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틱의 최전성기, 그리고 조크 스타인 감독
아일랜드 삼색기와 이른바 ‘샴락(Shamrock)’이라 불리는 녹색 클로버 모양이 곳곳에 새겨진 셀틱 파크의 분위기는 여타 영국 클럽과 비교하면 확실히 이질적이다. 과한 표현일 수 있으나, 이 정도 분위기를 연출해놓고 영국인들에게 이방인 취급을 받지 않길 바라는 것도 이상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셀틱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의 정체성은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이다. 영국인들이 그들에게 이방인이라고 손가락질한다면, 그 말이 맞다. 그 로이 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박차고 나가자마자 왜 셀틱에 가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겠는가? 셀틱은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워너비 클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체성만 강하다고 해서 특정 계층의 대표 클럽으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부심을 가질 만한 업적은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셀틱은 2018-2019시즌 기준으로 리그 우승 50회에 빛나는 명실공히 스코틀랜드 최강의 클럽이라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우승권 클럽과 나머지 클럽의 실력 차가 현격한 스코틀랜드 리그의 여건을 고려하면 셀틱의 이러한 위엄은 향후에도 계속 지속할 공산이 매우 크다. 더욱이 라이벌인 레인저스가 아직 예전의 힘을 되찾지 못한 상태다. 향후 몇 년간은 셀틱은 강력한 독주 체제를 구축할 거라 예상된다.
외부에서는 ‘우물 안 호랑이’라 부를지 모르겠지만, 한 나라의 최강이라는 평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 클럽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그 특별함을 선사한 조크 스타인 감독은 그래서 영웅으로 추앙될 만한 인물이다. 국내에는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훌쩍 넘은 이 사나이에 대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 만큼 먼저 소개가 필요할 듯하다. 셀틱이 차지했다는 리그 우승 50회의 5분의 1이 바로 스타인 감독이 이룬 성과다. 스코틀랜드 FA컵 등 각종 공식 대회에서 쓸어 모은 트로피가 총 서른한 개다.
셀틱 파크 내 뮤지엄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우승컵에 상당한 지분을 가진 감독이다. 클럽 창단 후 엎치락뒤치락하던 리그 패권 경쟁을 벌여야 했던 셀틱이 완전히 지존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1965년부터 1978년까지 스타인 감독이 지휘했던 시절이었으니, 이 남자가 클럽 역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그중에 가장 큰 성과를 꼽자면, 1966-1967시즌 유러피언컵 우승이다. 이 우승컵은 두 가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이전까지 유럽 클럽대항전에서 이렇다 할 족적이 없던 스코틀랜드 클럽이 당시 유럽의 패권을 쥐고 있던 ‘그란데 인테르’ 인터 밀란을 물리치며 정상에 올랐다는 점, 그리고 이 우승이 스코틀랜드는 물론이며 영연방 4개국을 아울러 영국 클럽 최초의 유러피언컵 정상 등극이라는 점이다.
같은 시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었던 맷 버스비 감독이 이듬해 잉글랜드 최초의 유럽피언 컵 정상 등극을 이루긴 했으나, 당대에는 ‘영국 최초’라는 타이틀까지 가져가 버린 스타인 감독의 전과에 살짝 묻힐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리버풀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또 다른 전설적인 감독 빌 샹클리는 스타인 감독을 두고 “불멸의 감독(The Immortal)”이 됐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스타인 감독은 지금까지도 영국 전역에서 최초로 유러피언컵을 정복한 감독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으니 샹클리 감독의 말처럼 정말 영원불멸한 존재가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이 스타인 감독의 흔적을 좇고자 셀틱 파크를 찾았었다. 앞서 소개했던 트로피와 업적에 관한 흔적은 셀틱의 박물관에서 넘치듯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설명한 만큼 여기서 맺겠다. 대신 셀틱 파크 곳곳에 남겨진 그의 메시지와 철학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스타인 감독이 길러낸 ‘리스본의 사자들’은 위대했다. ‘리스본의 사자들’은 셀틱 역대 최고 공격수로 거론되는 지미 존스톤을 비롯해 토미 젬밀·보비 레녹스·윌리 월러스 등 당시 셀틱 베스트 일레븐을 일컫는 표현으로, 리스본에서 벌어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인터 밀란을 무너뜨리고 유럽 정상에 오르자 이처럼 환상적인 이명이 붙은 것이다. 그들이 당시 기준으로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하며 최강의 위용을 뽐냈던 인터 밀란을 쓰러뜨린 건 단순히 언더독의 반란 수준으로 마름질할 수는 없다.
엘라니오 에레라 감독이 이끄는 인터 밀란은 전반 7분 산드로 마촐라의 페널티킥 선제골로 앞서 나간 후, ‘레전드’ 자친토 파케티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카테나치오’로 셀틱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인터 밀란이 먼저 넣고 잠근다는 건, 당시에는 사실상 승부가 그대로 끝난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셀틱은 굴하지 않았다. 무려 서른아홉 개의 슛을 퍼부어 드라마틱한 역전승을 거두었다. 상대의 강력한 수비, 불리한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보였기에 그들은 용감한 사자에 비유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특별할 건 없는 일이었다. 스타인 감독의 축구는 지켜보는 팬들의 손에 땀을 쥐게끔 하는 공격 축구였다. 상대가 아무리 막아도, 기어코 뚫어내고 마는 근성의 공격 축구를 펼치고자 했다. 단지 당대 유럽 최강의 방패라는 인터 밀란이 그 소나기 공세에 무너져 더 크게 주목받았을 뿐, 그날 셀틱은 그들이 평소 피치에서 구현하던 축구를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이런 축구는 스타인 감독의 뚜렷한 축구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스타인 감독은 “팬 없는 축구는 아무것도 아니다(Football without fan is nothing)”이라는 말을 남겼다. 팬을 흥분시키는 공격 축구를 하겠다는 이 말은 지금도 수많은 감독들이 ‘요식적으로’ 다짐한다. 하지만 허언에 가까운 다른 지도자와 달리, 스타인 감독의 축구는 진짜로 그랬다. 물러섬없는 강력한 공격 축구는 스코틀랜드 최강으로 우뚝 서며 점점 팬층을 늘리던 셀틱의 팬덤이 더욱 거대해지는 효과로 이어졌다.
물론 이처럼 화끈한 축구에는 그만한 노력이 뒤따랐다. 스타인 감독의 훈련은 매우 엄했다고 한다. “경기에 나서야 하는 토요일을 빼면 우리는 일주일 내내 훈련한다(We train all week, but on a Saturday we get day off to play football)”라는 말은, 선수 처지에서는 정말 현기증을 나게 하는 말이다.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기 위해 심플하면서도 조직적인 공격 플레이는 끊임없이 훈련시켰다는 스타인 감독의 훈육법에는 휴일 따위는 없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소 무모해 보이기도 한데, 세션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 기준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축구에 뿍 빠져지낸 ‘축구 바보 감독’ 덕에 선수들은 무척이나 피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인고의 시간이 있었기에 스코틀랜드를 평정하고 유럽까지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타인 감독은 “셀틱 유니폼은 ‘세컨드 베스트’가 아니다. 그저 그런 선수에게 맞을 만큼 쫄아들지 않는다(Celtic jerseys are not for second best. It won't shrink to fit an inferior player)”라고 말했다. 이 말은 현재 셀틱 선수나 팬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셀틱의 ‘팀 정신’이다. 스타인 감독은 선수들에게 강력한 소속감과 프로페셔널 함을 요구했고, 이를 통해 승부에서 경기력으로 폭발시키려 했다. 이런 점은 현재 축구 팬들에게 친숙한 알렉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과 꽤 닮은 구석이다. 실제로 퍼거슨 감독은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스타인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 코치로 활동하며 그의 철학을 상당히 많이 물려받은 바 있다.
스타인 감독의 최후는 여러모로 안타깝다. 그는 스코틀랜드 사령탑으로 활동하던 1985년 웨일스를 상대했던 1986 FIFA 멕시코 월드컵 유럽 예선 플레이오프 직후 사망했다. 반드시 무승부 이상의 결과를 내야 할 경기에서 시종일관 끌려가다 후반 극적 동점 골로 기사회생해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얻은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타인 감독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모습은 당시 영국과 전 세계에서 그대로 송출됐으며, 퍼거슨 감독이 스타인 감독의 유지를 이어받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서 스코틀랜드를 이끌었다는 건 굉장히 유명한 일화다.
당시 곁을 지키고 있던 퍼거슨 감독은 훗날 인터뷰를 통해 “스타인 감독이 내게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을 데리고 우리 팬들에게 인사하러 가라. 지더라도 품격은 잃지 말자’라고 말했다”라고 그때를 떠올렸다. 퍼거슨 감독은 무수히도 많은 대결을 벌였던 그 백전노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했다며 당시를 착잡하게 돌아봤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스타인 감독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명장다운 기품을 드러냈다는 말이 아깝지 않다.
축구는 그저 열한 명이 볼을 죽어라 쫓아다니며 뛰어다니는 운동일지 모르지만, 팀이라는 결속력과 그 결속력을 유지하는 자존심이 없이는 결코 이길 수는 없는 게임이다. 스타인 감독, 그리고 그 영향을 크게 받은 퍼거슨 감독이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기본을 정말 잘 알고 실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명장이 존재했기에 셀틱이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유럽 정상에서 뒷걸음질 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문으로 인식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