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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Mar 24. 2020

맨체스터 시티의 영웅이 된
나치 독일 군인

맨체스터 시티 레전드 버트 트라우트만 이야기

맨체스터 시티 홈구장 에티하드 스타디움. 방문 당시 2017-2018시즌 우승을 축하하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풋볼 보헤미안

이제는 적응했을 만한데도, 아직도 에티하드 스타디움보다는 시티 오브 맨체스터라는 본래 이름이 입에 더 붙어 있다.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축구 보는 눈이 조금은 구식이 되어버렸다는 걸 티 내려는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잘 나가는 맨체스터 시티는 여전히 조금은 낯설다. 시티 오브 맨체스터라는 이름을 단 경기장에서 뛰었던 맨체스터 시티는 모든 게 옆 동네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는 달랐다. 


그땐 지금처럼 럭셔리한 이미지를 가진 팀도 아니었고, 돈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냉정히 모든 면에서 시선을 끄는 팀이 아니었고, 이런 팀을 응원하거나 관심을 가진다고 말하면 괴짜거나 골수 마니아 취급받기에 딱 좋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프리미어리그 팬들이 아스톤 빌라를 보고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듯하다. 


아무튼 지난 10년 동안 프리미어리그 최강자로 우뚝 선 맨체스터 시티지만, 아직은 1부 리그 하위권과 하부리그를 전전했던 ‘배고프고 나약했던 시절’의 맨체스터 시티 이미지가 내겐 아직 더 강하게 남아있다. “맨체스터 시티가 맨체스터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외친다는 ‘블루문’의 팬들의 자존심에 비해 선수들의 실력이 못 따라왔던 팀, 내가 처음 만났던 맨체스터 시티였다.


그래선지 시티 오브 맨체스터, 아니 에티하드 스타디움으로 불러줘야 할 맨체스터 시티의 안방을 찾았을 때 느낌은 ‘꿈의 구장’이라 불릴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올드 트래퍼드를 찾았을 때에 비한다면 설렘은 덜했던 것 같다. 그저 요새 그렇게나 잘 나간다는 팀의 안방이 어떻게 생겼나 구경 왔다는 정도의 호기심 정도가 발현했던 것 같다.


맨체스터 시티는 에티하드 스타디움 외벽에 세르히오 아게로·다비드 실바·케빈 더 브라위너와 같은 클럽의 핵심 선수들로 가득 치장해놓았다. 세계 최고 축구 지도자로 평가받는 ‘펩’ 과르디올라 감독에 대한 찬양심 가득한 표현물도 쉽게 볼 수 있다. 

가이드가 설명했던 1998-1999시즌 승격 플레이오프. 클럽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승리였다. @풋볼 보헤미안

동행했던 맨체스터 시티 가이드가 1998-1999시즌 풋볼리그 챔피언십(2부 리그) 승격 플레이오프서 후반 추가 시간 결승골을 성공시킨 폴 딕코프의 대형 사진을 보여주며 그 승리가 없었다면 지금의 클럽은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애석하게도 방문객들이 클럽이 구장 내외에 가득 치장한 스타플레이어를 카메라에 정신없이 담고 있던 터라 아무도 그 말에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지금의 블루문 스타에 열광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아득하게 먼 얘기일 뿐일테니 말이다.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에티하드 스타디움을 방문한 나와 같은 별종은 사실 많지 않으리라는 씁쓸한 생각도 스쳤다. 나란 녀석, 그 순간 참으로 별종이라는 생각에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에티하드 스타디움 입장 게이트 구석에 자리한 버트 트라우트만 동상 @풋볼 보헤미안

어쨌든 지금은 워낙 유명한 팀이 된 터라 인터넷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는 정보를 눈으로 목도하는 정도에 그쳤던 맨체스터 시티 둘러보기 도중 팬들이 입장하는 게이트 구석에 자리해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어느 골키퍼의 동상을 통해 바라던 스토리를 얻을 수 있었다. 영국 축구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축구 인생 스토리를 가진 인물, 1950년대 유럽 축구계에서 레프 야신과 더불어 세계 최고 골키퍼로 각광받던 독일 출신 버트 트라우트만을 다룬 동상이었다.


지난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골키퍼의 대명사로 불리는 야신과 달리 트라우트만은 우리 축구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페널티킥 선방 능력만큼은 그 야신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했고,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던 야신이 인정한 몇 안 되는 라이벌 골키퍼로 지목한 인물이라는 점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했던 선수였는지를 느낄 수 있다. 잉글랜드 역대 최고 골키퍼로 꼽히는 고든 뱅크스가 유소년 시절 가장 영향을 받았던 롤 모델이 바로 트라우트만이라고 할 정도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서는 역대 최고 골키퍼 중 하나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트라우트만이 지녔던 세계 최고 실력보다 시선을 끈 건 그의 기구한 인생이었다. 가이드가 설명하고, 훗날 좀 더 탐독하게 된 트라우트만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트라우트만은 독일서 보낸 유년 시절 아돌프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 정부가 만든 소년병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 출신이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영국군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나치 독일군 출신이다. 동부전선에 끌려가 그 악명 높은 독소 전쟁을 경험했으며, 전쟁 도중 갑자기 서부전선으로 끌려가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시도하던 연합군을 저지하기도 했다.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경험도 두 번이나 되고, 전쟁 말기에는 살육극에 대한 환멸을 느낀 나머지 탈영을 시도해 적군과 아군에게 동시에 쫓기는 신세를 경험하기도 했다. 


트라우트만이 영국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고향 브레멘 인근에서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영국 랭커셔주의 한 포로수용소로 압송됐다. 본래 트라우트만은 친나치 성향으로 분류되어 자칫하면 처형당할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수감 생활 도중 나치와 상관없는 독일인으로 재분류되어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3년 뒤 포로수용소가 완전히 개방됨에 따라 그는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영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살기로 했다. 본래 베른트 트라우트만이었던 그의 이름은 영국식으로 버트 트라우트만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트라우트만의 신화가 탄생했다.


훗날 잉글랜드 풋볼 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우뚝 서긴 했지만, 사실 트라우트만은 영국에 정착하기 전까지 축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히틀러 유겐트 시절 친구들과 가끔 축구나 뵐커볼(독일식 피구)를 즐긴 게 전부였고, 친구들과 축구를 할 때 그의 포지션은 늘 공격수였지 골키퍼와는 거리가 멀었다. 포로수용소 시절 포로들이 여가를 즐기기 위해 가끔씩 즐겼던 축구 경기에서 골키퍼를 본 게 그의 수문장 커리어의 첫 시작점이다.


그랬던 그가 영국에서 일약 최고의 골키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이다. 포로수용소에서 출소한 후 인연이 된 아마추어 클럽 세인트 헬렌스 AFC에서 수문장으로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듬해 맨체스터 시티가 그 재능을 알아보고 은퇴를 선언한 프랭크 스위프트를 대신할 문지기로 영입한 것이다. 이때가 만 25세였다. 이전까지 군인 신분, 심지어 포로 병사에 불과했던 이가 난데없이 프로축구 선수로 변신한 것이다.

시티 레전드 트라우트만이라는 이름과 그의 생몰년도가 보인다. @풋볼 보헤미안

트라우트만의 맨체스터 시티 입단은 당대에 커다란 논란을 야기했다. 당시는 전쟁이 막 끝난 직후였고, 독일에 대한 반감이 어마어마했을 때다. 게다가 전임자 스위프트는 지금도 맨체스터 시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로 꼽히는 인물인 것도 문제였다. 스위프트의 후계자로 전범국 독일 출신, 그것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영국군의 목숨을 노리던 독일군 병사를 영입했으니 그 사회적 파장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함께 뛰어야 할 선수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야기됐다. 당시 맨체스터 시티 주장 에릭 웨스트우드만 하더라도,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트라우트만과 목숨을 걸고 싸웠었다. 불과 몇 년전만 하더라도 적이었다는 얘기다. 당시 맨체스터에 유달리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주변의 모든 요소가 트라우트만의 맨체스터 시티 입단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끔 만들고 있었다. 시즌권 구매자들의 환불 요청이 쇄도했고, 몇몇 과격 팬들은 나치라는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심지어 죽이겠다는 협박도 날아들었다.


트라우트만은 이 모든 논란을 실력으로 극복했다. 뛰어난 선방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움츠리지 않는 용감한 플레이로 맨체스터 시티 팬들은 물론 영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잘 막는 건 당연하고, 특기였던 장거리 볼 던지기를 통해 공격 옵션으로도 맹활약을 펼쳤다. 

1955-1956 FA컵 결승 버밍엄 시티전이 끝난 후 트라우트만. 동료들의 부축을 받고 있다. @풋볼 보헤미안

1955-1956 잉글랜드 FA컵 결승전 활약상은 현지 팬들 사이에서 지금도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다. 버밍엄 시티 공격수 피터 머피와 충돌해 목이 부러진 큰 부상을 입고도, 눈부신 선방을 거듭해 맨체스터 시티에 FA컵 우승을 안긴 것이다. 정확히는 목을 다친 후 15분 동안 이 악물고 참고 뛰었었다. 사실 단순히 다친 상태에서 뛰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게, 경기 후 정밀 검진 결과 다섯 개의 뼈가 탈구되고 두 개의 뼈는 부러진 상태였다. 


은퇴는 당연하고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엄청난 상처를 입고도 팀의 승리를 책임졌던 것이다. 당시 트라우트만은 실로 투혼의 화신이었다. 나치라고 폭언을 퍼붓던 팬들이 그의 절대적인 지지자가 됐음은 두말할 것 없다. 지금도 맨체스터 시티 팬들 사이에서 역대 최고 외국인 선수 레전드를 꼽을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이름, 바로 트라우트만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의 아픔이 낳은 불행한 인물이 적진 한복판에서 영웅으로 거듭났다. 축구 선수들에게는 저마다 말 못 할 사연이 하나씩은 있다고는 하지만, 역사를 통틀어 이만큼 바닥에서 최고점을 찍은 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기구한 인생이었지만, 그는 끝내 승리자가 됐다. 블루문의 히어로라 할 만하다.

맨체스터 축구 박물관에도 트라우트만이 소개되어 있다.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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