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기류를 타고

처음

by 석순

*로 인용 각주를, °로 내용 각주를 표기하였습니다.


지난 7월 개봉한 김한결 감독의 <파일럿(2024)>은 470만 관객을 동원하며 올해 한국 영화 흥행 순위 5위를 기록했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한국영화 대부분이 큰 흥행을 거두지 못한 것과 비교되는 성적이다. 이종필 감독의 <탈주>는 250만 명, 추창민 감독의 <행복의 나라>가 70만 명, 김태곤 감독의 <탈출>은 68만 명이라는 미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끈질기게 무더웠던 이번 여름, <파일럿>이 극장에서 가장 ‘볼만한’ 영화였다는 얘기다.


올해 여름 개봉한 한국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돌파한 것은 <파일럿>과 <탈주> 두 편뿐이었다. <파일럿>은 손익분기점인 220만 명을 훌쩍 넘기고 400만 명분의 수익을 창출했다. “남자에게는 빠르고 여자에게는 느리다”는 평을 듣는 이 영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다. 여장남자 코미디를 기반으로 페미니즘적 메세지를 전달하는 이 영화는 어떻게 400만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을까?


* "연도별 박스오피스", ⟪KOFIC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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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포토


스타 파일럿이었던 한정우(조정석 분)는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꽃다발 같은 우리 승무원들”이라는 말을 뱉고 그 자리에 있던 동료의 내부 고발로 해고된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한정우는 새 항공사에 취직하려 하지만, 이미 여러 회사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간 뒤다. 후배 파일럿인 서현석(신승호 분)은 혼란스러운 한정우에게 한에어의 노문영(서재희 분) 이사가 여성 파일럿 비율을 5대 5로 올려 남성 파일럿들의 취직이 어려워졌다고 불만을 호소한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정우는 아내인 정수영(김지현 분)에게 이혼을 통보받는다. 가정과 일자리를 잃고 여동생 한정미(한선화 분)와 엄마(오민애 분)가 있는 집으로 돌아온 한정우는 술을 마시고 동생의 이름으로 항공사에 지원해 1차 합격한다. 한정우는 ‘한정미’로 보이기 위해 ASMR 뷰티 유튜버인 동생에게 여장을 부탁하고, 성공적으로 항공사에 취직한다. 한정미로 한에어에 취직한 한정우는 윤슬기(이주명 분) 부기장을 만나 우정을 쌓아간다. 한정미 부기장으로 서현석 기장과 함께 비행을 나간 어느 날,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한정미는 기절한 서 기장 대신 추락하는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킨다. 한정우는 한정미가 되어서도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또다시 고공행진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윤슬기는 우연히 한정미의 지갑에 있는 한정우의 신분증을 보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는 한정우를 고발한 사람이 윤슬기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스타 파일럿이던 한정우를 한순간에 ‘나락’으로 보낸 윤슬기에게로 비난의 화살이 향한다. 한정미는 노 이사를 찾아가 윤 부기장에게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으니 도와달라 말한다. 그러나 오히려 노 이사는 한정미가 남자라는 서현석의 주장을 묻기 위해 윤슬기가 사내 성희롱 내부 고발자임을 언론에 알렸다고 얘기한다. 노 이사는 한정미를 자신이 만들어 나갈 새로운 에어라인의 ‘고귀한 잔다르크’로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정미가 한정우임을 알고 있다고 협박하며 윤 부기장의 일로 한정미에 관한 논란을 덮으려고 한다.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과 윤슬기 부기장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던 한정미는 노 이사 취임식에서 자신이 한정우임을 밝히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실력을 보고 뽑아야지, 여자라고 다 뽑으면 어떡하나?

한정우는 “노 이사가 여자만 뽑는다더라”는 소문을 듣고 한정미가 되기로 결심한다. <파일럿>은 여성의 사회 진출로 남성의 취업이 어려워졌다는 흔한 여장남자 코미디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며 시작한다. 한에어에 새롭게 취임한 노문영 이사는 여성 파일럿의 비율을 50%까지 올리겠다고 선언한다. <파일럿>의 판타지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전 세계 여성 파일럿의 비율은 4%에 불과하고, 항공사에서도 여성 파일럿은 10명 중 한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역차별 서사를 그대로 재현해 ‘여성상위시대’라는 판타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남성 등장인물인 서현석과 한정우가 신세 한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역차별’을 운운하는 사회의 모순을 재현한다. 한정우는 “아름다운 꽃다발 같은 우리 승무원들”이라는 말로 해고되며 항공업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난을 겪지만, 한정우는 서현석의 말대로 ‘여자만 뽑아서’ 취업에 실패한다고 생각한다. 서현석은 여성 파일럿이 항공사 파일럿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 ‘성별 불평등’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파일럿이 4%도 되지 않는 현실이, 한정우가 동료 직원들을 성과가 아닌 외모로 평가할 수 있는 현실이 ‘성별 불평등’인 것을 모르는 인물들을 통해 ‘역차별’이 허황된 주장임을 보여준다.


한정미 되기

<파일럿>은 한정우가 ‘한정미’로 변신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영화다. 한정우의 여장남자 되기는 복장 전환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한정미는 길거리에서도 눈에 띄지만, 그가 참석한 회식 자리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그가 남자인 티가 나는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정미 혼자 너무나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한정미가 된 한정우만이 회식 자리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차림이다.


한정우의 ‘유별난 한정미’는 사회가 어떤 여성을 승인하고 승인하지 않는지 보여준다. 이전의 여장남자 코미디 영화가 치마를 입고 다리를 쩍 벌리는 여장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그리기만 했다면, <파일럿>은(이 영화도 물론, 한정미가 다리를 벌리고 앉는 모습을 보여주며 웃음을 유발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시스젠더 여성과 비교되는 옷차림으로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여성이란 어떤 모습인지 묻는다. 화장하고, 긴 머리를 하고, 제모를 하고, 악세서리를 착용하고, 원피스를 입고, 구두를 신어야만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캐주얼 정장 바지를 입은 윤슬기는 ‘여성’이 아니게 되는가? ‘여성스러움’이란 무엇인가? 조신하지 않은 한정미를 보고 웃음이 나는 것은 그가 여장남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다리를 벌리고 앉는 한정미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한정미의 ‘과한’ 패싱passing°은 <파일럿>이 여장남자 코미디 영화이기 때문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여성성과 남성성과도 관련 있다. 유난스러워 보이는 한정미의 모습에서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해야 ‘여성’으로 인정하고, ‘남성’으로 인정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더 ‘여성적(MTF의 경우에)’이고 ‘남성적(FTM의 경우에)’인 모습을 하기도 한다. 사회가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진리’°에 기대어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성별 이분법을 뛰어넘거나 그 경계에 있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트랜스젠더들은 ‘여성보다 더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 ‘남성보다 더 남성’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한정우가 한정미가 되기 위해 걸치고, 거쳐야 했던 것들은 여성성과 성별 이분법에 대한 폭로이자 도전이다. 영화는 유쾌하게 웃으며 성별 이분법이란 얼마나 허술한지 질문한다. 윤슬기는 ‘남자’와 ‘여자’만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 자들에게 콧방귀를 뀌며 다시 돌아온 한정우를 “just 언니”로 소개한다. 윤슬기에게 한정미는 ‘여장한 한정우’가 아니었다. 그에게 한정미는 직장 내 성차별을 공유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어쩌면 친구 이상이었던 동료이자 동생이었다. 윤슬기로 인해 한정미는 ‘가짜 한정우’가 아닌 한정미라는 사람 그 자체가 된다. <파일럿>은 윤슬기와 한정미가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젠더를 가로지르는 활주로에 오른다. 이제, 곧 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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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포토

° '어떤 사람을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여기게끔 외양과 행동을 위장하는 일'을 말한다. 한마디로 퀴어로서는, 이성애 규범의 사회에서 '평범'한 척, 행세하는 일을 뜻한다. (오마이뉴스 시리즈(2024), "학교에서 광장까지... 친구들이 지워지고 있습니다", 2024.05.09.)

° 관련 내용은 이번 호 애벌레의 글 <타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설명하고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 생물학에 기댄 성별 구분은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간과된 채, 생물학적 성별 구분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객관적인 진실'로 여겨진다.




빠르게 추락하는

한정우는 한정미가 되면서 서현석이 던지는 ‘추파’의 불쾌함을, 직장에서 오가는 외모 칭찬의 불편함을 알게 된다. 사내 성희롱의 고발자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내쫓길 위험에 처한 윤슬기를 보며 여전히 현존하는 직장 내 성차별과 유리천장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파일럿>은 분명 매끄럽게 비행하는 페미니즘 코미디 영화는 아니다. 대부분의 여장남자 코미디 영화는 여장남자 주인공이 남성성과 이성애 중심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회복하고 공고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파일럿> 역시 이전 영화의 계보를 따르며 결론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정체가 들통날 위기에 처한 한정우와, 고발자임이 알려진 윤슬기의 상황이 겹치며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달려 나간다. 한정미는 이제 ‘되돌아’ 가야 한다. 한정우는 기자회견 전날, 엄마로부터 “쪽팔리게 살지 말자”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부재한 집안의 장남으로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파일럿이 되었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본다. ‘요즘에는 그런 말 하면 큰일 난다’는 말이 여전히 농담으로 사용되는 현실을 고발하며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던 영화는 결말에서 ‘안전한’ 길을 택한다. ‘스타 파일럿’이던 한정우에게 그가 아들이자 가장으로서 집안을 이끌었다는 서사를 씌운다.


엄마와의 통화 장면 이후, 기자회견에서 한정미는 자신의 정체가 한정우였음을 밝히고 자신의 성희롱 발언에 대해 사과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 관객은 한정우의 진실한 사과를 느끼기보다, 한정우라는 개인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성차별을 말하던 영화가 결말을 봉합하면서 가정 내 남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가부장제를 삽입하면서 찝찝함과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정미의 정체와 윤슬기의 미래를 두고 고조되는 긴장이 가부장제를 키워드로 해소되며 고공행진 하던 영화는 빠르게 추락한다. 한정우의 내면적인 성숙으로 가는 길목에 가부장제에서의 역할(아들-가장-남편)이 추가되며 페미니즘은 흐려지고, ‘휴머니즘’이 위로 떠오른다.


* 허윤(2020), <'여자가 더 좋은' 남자들: 1960년대 여장남자 코미디 영화를 통해 살펴본 비(非)헤게모니적 남성성/들>,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 서울: 담담프로젝트.


고공행진에 실패할지라도

<파일럿>은 코미디 영화여야 했다. 한정미가 되기를 선택한 한정우를, 서현석을, 한정미가 되기 위해 걸쳐야 하는 것들을, 정수영이 껴안은 독박육아를, 아들 한시후의 꿈인 발레를 무시하는 자들을 ‘유머’라는 이름으로 비웃기 위해서. 유쾌하게 날아오른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지나며 추락하지만 한정미가 그랬듯이, 무사히 착륙한다. 비록 한정우가 가부장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되돌아보고 다잡으며 성장하기는 하지만, 영화가 직장 내 성적 위계가 존재함을 말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한정미가 된 한정우가 여성스럽지 못한 행동을 할 때 웃는 관객들이 있고, 서현석을 너무나 ‘한남’으로 그려 불편한 사람들이 있고, 여전히 한정우가 한 발언이 왜 성희롱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페미니즘 영화 같아서 유쾌했지만 어딘가 찝찝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고공행진에 실패하고 추락을 겪을지라도 <파일럿>은 유리천장을, 사내 성차별을, 남성성과 여성성을 말하고 있다. 외모 칭찬이 왜 성희롱이냐는 현실을, 여아와 남아가 구분된 장난감 코너를 고발하는 영화가 4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것은 분명 유의미한 성적이다. <파일럿>은 페미니즘을 얘기하는 영화가 상업영화로서 흥행할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페미니즘을 전면적으로 당당히 걸어 내보일 수 있는 한국 상업영화를 기대한다. 어쩌면 뻔할지 모르겠지만, 그 ‘뻔한 페미니즘’을 말하는 영화를 바란다. 그런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다린다. 이제는, 추락 없는 비행을 원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허윤(2020). <’여자가 더 좋은’ 남자들: 1960년대 여장남자 코미디 영화를 통해 살펴본 비(非)헤게모니적 남성성/들>.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 서울: 담담프로젝트.

<기사>

오마이뉴스 시리즈(2024). “학교에서 광장까지... 친구들이 지워지고 있습니다”. 2024.05.09.

<기타>

“연도별 박스오피스”. ⟪KOFIC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https://www.kobis.or.kr/kobis/business/stat/boxs/findYearlyBoxOfficeList.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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