은 위치를 점할 줄 알아는 전술적 혜안은 물론이며 재빠른 발과 강력한 체력이 필수다. 현대 축구에서는 기본이 되어버린 이런 경기 운영을 퀸스 파크 FC가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다.
성적이 훌륭하지 않았다면 셰필드 FC나 로얄 엔지니어 AFC와 다를 바 없는 별종으로서만 기억되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퀸스 파크 FC는 스코틀랜드축구협회(SFA) 출범 후 첫 스코티시 FA컵인 1873-1874시즌 우승을 시작으로 19세기가 가기 전까지 열 차례의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스코틀랜드 리그가 1890년에야 탄생해, 당시에는 스코티시 FA컵이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최고 권위의 대회였다. 즉,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셀틱이나 레인저스가 등장하기 전 스코틀랜드 지존은 바로 이 퀸스 파크 FC였다.
영국 내 일부 축구 사학자들은 퀸스 파크 FC가 로얄 엔지니어 AFC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지적한다. 일리 있다. 1871-1872시즌 퀸스 파크 FC는 스코틀랜드 클럽 자격으로 잉글랜드 FA컵에 참가했다. 당시만 해도 스코틀랜드축구협회(SFA, 注: 1873년 출범)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퀸스 파크 FC가 이 FA컵에서 4강에 진출하며 만만찮은 실력을 뽐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로얄 엔지니어 AFC가 ‘콤비네이션 플레이’를 앞세워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직접적 대결은 펼치지 못했어도, 대부분의 경기가 지금은 크리켓 경기만이 열리는 런던 케닝턴 오벌에서 벌어졌던 터라 서로의 경기를 면밀히 지켜볼 수 있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생소한 축구를 펼치는 로얄 엔지니어 AFC의 진가를 퀸스 파크 FC는 알아본 것이다.
단순히 로얄 엔지니어 AFC를 따라 하는 수준이 아닌, 자신들의 것으로 체득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는 기록도 있다. 퀸스 파크 FC 선수들은 포지션마다 패스 게임을 전개하기 위한 각자의 임무를 부여받으며 경기 중에는 반드시 지킬 것을 요구받았다고 한다.
물론 그에 따르는 훈련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매치 데이가 없을 땐 자체 홍백전을 수없이 치러 경기 중에도 패스 게임을 치를 수 있는 상태를 유지했다고 하며, 이를 바탕으로 팀 조직력으로 승화시켰다. 심지어 퀸스 파크 FC는 초창기 축구 포메이션의 중요한 원류였던 2-2-6 포메이션까지 만들어 실전에서 써먹었다. 그때 기준으로는 상당히 체계화된 훈련과 경기를 펼친 것이다.
퀸스 파크 FC가 득세할 때 치러졌던 1872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맞대결은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니는 경기다. 후세 사람들은 이 경기를 두고 ‘사상 최초의 A매치’로 기억한다. 그런데, 단순히 ‘최초’에 의미를 둘 수는 없는 경기였다. 이 경기에 출전한 스코틀랜드의 베스트 일레븐 전원이 바로 퀸스 파크 FC 소속이었다. 자연히 스코틀랜드는 패스 게임을 기반으로 한 플레이를 펼쳤지만 잉글랜드는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피지컬과 개인기에 의존하는 축구를 펼쳤다. 잉글랜드의 ‘피지컬 축구’와 스코틀랜드의 ‘패스 축구’가 정면충돌한 것이다. 때문에 축구 전술사 측면에서도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한판이다.
이 경기는 0-0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이어진 두 나라의 대결은 점점 스코틀랜드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1882년에는 스코틀랜드가 5-1이라는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대표급이 아닌 경기 결과는 더 심하다. 퀸스 파크 FC 선수들이 주축이 된 글래스고 선발팀은 1874년부터 1890년까지 셰필드 FC가 중심이 된 셰필드 선발팀과 열일곱 차례 맞대결을 펼쳤는데, 글래스고 선발팀이 무려 14승 2무 1패라는 압도적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무리 개인기가 좋고 잘 뛰는 선수도 패스보다는 빠르고 정교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크게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셰필드 FC·로얄 엔지니어 AFC와 달리 퀸스 파크 FC는 당대의 인기 팀이 됐다. 스코틀랜드는 당연하며 잉글랜드 내에서도 이른바 ‘스코티시 스타일’이라 불렸다는데, 이는 ‘토털 풋볼’·‘티키타카’·‘게겐 프레싱’ 등 현대 축구 전술을 향한 찬사 가득한 분위기와 매우 흡사했다고 여겨진다. 당연히 잉글랜드에서도 ‘스코티시 스타일’, 더 정확히는 퀸스 파크 FC의 경기 운영법을 배우려는 클럽이 늘기 시작했다.
퀸스 파크 FC 선수들을 비롯한 스코틀랜드 선수들도 잉글랜드 클럽들의 주요 영입 타깃이 됐다. 본래 에버턴과 한뿌리였으나 구장 사용 문제로 갈라서게 된 리버풀이 선수 수급을 위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스코틀랜드였다는 건 매우 유명하다. 리버풀뿐만 아니라 애스턴 빌라·더비 카운티·뉴캐슬 유나이티드·에버턴 등 잉글랜드 중·북부 클럽들이 스코틀랜드 선수들에게 쏟는 관심은 매우 컸다.
퀸스 파크 FC의 주공격수였던 로버트 스미스 맥콜은 한꺼번에 대여섯 클럽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을 정도로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당시 잉글랜드 클럽들이 보낸 영입 제안서가 햄던 파크 내 스코틀랜드 축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적의 개념이 흐릿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특정 선수를 향한 관심은 매우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스코틀랜드 선수들이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던 반증이기도 하다.
이처럼 축구사에 큰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대단한 위세였던 퀸스 파크 FC의 오늘날은 다소 초라하다. 이 클럽은 2018-2019시즌 기준으로 스코틀랜드 리그2(4부리그)에 속해 있으며, 향후에도 최상위 리그 진출은 요원하다. 과거만큼 짱짱한 실력을 갖추지 못하긴 했지만, 그 실력이 있어도 불가능하다.
퀸스 파크 FC의 엠블럼에 그 이유가 적혀 있다. 라틴어로 ‘Ludere Causa Ludendi’, 한글로 풀이하자면 “플레이를 위해 플레이한다”라는 뜻이다. 플레이를 위해 플레이한다니, 무슨 생뚱맞은 번역이냐 하겠지만 사실이다. 퀸스 파크 FC가 전성기를 누렸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영국 스포츠계의 주류 사상은 ‘아마추어리즘’이었다.
전성기 시절에도 프로 선수가 나타나는 등 시대가 바뀌는 징후가 있었지만, 퀸스 파크 FC는 그 대세를 한사코 거부했다. 선수는 당연하고 클럽까지도 프로화가 당연한 시대임에도, 이들은 지금까지도 아마추어 팀임을 강조한다. 이렇다 보니 재정적으로도 탄탄하지 못하다.
한때 햄던 파크를 홈으로 썼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던 퀸스 파크 FC는 현재 햄던 파크 서측 스탠드 옆에 자리한 레서 햄던이라는, 얼핏 보기에는 보조 구장처럼 보이는 곳을 안방으로 쓰고 있을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그런데도 자부심만큼은 여전하다. 조금은 남루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스코틀랜드 축구의 기틀을 다지고, 나아가 전 세계 축구에 큰 영향을 줬다는 과거는 그들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