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최강 셀틱의 탄생 이야기
스코틀랜드 명문 셀틱에 대해 한국 축구 팬들이 가지는 인식은 크게 두 가지다. 가장 먼저 뇌리에 스치는 인상은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최강자라는 점이다. 셀틱은 무려 50차례나 스코틀랜드 리그 정상에 올랐으며, 스코틀랜드 FA컵에서도 39번이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스코틀랜드는 물론 영국 최초의 유럽 챔피언이기도 하며, 글래스고 지역 라이벌 레인저스가 과거의 힘을 잃은 지금은 스코틀랜드에서 독보적인 지존이라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클럽이라는 이미지도 갖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격렬한 라이벌전 중 하나로 거론되는 ‘올드 펌’은 단순히 경쟁의식의 발로에서 탄생한 게 아니다. 글래스고의 본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영국계 성공회를 믿는 영국계 주민들과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오랜 역사적 악연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 지도층이었던 영국계 주민과 달리 아일랜드계 주민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밥 벌어먹기도 버거운 빈곤층 노동자들이 대다수였다. 인종, 종교, 계층이라는 갈등의 3박자를 가진 이 올드 펌에서 셀틱이 승리할 때마다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아일랜드계들은 박수와 환호를 쳤다. 즉, 셀틱은 아일랜드계를 대표하는 클럽이다.
셀틱은 어쩌다 아일랜드계를 대표하게 됐을까? 여기에는 신실한 신앙심을 가진 어느 신부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 앤드류 케린스, 세례명으로는 월프리드 신부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굶주리던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스코틀랜드에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그 과정에서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축구를 이용했다. 바로 그 과정에서 탄생한 팀이 셀틱이다.
1800년대 후반, 글래스고에는 아일랜드계 부랑자들이 많았다. 1800년대 중반 아일랜드를 뒤흔든 대기근 때문에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아일랜드인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바다 건너 글래스고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한 2등 국민이었다. 종교가 달랐고, 문맹이 대부분이었을 정도로 교육받지 못한 탓에 지역 사회에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직업을 구하지 못해 굶는 이들이 속출했고, 몇몇은 범죄 등 나쁜 길로 빠져들었다. 이들이 촌락을 이루었던 글래스고 동부 지역은 슬럼가로 인식되기도 했다.
월프리드 신부는 바로 이 지역에서 사제의 길을 걸었다. 못 배운 이들을 가르치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빵과 음식을 주었다. 그러면서 스코틀랜드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하지만 단순히 자선 활동과 교육 등으로는 좌절감에 젖은 아일랜드인들을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그때 월프리드 신부의 눈을 사로잡은 게 당시 급격하게 인기가 오르고 있던 축구였다. 축구 경기가 열리면 수많은 관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열광했다. 월프리드 신부는 사람들은 축구를 통해 하나 됨을 느끼고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봤다. 물론 관중들이 많이 모일수록 배고픈 아일랜드인들을 도울 수 있는 돈도 많이 모였다. 축구를 활용한다면 자신이 추진하던 자선 활동에 힘을 보탤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물론 막연한 감에 의지한 게 아니었다. 나름의 타당성 조사도 했다. 1887년 가난한 어린이들의 먹거리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글래스고를 연고로 한 렌턴 클럽과 에든버러 팀인 하이버니안을 초대해 자선 경기를 열었다. 이때 월프리드 신부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차 확인했다. 1만 2,000여 명의 관중이 몰려 기꺼이 지갑을 열었기 때문이다. 월프리드 신부는 성공을 확신하고 1888년 글래스고 동부에 자리한 성모 마리아 교회 홀에서 회의를 열어 지역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축구팀을 창단했다. 이 클럽이 바로 우리가 아는 셀틱이다.
애석한 건 월프리드 신부는 자신이 창단한 셀틱의 거대한 성공을 곁에서 지켜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1891-1892시즌 스코틀랜드 FA컵 우승 등 팀이 거둔 몇몇 성공을 함께 하긴 했으나, 1893년 상부의 명령에 따라 활동지역을 런던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런던에 가서도 그는 축구와 함께 하는 신앙생활을 했다. 글래스고에서 그랬듯, 런던 베스널 그린에서 아일랜드계 빈곤층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는 수단으로 축구를 활용했다고 한다. 축구는, 그의 신앙생활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스포츠였다.
시사용어 중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단어가 있다. 먼 옛날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이후에는 본래 살던 땅을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그 의미가 확장됐다. 먹고살기 위해 아일랜드섬을 떠나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흩뿌려진 아일랜드인들의 정체성 혹은 정체성 찾기를 뜻하는 표현에도 사용된다. 바로 아이리쉬 디아스포라(Irish Diaspora)라고 한다.
1990년대 중후반, 비로소 영국 내에 정착해 번듯한 사회 계층으로 뿌리를 내린 아일랜드 이민자 후손들 사이에서 이러한 아이리시 디아스포라가 한때 크게 관심을 모았다고 한다. 자신의 뿌리를 깨닫고, 지금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안락한 현실에 대한 감사함과 고마움을 힘든 시절을 견딘 선조들의 노력에서 찾는 운동이 영국 곳곳에서 전개됐다.
안타깝게도 월프리드 신부는 사실 글래스고를 떠나면서 시나브로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는데, 바로 이 아이리시 디아스포라 덕분에 다시 재조명될 수 있었다. 셀틱 파크 정문에는 세 개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클럽의 황금기를 가져온 명장 조크 스타인 감독, 그 스타인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역대 최고 선수 지미 존스톤, 그리고 바로 이 월프리드 신부가 그 주인공이다.
사실 축구와 전혀 상관없을 법한 인물이 클럽 최고의 레전드와 어깨를 나란히 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 어려웠던 시절 아일랜드인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축구를 지렛대 삼아 ‘위대한 유산’ 셀틱을 남겼다. 월프리드 신부가 없었다면 스타인 감독도, 존스톤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그 세 자리 중 하나가 그의 자리가 되는 건 결코 과찬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