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화려한 번아웃 직전
나는 늘 증명하며 살아왔다.
20대의 나는 스스로를 ‘찌질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집안, 특별할 것 없는 외모, 그저 그런 성적. 잘하는 것도, 자신 있는 것도 없었다. 공대를 선택했지만, 남학생이 대부분인 00공학과 강의실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받는 시선은 불편하고 때로는 무시로 이어졌다.
“여자가 무슨 공대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이 오기를 자극했다. 그때부터는 악착같이 매달렸다. 성적을 올리고 장학금을 받으며,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졸업 후 이력서를 수십 번 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방향을 틀어 공기업 시험에 도전했고, 손으로 쓴 지원서를 백 장 넘게 작성했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나는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다라는 안도감을 맛봤다.
입사 후에도 늘 눈에 띄었다. 여자 기술직 신입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늘 주목받았다. 술자리에도, 회의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열심히, 더 잘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남편을 만났다. 무뚝뚝하지만 성실한 선배, 나는 스스로 선택했고, 결국 쟁취했다. 스물아홉에 첫아이, 서른에 둘째. 내 20대 후반은 공부·입사·결혼·출산으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30대는 육아와 직장이 동시에 밀려왔다. 시어머니와의 갈등, 독박육아, 늘 미안함과 억울함이 뒤섞인 시간. 그래도 일에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증명해야 했다. 사무실에서 묵묵히 일하고, 현장에서는 더 늦게까지 버티며, 조직 속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남편은 아이 키우는 일에 무심했지만, 그 무심함조차 내게는 또 하나의 훈련이었다. “너도 먹을래?”라는 말 한마디 없이 혼자 라면을 끓여 먹던 남편, 아기가 울면 “야, 얘 똥 쌌어”라고 외치던 남편. 그 곁에서 나는 혼자서 아이를 안고 달래며 회사를 다녔다. 억울하고 버거웠지만, 그 시간을 버텨낸 것도 결국 나였다.
40대에 들어서면서 나는 다시 공부로 나를 증명했다. 영어책을 필사하며 유학의 꿈을 붙잡았고, 결국 영국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낯선 언어와 환경 속에서 문제를 풀고 논문을 쓰는 2년은, 다시 태어나는 훈련 같았다. 돌아와서는 영어가 된다는 이유로 해외사업 개발을 맡게 됐다.
새벽 7시 반 출근, 밤 9시 퇴근. 하루는 길었지만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짜릿했다. 동남아의 한 나라에서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나는 무대의 중심에 섰다. 누군가의 고개 끄덕임, 짧은 칭찬 한마디가 내 피로를 삼켜버렸다. 인정은 진통제였지만, 동시에 독이었다.
돌이켜보면, 20대의 나는 공부로, 30대의 나는 육아와 일로, 40대의 나는 해외사업으로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며 살아왔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그 말들을 스스로에게 주입하며 달려왔다.
그러나 증명은 끝이 없었다. 한 번의 성취는 잠시뿐, 곧 새로운 시험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달려온 시간의 끝에는, 결국 번아웃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