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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Mar 23. 2020

버스비의 아이들,
그들은 살 수 있었다

맨유이 아픔 뮌헨 항공기 참사

뮌헨 항공기 참사 당시 잔해. 기상악화에 따른 무리한 이륙이 원인이었다. @풋볼 보헤미안

눈이 펄펄 내리던 1958년 2월 6일. 뮌헨 라임 공항에서 한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했다. 이미 서너 차례나 이륙에 실패했던 이 비행기에 탑승한 승객과 조종간을 잡은 파일럿들은 민감한 상태였다. 보통 같으면 지독한 악천후이기에 다음을 기약해야 했지만, 그들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최종 도착지인 맨체스터로 향해야만 했다. 


이윽고 이 비행기는 활주로를 힘차게 달리며 재이륙을 시도했다. 이내 이륙 결심 속도, 이른바 V1에 도달했다. 무조건 기체를 띄워야 할 그 순간, 이상하게도 기체는 하늘을 향해 박차고 날아오르지 못했다. 결국 이 기체는 허망하게도 활주로를 지나 어느 창고에 부딪힌 후 기체가 전복되고 말았다. 이 사고로 무려 23명이나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뜬금없이 항공 사고를 소개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항공기에 오른 승객들은 단순한 여행자들이 아니었다. 1950년대 말 잉글랜드 풋볼 리그의 새로운 강자로 우뚝 서고 있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단이 탑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고로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혔던 던컨 에드워즈를 비롯해 선수 여덟 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취재진, 구단 스태프, 팬, 심지어 영국에 가기 위해 전세기였던 이 항공기에 운 좋게 몸을 맡겼던 외국인까지 부질없이 생명을 잃었다. 62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축구계의 크나큰 아픔으로 남아있는 뮌헨 항공기 참사에 관한 얘기다.

참사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단. 붉은색으로 ㅍ기된 선수들이 사망자다. @풋볼 보헤미안

반백 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 사건을 잊지 않고 있다는 걸 지금을 살아가는 많은 축구팬들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아픔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현지에서는 어떻게 아파하고 있는지 와 닿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저 막연하게 그들이 아프다더라는 식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근거지 올드 트래퍼드를 찾게 되면 그들의 아픔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을 찾는 수많은 한국 축구팬들이 필수 코스로 방문하게 되는 올드 트래퍼드인 터라, 제법 눈에 익숙한 풍경일 수 있다. 올드 트래퍼드 외곽에는 뮌헨 터널이라 불리는 추모 공간이 존재하며, 1958년 2월 6일 3시 30분에 멈추어진 시계는 그 아픔을 뼈아프게 상징한다. 


사실 이 죽음은 없을 수도 있었다. 지금이야 세계 축구 행정계를 선도하는 단체 중 하나로 꼽히는 잉글랜드축구협회(FA)지만, 이 사고가 있었던 그 시절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꽉 막혀있고 고리타분한 모임이었다.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잉글랜드는 ‘축구 종주국’이라는 과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빈번하게 교류하는 지금의 시각에서 볼 때 감히 상상되지 않을 일이겠으나, 그들은 다른 유럽 국가는 물론 타 대륙 국가와 어울리지 않으려 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하찮은 것들’과 ‘겸상’ 하지 않겠다는 고자세를 보였다. 1930년 우루과이에서 태어난 FIFA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은 당연하고, 당시 영국을 지배하고 있던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해야 한다는 갑갑한 소리만을 해대며 거부했다. 

올드 트래퍼드 뮌헨 터널 끝자락에 위치한 뮌헨 참사 추모 기념물 @풋볼 보헤미안

그리고 당시 유럽 대륙으로 건너왔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단이 참여했던 대회, 그러니까 지금의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로피언컵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FA는 유럽 클럽대항전의 가치를 깔보고 있었다. 이런 대회에 출전하겠다고 나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래서 눈엣가시였다. 다른 나라와 축구 교류를 통해 실력 향상을 꾀할 수 있다고 믿었던,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 지휘관이 되는 맷 버스비 감독은 FA의 시각에서는 말썽꾼에 불과했다. 


그래서 혼내주기로 작정했던 모양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58년 2월 5일 베오그라드 파르티잔 스타디움에서 1957-1958 유로피언컵 8강 2라운드 츠르베나 즈베즈다와 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영어로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라 불리는 바로 그 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상대였다. 기종의 한계 탓에, 지금처럼 유럽 곳곳에 직항 편이 오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에 빡빡한 경기 일정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FA에 리그 일정 경기 요청을 한 이유였다. 하지만 FA는 콧방귀를 뀌었다. 심지어 제때 경기장에 도착하지 않으면 승점 삭감 등 온갖 페널티를 부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즉,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라는 FA의 사실상 강압이 아니었더라면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생때같은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올드 트래퍼드 뮌헨 터널에는 바로 이러한 정황을 말해주는 설명이 자리하고 있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던컨 에드워즈는 계속된 이륙 실패에 초조했는지 영국에 있던 지인에게 “모든 항공편이 취소되어 내일 비행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전보를 보냈다. 버스비 감독과 선수단은 악천후 때문에 정상적인 비행은 할 수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참사 당시 데일리 메일 1면 @풋볼 보헤미안

그런데도 억지로 뮌헨을 떠나려 했던 이유, 무조건 때에 맞춰 맨체스터로 돌아오라는 FA의 강압이었다. 즉, 뮌헨 항공기 참사는 어느 고집불통 윗 어르신들이 만들어 낸 인재였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버스비 감독과 당시 ‘유망주’였던 보비 찰턴이 절치부심한 끝에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황금기를 가져왔다는 얘기, 본인도 사고 피해자이면서도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살려보려 했던 골키퍼 해리 그레그의 눈물겨운 구조 사투 일화라는 훈훈한 이슈가 있긴 하다.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수많은 영웅들을 잃어버린 건 변함없었다. 여전히 생존자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이자, 지지자들에게는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클럽도 있다. 바로 세르비아의 대표 명문이자 사고 직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일전을 벌였던 츠르베나 즈베즈다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홈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3-3 무승부를 거두었다. 


원정 1차전서 1-2로 안타깝게 패한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종합 스코어 4-5로 아쉽게 준결승 티켓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내주었다. 아마 경기 후 며칠간은 이길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선수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머잖아 전해진 소식 때문에 황망함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불과 수일 전 자신들과 땀을 흘리며 맞붙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올드 트래퍼드를 방문한 지 두 달 후 베오그라드에 자리한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안방 마라카나 스타디움을 방문했을 때 그 흔적을 살필 수 있었다. 제법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클럽에서는 팀의 지난 발자취를 담은 박물관을 운영한다. 세르비아 최고 명문이자 동유럽 유일의 유럽 챔피언 클럽인 츠르베나 즈베즈다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간 맞붙었던 수많은 클럽들의 페넌트가 박물관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희생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의 마지막 상대였던 츠르베나 즈베즈다. 당시 페넌트가 베오그라드에 남아있다. @풋보 보헤미안

그중 하나를 박물관 큐레이터가 가리켰다. 1958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페넌트, 즉 뮌헨 항공기 참사 희생자들의 손에 들려 있든 유산이 매달려 있었다. 페넌트뿐만 아니다. 당시 판매되었던 티켓과 매치 데이 매거진, 양 팀 선수들의 경기 장면, 훗날 유럽과 잉글랜드 리그를 제패한 맷 버스비 감독의 사진까지 잠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물관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을 정도로 놀랐다.


사고의 충격은 츠르베나 즈베즈다에도 전해졌던 것이다. 그저 상대 팀이었을 뿐인 츠르베나 즈베즈다 선수들은 비통함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클럽의 레전드 라이코 미티치를 비롯해 당시 츠르베나 즈베즈다 선수들은 경기 후 살을 부대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머무는 베오그라드 마제스틱 호텔로 찾아가 즐거운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사족을 살짝 덧붙이자면, 이 호텔은 지금도 베오그라드 공화국 광장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 남자이자 스포츠맨이었다. 맨체스터에서 벌어진 1차전과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2차전 모두 숨 막힐 듯 치열했던 승부였기에, 종료 휘슬이 울린 후부터는 함께 술을 마시며 추억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승패를 떠나 살을 부대끼며 싸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과 진정한 우애를 나눴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 파티 이후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그들 처지에서도 너무도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사고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진심 어린 애도를 전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못잖게 뮌헨 항공기 참사를 기리고 있다. 때문에 두 팀은 1958년 그 잊고 싶은 사건 이후에도 돈독한 우애를 나누고 있다. 어려울 때, 눈물지을 만큼 괴로울 때, 손을 내밀어 준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형제애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감동케 하기에 충분했다.

뮌헨 참사 직전 벌어진 츠르베나 즈베즈다-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 티켓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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