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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Jan 03. 2020

그곳에 그들의 인생이 새겨져 있다

스코틀랜드의 푸른 거인을 지탱하는 붉은 벽돌

글래스고 레인저스는 최근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풋볼 보헤미안

부자는 망해도 3년을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도 있다. 당장은 힘든 지경에 놓였을지 몰라도, 저력 있는 이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우리네 속담이다. 그런데 요새 축구판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부자든 거지든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 한방에 훅 간다. 그리고 그렇게 훅 가버리면 뼈를 깎는 정도가 아니라 갈아버린다는 심정으로 와신상담해도 원상 복구하는 건 요원하다. 버는 돈이든 쓰는 돈이든, 언제부턴가 천억천억 거리더니 요새는 조 단위까지 너무도 쉽게 거론되는 세상이 되어서다. 


게다가 애당초 축구계는 화려하게 비치는 겉치레와 달리 본래 돈 벌기 무척 어려운 구조다. 혹자가 그랬다. 프로축구는 불량품을 파는 산업이라고. 그 말이 맞다.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고, 패자가 되는 운명이 주어지면 그 클럽은 불량품 양산업체라는 낙인이 찍힌다.


글래스고를 연고로 한 명문 클럽 레인저스가 바로 그 덫에 갇혔었다. 혹자는 변방으로 전락한 스코틀랜드의 안방 호랑이 아니냐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팀이 지난 백수십 년간 쌓은 명성은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스코틀랜드 리그를 무려 쉰네 차례나 정복한 이 팀 없이는 세계에서 가장 격렬하기로 소문난 올드 펌도 성립할 수 없다. 좁디좁은 안방이라 할지라도 거침없이 정상으로 나아갔던 레인저스의 발목에 덫을 놓은 이는 크레이그 화이트라는 어느 사기꾼이었다.


위험 신호는 있긴 했다. 2010년대 초반 레인저스는 1억 3,400만 파운드(한화 약 2,333억 원)이라는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고, 당시 살림을 책임지고 있던 데이비드 머레이 전 회장은 어떻게든 클럽을 팔아치우고 싶어 했다. 지난 2011년, 그 머레이 전 회장 앞에 나타난 이가 바로 만 30세의 젊은 벤처사업가 화이트였다. 마더웰 출신인 이 젊은이는 표면적으로 부친으로 물려받은 공장 임대업 회사를 바탕으로 재산을 불려 나가 억만장자가 된 야심 찬 자수성가 사업가로 알려졌으며, 무엇보다 모태 ‘테디 베어(레인저스의 별명)’를 자처하고 있었기에 팬들이 무척이나 환영했다. 

팬과 사진을 찍는 '테디 베어'. 저런 귀여운 마스코트의 이름이 '사기꾼' 구단주 화이트에게 붙었었다. @풋볼 보헤미안

화이트 역시 “선수와 팬을 위한 나의 헌신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레인저스는 훌륭한 클럽이며,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지지자를 가지고 있다. 클럽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겠다”라고 취임 일성을 내놓았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2,500만 파운드(약 436억 원)를 즉각 투입해 스쿼드 보강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시나브로 가난한 팀이 되어가던 레인저스의 팬들은 더욱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환호는 곧 절규로 바뀌고 말았다.


화이트는 구단 운영권을 손에 쥔 후 방만한 구단 경영을 일삼으며 레인저스를 더욱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2,500만 파운드 투자는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실질적으로 단 1파운드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부임하자마자 향후 4년간 구단 시즌 티켓 수익을 담보로 2,670만 파운드(465억 원)을 대출받아 개인 용도로 유용했다. 겉모습을 예수로 치장한 악마였고,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듯 돈을 빼앗긴 레인저스는 파산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스코티시 프리미어리그에서 셀틱과 늘 자웅을 겨루었던 이 팀은 이 재정 문제 때문에 2011-2012시즌 스코티시 프리미어리그에서 준우승을 하고도 리그 3(4부리그)로 떨어졌다. 한마디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추락하고 망해버린 것이다.


글래스고를 방문했을 때는 레인저스가 스코티시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한 후였다. 2012-2013시즌 4부리그부터 다시 시작해 그 밑바닥을 발판 삼아 차례로 하부리그를 정복하더니 2016-2017시즌부터 원래 있던 곳에서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발밑이 느껴지지 않는 늪에 빠진 것 같더니 그 어느 팀보다도 초고속 승진을 했으니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허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레인저스의 고풍스러운 홈구장 아이브록스 스타디움 @풋볼 보헤미안

그 원동력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 레인저스의 근거지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20세기 초 영국의 저명한 건축설계가이자 현재 올드 트래퍼드·스탬퍼드 브리지 등 영국 내 주요 축구 경기장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치발드 리치의 설계로 세워진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의 외관상 가장 큰 특징은 근래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빨간 벽돌집’이다. 


아마 수만 개, 아니 그 이상이 동원되었을 그 빨간 벽돌은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을 스코틀랜드는 물론이며 영국 내에서 가장 고풍스럽게 여겨지게 했다. 그런데 단순히 치장으로만 여겼던 그 빨간 벽돌에 레인저스 부활의 실마리가 느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실마리는, 그저 스타디움 전경 사진으로 보면 느낄 수 없다. 현지에 가도, 멀찌감치 바라보며 그 풍경에 감탄만 하면 알 수 없다. 경기장이 아닌 벽돌을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가서 봐야 알 수 있다. 


그저 흔하게만 느껴졌던 빨간 벽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다. 간단하게 누군가의 이름, 커플이 서로 사랑을 고백한 첫날, 아버지와 함께, 혹은 아들과 더불어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을 찾아 레인저스의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한 첫날, 친구와 함께 외친 우정의 맹약, 레인저스를 위해 ‘영원한 블루’를 다짐하는 맹세, “OOO은 최고”라는 다소 엉뚱한 메시지가 벽돌 하나하나를 채우고 있다. 그 벽돌이 5만 석이 넘는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의 외벽도 모자라 보도블록까지 채우고 있다. 

아이브록스의 빨간 벽돌에는 현지 축구팬들의 인생이 새겨져 있다. @풋볼 보헤미안

그리고 곳곳에는 아마도 망자가 되어버렸을 벽돌의 주인공을 위한 꽃과 편지가 붙어 있다. 그 내용이 너무도 궁금해 슬쩍 들여다보았던 어느 편지에는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을 함께 찾았던, 하지만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단 하루라도 좋으니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딸의 애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사실 이 벽돌은 구단 측의 마케팅 기법 중 하나다. 레인저스는 영원히 아이브록스의 일부분이 되라고 팬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비유가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절에 가면 이름과 소원을 새기는 기왓장과 비슷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조금은 독특한 발상이긴 해도, 사실 전 세계 축구 클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술이다.


그럼에도 이 벽돌에 마음을 빼앗겼던 건, 벽돌마다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삶이 담겨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삶은 레인저스와 떼려야 뗄 수 없음을 알리고 있다. 설령 벽돌 속 주인공이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와 함께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추억을 만든 이들은 이곳에 발길을 끊을 수 없다. 그저 벽돌에 상술에 의해 새겨진 글귀라 할지라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 레인저스를 향한 현지 팬들의 애정과 사랑이 이 벽돌을 통해 실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경기장 외벽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말이다. 당연히 그 팬심은 벽돌뿐만 아니라 레인저스의 무시무시한 관중 동원력으로 이어진다. 


언급했듯, 사기꾼에게 된통 당한 직후인 2012-2013시즌 레인저스는 4부리그에서 시작했다. 생소한 무대에서 이스트 스털링셰어 FC라는 실로 낯설게만 느껴지는 팀과 아이브록스에서 시즌 개막전을 치러야 했다. 곰곰 생각해보면, 레인저스를 응원하는 팬들 처지에서는 그저 분통만 터지고 티켓값이 아까운 경기였을 듯하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하면 무엇 때문에 축구장에 가서 사서 스트레스를 받나 하는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레인저스의 박물관. 늘 현지 팬들의 참관이 이뤄지고 있다. @풋볼 보헤미안

하지만 팬심은 본래 이성과는 거리가 멀다. 무려 49,118명에 달하는 팬들이 아이브록스를 메웠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전 세계를 통틀어 4부리그 최다 관중 기록이다. 그리고 레인저스가 하부리그를 전전하는 동안 늘 평균 4만 명이 넘는 관중들이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을 찾아 뜨겁게 응원하고 기꺼이 지갑을 기꺼이 열었다. 


그처럼 조건 없는 애정이 명예 회복을 위해 최상위 리그 복귀를 꿈꾸던 레인저스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부자가 망해도 3년 가고, 썩어도 준치인 게 아니었다. 늘 곁에 있던 존재라 공기처럼 무감각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아무리 망한다 한들 든든한 팬들이 있으면 몇 번이고 부활할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고풍스러운 아이브록스의 빨간 벽돌 외벽에서 느낄 수 있었다.

레인저스의 안방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의 내부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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