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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아가 Oct 29. 2022

2022.2.7  -숭고한 죽음


-1-

"숭고한 죽음"이라는 주제는 이 글을 쓰기 1년전부터 생각했던 주제다.

하지만 쉽사리 글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제를 한번 생각이라도 하고 나면 끊이질 않는 잡념과 

죽음을 단 한차례도 체험해보지 못한 필자의 경험

-만약 한 차례라도 경험해봤다면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경험 속에 존재하지 않는 머릿 속에서 맴도는 죽음에 대한 환상 같은 감성이 

나를 감싸면서 포개고 있으면 

사실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어떻게 윤문을 해야 할지 그 어떠한 기준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이 기준점이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때로는 유감으로, 때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기준점이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주제에 걸 맞는 글을 쓴다는 것은 

시공간도 제약되지 않고 그 어떠한 단서도 주어지지 않는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서 그 무언가를 논한다는 

잔인하고도 잔혹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은, 

비록 초고에서는 제대로 된 정리나 윤문이 되지 않는다하여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 자신의 생명력과 생명태동과 멀어지는 

자신의 흐름과도 같이 

비록 서툴지라도 이 흐름을 따르기로 하였다.


-2-

어떤 이의 삶은 필자인 나 자신조차도 현혹될 정도로 

아름다운 감정과 또한 이를 넘어선 고귀한 감정으로 표현된 반면에,


어떤 이의 삶은 그가 살았던 실제보다 

더욱더 구차하게 그리고 추하고 밉상스럽게 표현되기도 한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것은 전자와 후자를 기술하는 후세 또는 일종의 권위를 부여받은 권위자 등에 의한 자의적인 기술이다. 

자의적인 기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극한은 

기술하는 자의 감정이 주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이 주를 이룬 이러한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을 그대로 수용하는가? 아니면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비판을 가하는가?

보통의 다수들은 후자의 입장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후자의 입장을 반드시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후자의 입장을 합리적으로 보는 기준, 비판이 타당하면서 정당할 것이라고 보는 기준 등,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준거틀 또한 우리의 자의성 내에서 결정된 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로 보아 이러한 준거틀 또한 결코 절대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또한 너무나도 인간적인 감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우리는 신이 될 수 없고,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준거라는 것은 마련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준거는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자의성으로 모든 것을 해명할 수는 없다.

신의 부재로 인한 우리의 선택과 행위를 

자의성으로만 해명하려 든다면,

이것은 우리 인간의 야만적이고도 동물적인 습성을 적나라하게 해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 행위의 결과만을 보고나서도 결과론적으로 인간을 이성적인 

생명체라고 단언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의 자의성이라는 치명적 독기를 명백히 배제시켜버린 

인간 위주의 자의적인 "자화자찬"에 불과하기 나름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라는 가정을 먼저 제시하고 

인간이 이성적이기 위함임을 가장해내기 위한 

끼워 맞추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자화자찬"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의미는 다른 것이 없다. 오직 인간들만의 "자화자찬"이라는 자기위안적 행동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3-

인간의 삶과 생애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생이 합목적성을 가졌다는 견해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목표 혹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것은 한 개인의 소소한 꿈에 불과하기 쉽다.

개인적인 목표나 목적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에게 국한되며, 

이것은 인류의 역사 즉, 인류사적인 어떠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양산해내지 못한다.


거시적으로 인간의 목표나 목적을 돌이켜본다면,

인간은 절대로 합목적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여기에는 커다란 장애물이 존재한다.


인간은 본디 이기적이다.

이기심이 선하건 악하건 간에, 인류라는 커다란 결사체 내지는 공동체에서는, 

이기심은 상시 부딪힐 수밖에 없다.

지금 나는 인간의 선천적인 이기심이나 이타주의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개개인의 인간은 분명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상이함의 정도가 심화될 수도 있다.

이것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들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상이한 감정과 생각은 원자 속의 분자들처럼, 분자 속의 미립자들처럼 상호 충돌한다.

이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저 지구상의 사유하는 객체들(특히 인간들) 간의 어느 순간 정해진 

암묵적인 규칙일 뿐이다.


비록 암묵적일지어라 하더라도 이러한 규칙은 

새로운 것을 탄생시킨다. 바로 주(객)체-주(객)체의 관계성이다.

관계성은 우리의 고립을 방해시킨다.

결국 우리는 드넓은 그물망 속에서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또한 의지를 가능케 하는 힘이 있다.


-4-

관계성은 정해진 것이 없다.

장기나 체스처럼 규칙은 존재하나 시공간에서 전술된 게임들보다는 자유롭다.

정해진 계산, 이해 등을 수량화로 환원시키기란 불가하다.

이제부터 여기서는 우연성, 선택성, 우발성 등만이 존재한다.

즉, 정해진 결과가 아닌 우리의 욕망에 따라 

그때그때 선택이 이루어진다.

만일 우리를 제약하는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우리의 욕망이리라...


우리는 순간순간적인 선택으로 인해, 

우리의 결과를 도출해낸다.

우연성의 누적으로 인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도출해낸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우리의 확고한 의지도 존재한다.


하지만 의지는 우연성의 개입요소 중 한 가지 요소일뿐, 

이 게임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니다.

우연은 결과를 낳고 결과는 우연들을 정해진 법칙으로 가장할 뿐이다.


우리의 삶의 행위들은, 사실은 우연들이다.

다만 우리가 결과만을 보는 것은, 

실현되지 않은 우연들과 운명들을 전부 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결과만이 남는다.


-5-

지금까지 지면의 상당수를 "우연성"에 대해 할애했다.

전술된 우연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의 죽음 또한 우연성이다. 

또한 죽음을 강요당한 선택적인 죽음이기도 하다.

 

우연성, 선택성 그리고 종속성

여기까지가 지금의 인간 행위, 인류사, 죽음에 대한 성질이기도 하다.

또한 대부분의 삶의 행위가 다시 한 번 우연, 선택, 종속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연은 분명 우연인데, 우연의 누적이 일종의 법칙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법칙은 환상 속의 가상일 수도 있고 정말 실재하는 법칙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대한 우연성 속에서 일탈해버린 실재하는 법칙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죽음이다.


삶과 세상이 우연들의 총합 그 이상으로 가장된 세계라고 하여도,

우리는 이러한 실재 내지는 실체에 대해 그 어떤 한마디를 할 수 없다 하여도,

"우연들의 세계"속에서 가장 명백하고 필연적인 법칙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죽음 밖에는 없을 것이다.


사사로운 인간들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존재하고

-사실 이러한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나를 제외한 그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감정이 보다 앞서기 마련이고 존재한다.

미워함이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적대감의 가장 고상하고 세련된 표현일 뿐,

이는 원한, 시기, 증오, 질투로 끊임없이 팽창할 뿐이다....


움푹 파인 웅덩이에 나의 다리 하나가 빠져버렸을 때,

웅덩이를 메우고 있던 지난 밤 내리다만 더러운 흙탕물이 

나의 바지에 젖다 못한, 그 흔적을 용맹스럽게 앞세우고 있을 때

그때의 명료한 기분을 독자들은 아는가?


이때의 불쾌감과 개운치 못함은 

사실 원한, 시기, 증오, 질투를 이기지 못한다.

아니, 이길 수가 없다.


소위 인간의 감정과 감성은 뇌에서 일정 방식에 따라 형성해 낸 화합물들의 결과라고 한다. 하지만 이를 화합물의 결과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결과가 양산해내는 세상 속의 그림들은 너무 잔혹하기만 하다.

이의 잔혹성은 연금술사가 되어버린 감정의 화합물이 만들어냈다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뿐더러, 믿고 싶지 않을 정도이니................

화합물의 결과는 단순한 인간들의 혈흔이 

바닥에 낭자한 "영광뿐인 상처"나 "과거의 화려한 초상화"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름 모를 태곳적 선조들부터 물려받은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 본연의 고유의 유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여타의 생명들과는 다르다.

나는 여기서 인간이 여타의 생명들과 우월함을 말하고자함은 아니다.

인간은 여타 생명들이 지니지 못한, 

어찌 보면 인간만이 운 좋게 물려받은, 

인간만의 판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혈흔의 추억들이 측정될 수 없는-어찌 보면 가상에 가까운 

인간의 사유공간 내에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고스란히 아주 잘 간직되고 있다.

전술된 문장에서는 우리의 사유공간이 가상에 가까울 수 있다고 필자는 말하였지만 이 유산만큼은 어찌 오래된 세월을 거쳐 가상의 공간에도 그리 간직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유산은 아주 잘 보존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은, 혈흔의 추억들이 분명 잘못되고 그릇된 것임을 안다.

또한 옳지 못한 것임을 또한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게임에서만큼은 1000번이고 10000번이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인간은 늘 조심하기를 주의한다. 

항상 조심하기 위해 그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무언가에 탐닉하고 있는 동안에도 

.................


하지만 결국 인간은 실수를 한다.

1000번이고 10000번이고 단 한 번의 실수라는 것은, 

그간의 주의와 경계 그리고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되돌아갔음을 증명해준다.


단 한 번의 실수는 

인간 역사의 빈 공간을 

다시 혈흔으로 채우기 마련이다.


늘 조심하고 주의하는데도,

늘 노력하는데도,

그래도 인간의 역사는 늘 혈흔의 자국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혈흔의 초상화"는 

과거 단순한 사건이나 선조들의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아름다운 유적은 

오래된 바빌로니아 유적들이나 

원시 선사 시대의 유적들보다 더 고귀했음을 의미했지, 

이것이 저들보다 열등함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이 아름다운 유적이야 말로 

인간의 사랑부터 원한, 시기, 증오, 질투....

이 모든 것을 고이 간직해왔고 

숭고하게 보존된, 

선조들의 후예들조차 놀랄만한 기이한 대 서사시이기 때문이다.


-6-

대 서사시....


이것은 고대에도, 현대에도 극찬 받는 호메이니의 "일리아스" 따위는 사실 

비견조차 되지 않는다.

"일리아스"는 그 제목만으로도 현대인들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마력을 

분명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일리아스"조차 이 대 서사시에 무참히 짓밟히고 

"세발의 피" 정도로 치부될 정도면 이 대 서사시는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사실 이 웅장함은 역시 우리 인간이 가공해나고 조작해놓은 

후대 현대인들은 얄팍한 정도 밖에 잘 모르는 지난날 선조들이 만든 수식어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 "웅장함"을 직접 체험해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웅장함 속으로 직접 들어 가보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웅장함 속의 체험을, 우리의 육신으로 직접 느껴보기도 전에,

전술된 혈흔의 의미를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이 작업은 알 수 없는 미로로 된 거대한 동굴을 탐험하기 위한 우리들의 목표마저도 앞두고선, 동굴 앞에 있는 작은 동산을 오르는 어찌 보면 간단한 작업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서술하지만, 

"혈흔의 초상화"는 인간의 사랑부터 원한, 시기, 증오, 질투....

이 모든 것을 고이 간직해왔고, 

숭고하게 보존된, 지구상의 오직 인간들만의 유산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혹자는 이 초상화를 미화시키기도 모자라 

"찬란하다","고귀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 반면,

혹자는 잔혹하고 알 수 없는 피비린내가 유발하는 

헛구역질, 구토까지도, 

자신의 기관지에 머무는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도 한다.

때로는 어떠한 혹자는, 

진심으로 그가 이전에 식사한 토사물이 타일로 된 바닥으로 떨어지다 못해,

그것이 사방으로 튀어 오름으로써, 

그의 감정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허나, 이러한 토사물은 물청소를 통하면 가볍게 처리될 수 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초상화의 혈흔들은 물청소로 쉽게 처리될 수 있는 작업은 절대 아님이다.

그것은 지우면 지울수록 

더욱 더 우리 시야의 표상으로서 

각인되고 명료해지고 뚜렷해지는 

지울 수 없는 자국이다.


우리는 이 자국을 지우려 해서도, 지우고 싶어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초상화"라는 유품을 물려받은 후예로서 

이 자국의 의미를 심오하게 고민하고 통찰하며

그 의미를 관조할 정도로 알아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과제이며 숙명이다.

이것은 원하지도 않은 "강요받은" 상속자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7-

혈흔은 초상화에 나타난 그 표징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해부학적으로 낱낱이 파고든다 해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 대 서사시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혈흔은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미처 보지 못한 여러 가지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고작 소수에의 지나지 않는 혈흔을 보았을 뿐이다.


유물론적으로까지 표현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의식"마저도 고유의 흐름이 

존재하듯이, 혈흔 또한 고유의 흐름이 분명 시사되어 있다.

우리는 아직 파헤치지 않은 동굴의 빈 공간을 향해 

계속해서 곡갱이질을 해댈 뿐이다.


우리는 이 과정의 중간지점에 가서조차, 

혈흔이 말하고자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다.

그래서 성급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혈흔이 말하고자하는 것은, 

저 멀리 .....동굴 끝까지 나아가 

우리를 환하게 맞이해주는

시야에 비치는 푸른 빛의 바다가 나타날 지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여기서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질 걱정 또한 하지 않아도 된다.

다양한 층위를 이룬 단단한 주상벽리 또한, 

아래부터 우리가 서 있는 위치점까지 아주 견고하게 떠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값비싼 촛대에 놓인 희귀한 양초조차 이보다 더 견고할 수는 없으리라..........."


 

-8-

"바다를 처음 보다“

독자들은 먼 옛날 과거 "사막의 유목민"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 당시의 유목민들은 아마 바다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다를 본 누군가라는 소수가 있을 지어라도, 

대다수는 바다를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이 높다.

불행히도 현대에도 깊은 내륙지역이나 바다와의 괴리감이 있는 지역, 

고립된 지역의 주민들은 운 좋은 이들 말고는 바다를 평생 못 볼 가능성이 높다.


바다를 생애에 걸쳐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은, 

바다의 색조차 마음대로 재단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자의적인 재단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은, 

바다의 색에 대해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그들이 바다의 색부터 시작해서 바다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 설명한다면 

신비한 것을 넘어 오히려 기괴스럽지 아니한가?...

바다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실재에 대해 무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무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다는 푸르다"

바다를 한 번 이상이라도 본 이들은, 

바다가 푸르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고 있다.

전술된 사막의 유목민과도 같이,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와 바다를 단 한번이라도 본 이...

양자 중 그 누가 더 운이 좋다 말할 수 있겠는가?


객관적인 우리의 사고의식 그대로라면, 

바다를 단 한번이라도 본 이, 즉 후자가 운이 좋다는 의견이 압도적일 것이다.

바다는 지구 표면의 약 97%를 감싸 안고 있다.

이러한 존재를 생이 다하는 날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과 불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막의 유목민과도 같은 존재에게 

바다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마냥 불행의 여신이 이들에게 저주와도 같은 은총만을 내린 것은 아니다.


바다를 한 번 이상이라도 본 이들은 

그가 바다를 본 이상 "바다는 푸르다"를 

바다를 그리워하거나 바다를 생각일 때마다 

되내이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그들이 임종하는 순간까지도 "바다는 푸르다"라는 명제는 

빠지지 않는 돌 뿌리처럼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반면 바다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저주와도 같은 은총을 받은 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푸른 바다"를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바다는 푸르다"라는 명제에 가까운 사실 조차 인정하지 않기 쉽다.

그들에게만큼은 바다는 푸른 것을 포함해서, 

석류같은 붉은 색일 수도, 잔잔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오렌지 빛깔일 수도,

그들에게 좀처럼 보기 드문 과일인 바나나 색일 수도 있는 것이다.

최소한 사막의 유목민들은 "바다는 푸르다"라는 명제에 구속되지 않은 

유일한 예술가들이다.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있어, 

그들은 바다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그 지평의 장단조차도, 

마음대로 재단이 가능하며, 

다양한 상상과 평가 그리고 바다의 색채 또한 

그들이 원하는 감정으로 채색이 가능하다.


필자와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은 너무나도 운이 좋게도

"바다는 푸르다"를 알게 되었지만, 

이 글의 대주제인 "죽음" "숭고함" 그리고 이 둘이 결합한 "숭고한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사유하기에는 

너무나도 불행한 "고정적인 편견"이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곧 우리의 자유롭기 그지없는, 

상상의 흐름조차 가로막는 커다란 암석과도 같은,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는 사막의 한 가운데서 고립된 경험조차 해본 적이 독자들 거의 대부분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기다랗고 기다른 대장정의 늪을 통과하려면, 

우리는 스스로 "사막의 유목민"이 되기를 자처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는 동굴의 미로를 전부 다 통과한 자들로서, 

때로는 무관심하게, 때로는 환기된 낯선 감정으로써, 

동굴 밖에 부채처럼 펼쳐진 숭고한 바다를 "관조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상과 존재가 숭고하면 숭고할수록, 

그것들은 처음에 자신들을 숨기려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관조의 지혜를 얻은 자에게는,

그것들은 자신들을 숨기기는커녕 "드러냄"에 몰두한다.

부족함이 없는 이러한 드러냄의 충만함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고립되기를 요구된다.


-9-

다시, 앞서 말한 "혈흔의 초상화"에 대해 고개를 돌려보자.

"혈흔의 초상화" 중 중요한 표현기법인 혈흔들은, 

많은 것들을 의미하며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상상하게 해준다.

혈흔에 대한 역사적 계보에 대한 추적과 혈흔이 현대인들에게 제시하는 

미학적 시사까지... 

우리는 "사막의 유목민"과도 같은 심정, 아니 유목민과의 의식 제전반을 합일하기에 이른다.


혈흔을 추적하며 우리의 상상적 의식은, 생각보다 많은 사실들을 떠올려준다.

연인의 감정 같은 사랑이 남긴 혈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긴 혈흔,

인간사에 평화보다 더욱 더 빈번했던 전쟁이 남긴 혈흔,

전제군주들의 반대자의 신체에 남긴 고문을 통한 혈흔,

오직 나 자신을 위해 타인을 향해 부메랑처럼 힘껏 날려버린

원한, 시기, 증오, 질투....-지금부터 이를 증오심이라고 하겠다-가 남긴 혈흔,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할 

숭고함이 남긴 혈흔이 존재한다.


나의 펜이 약동적이면서도 요동스럽기 그지없는 움직임을

발광 맞게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우리가 최종적으로 점검할 숭고함이 남긴 혈흔에 대해서만큼은 모른다.


이것은 나의 펜의 발광만이, 

전개와 전개, 윤문과 윤문을 거듭하여, 

종국적으로 그 최종적인 답안의 조그만 힌트라도 제시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인 나와 독자인 여러분들은 그저 전개를 따라가기만 하면 될 것이다.


-10-

혈흔.....

나는 이 글의 대주제를 위해 혈흔이라는 키워드를 쓰기로 선택하였다.

이 글은 성인들이라 불리는 거룩한 인물들의 자기희생을 통한 타인에 대한 

이타주의...

중세 프랑스의 노블리쥬 오블리쥬와 같은 미담 속의 이타주의...

또한, 부모의 희생을 통한 자식에 대한 이타주의를 전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글은 전혀 아님을 

다시 한 번 밝힌다.


인간의 역사 중 전쟁은 빈번했고 동시에 수반된 것이, 

인간의 생리적인 결핍들인 굶주림(기아), 기형, 물리적인 살과 육의 상실,

사랑하는 이나 사랑하는 가족들의 상실 그리고 더불어, 

이와의 충격에 따른 살아남은 자의 죗값과도 같은 의식의 상실,

그리고 의식 상실의 종국이라고도 파멸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허무주의, 

맬랑콜리, 자기부정, 자유 등이 있다.


이렇게 상실된 것은 분명 인간사의 혈흔의 전개들과 거의 동시적으로 

존재하였고, 그와 궤를 같이 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은 자명하다.

현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고대로의 과거에로 회귀할수록,

인간사 중 물리적인 종속관계가 현대보다 보다 명확했음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종속관계 속에서도 인간의 사랑과도 같은 감정은 살아있었다. 

반면에 타인을 업신여기고 경멸하는 원한, 시기, 증오, 질투와 

같은 자기 파멸적인 감정 또한 생동감이 넘치도록 살아있었다. 또한 다수의 

인민들을, 종속관계에서 구속력까지 가지는 법률, 교리 등과 같은 법칙들이 

인위적으로 생겨났음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이다.


나는 -10-의 제한된 지면에서 상실과 생명이라는 대비되는 상실의 구조들을 

말하였다.

이렇게 제시된, 대비되는 감정들을 내가 그나마 편이하게 나열하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의 선구자인 레비 스토로스의 이항대립이라는 구조주의 원칙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놀랍도록 이 단순함과 간결함에 이항대립을 알고 있거나 알게 될 독자들은 놀랄 지도 모른다. 이 단순함은 복잡성에 기인한 우리 

사고의 정리되지 않은 널리 흩뿌려진 복잡한 사유들을 놀랍도록 정리해주는 좋은 장치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러한 좋은 장치를 통해 인간사의 대조성과 같은 성격,

개별 자아의 의식 구조, 그리고 역사적인 전개를 그나마 편이하게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내가 이 장치를 통해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인간사의 대조성이다.


"혈흔의 초상화"라는 작품 중, 

혈흔은 분명 긍정적 요소보다 부정적 요소가 인간사의 대부분을 차지했음은 거의 분명하다.

부정적 요소를 지닌 거의 다수 또는 대부분의 혈흔이라는 표현기법인 이것들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혈흔이 오늘의 현대까지 

인간사의 대부분을 간직하고 차지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11-

그렇다....

인간사의 대부분은 혈흔들로 묘사되고 표현되어 왔다.

혈흔들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인간사를 가득 채운 나머지, 

인간사의 하얀 공백조차 모자를 정도로 과장하리라 싶었다.


하지만 과장은 아니다.

이점이 인간사의 사실인 것을 우리는 분명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시점에서 -10-에서 전술된 유용한 장치인 이항대립구조가 활용되기 시작한다.

인간사 중 대다수가 흘린 저 혈흔들 덕분에,

조그만 생명이 발아하고 싹트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즉 혈흔의 모순은 생명을 낳는다.

그것도 모진 풍파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살아남는,

모진 단 하나의 생명을 말이다.


혈흔은 분명 죽음의 상징이다.

하지만 이것은 혈흔을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만큼,

상징으로 귀결된 것일 뿐이다.


상징으로 귀결되기 이전, 혈흔은 혈이 되고 만다.

즉, 혈흔에서 혈로 돌아가는 "계보적 사건의 진실"이 그 민낯을 드러나고 만다.

혈은 인간사 대부분을 꾸기적꾸기적 그것을 내용으로 채워놓은 

대다수 인간들의 혈을 의미한다.


혈은 엄청난 양으로, 흐르다 흐르다 못해 흙토를 붉게 물들게 기어코야 해내고 만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모자라 

일꾼들은 흐르는 혈을 덮기 위해 

계속해서 흙을 퍼나른다.

일꾼들의 (흙을 퍼나르는) 작업은 끝이 날줄 모른다.

어느새 일꾼들의 땀과 혈은 하나가 되어 흙토의 맨 바닥에서조차 흐르기 시작한다.

혈흔은 이처럼 "하나의 상징" 이전에,

그칠줄 모르는 어느 절벽의 계곡물처럼, 

그렇게 생명적으로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12-

지금까지의 논의 중에서,

혈흔은 분명 죽은 이의 상징이고 

혈은 분명 산 자의 상징이라는 점은 결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또한 분명한 점은 혈흔은 혈흔이라는 상징이기 이전에,

도약적으로 활동하는 생명력을 가진 혈이라는 사실이다.

혈은 분명 그칠 줄 모르는 어느 절벽의 계곡물처럼, 

그렇게 생명적으로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던 것 또한 자명하다.

그리고 누군가도 모르게-만약 안다면 신만이 알 것이다.

혈이 넘쳐흐르는 을씨년스러운 계곡의 보잘 것 없고 보이기 힘든 주변에 제한되고 국한돼서만, 

작은 새 생명은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의 글을 써오면서-적은 분량의 글에 불과하지만 

주로 생명의 실재와 실존, 생명력의 태동력과 같은 주제에 대해 

대부분의 정력을 할애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을 긍정"을 논하는 동안,

이번만큼의 필자는 대다수에게 잊혀지고 망각되고 폐기되어 버린

"삶의 부정" 즉 "죽음"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함이 이 글의 의도인 셈이다.


나는 혼잣말을 한다.

‘죽은 이는 누구란 말인가?‘

’죽은 이의 혼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내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죽은 자의 혈흔뿐이고, 

죽은 자의 본질에 대해서는 더 이상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13-

죽은 이들의 혈은 새롭기 그지없는 

새 생명을 잉태시키기에는 충분했지만,   

혈의 진짜 소유자인 죽은 이들은 

역사라는 명예 아닌 오명 내지는 무덤 속에 이내 매장되고 말았다.

이제는 이 무덤을 파헤치고자 한다.

영웅적 서사와 이에 부합되는 신화는 

사실 거짓에 불과하다.

더욱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이는 후대를 맛좋은 사냥감처럼 겨냥한 

거짓과 왜곡의 교묘한 퍼즐이라는 조합의 완성이라는 사태로

보기 좋고 듣기 좋게 가공해 낸, 실체 없는 "기만된 실체"에 불과할 나름이다.


선조들은 분명 어마어마한 양의 혈을 흘려버리고 말았다-그것이 희생이든 

아니든 간에.

다만 선조들의 활약과 업적은 지워지다 못해 

그것은 후대에 와서 망각되고 말았다.

다만 결과론적으로는 지금도 진행중인 "새 생명의 성장"이라는 현상만이 

전부이다.


결과론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인간사는 "새 생명의 성장"이라는 현상만을 기술했을 뿐,

죽은 자들에 대한 현상은 막상 기술하지 못하였다.


-14-

"죽은 이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

이 사실은 자명하다.

주 그리스도가 아닌 이상, 

죽은 이가 신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


지구라는 별의 모든 법칙 중,

가장 자명한 법칙은 인과관계다.

고상하고 난해한 물리학 법칙은 아닐지라도,

그 누군가라도 어린 아이에게 가르쳐주지 아닐지라도,

이러한 인과관계의 법칙은 자명한 법칙 중의 하나일 터이다.


잉태한 새 생명이라는 (결과적) 산물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 생명을 창조한 원인은 우리들에게 잊혀져 왔다.

도무지 기억조차 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원인들은 철저히 잊혀지고 망각돼왔다.

단지 원인들에 대한 추론됨이 가능한 

"혈의 초상화"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남겨진 후대들이 저 잊혀진 상징들을 어찌 알 수 있으리?"

...............


죽은 이들은 말을 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들은 목 놓아 외칠 수도,

마음껏 절규조차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선조에 해당되는 죽은 이들이,

먼 대과거에 해당하는 백악기,쥐라기에 생존했던 공룡들의 화석 같은 

단순한 연구대상이나 흥미거리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은(죽은 이들-여기서는 망자들을 말한다)

후대에게 어떠한 보상이나 인정조차 원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로부터 잉태한 새 생명으로부터 

선구자의 위상과 지위로서 인정받기 조차도

원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인과관계"

(결과적) 산물은 명료해졌지만

원인이라는 것은 아직도 불투명한 장막 속에 

가려져 있는 것만 같다.

원인은 아직 "표상되어 있지 않음"에는 자명하다.


-15-

선조들은 이름 모를 초상화만 남겨 주었을 뿐이다.

더군다나 이를 해독할 줄 아는 이는 극소수의 전문가에 불과하다.

여기서 전문가라 함은 "역사가, 철학자, 예술가" 등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문적인 해독기술은 극소수에 국한되고 

그것은 비밀리에 유지되고 전승될 나름이다.

다수의 후대들은 이를 모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술은 한동안은 마치 비밀의 열쇠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6-

"초상화의 비밀"

초상화에는 많은 기호들이 담겨 있다.

너무나도 상이할 정도로...................

우리들은 이 기호들을 보기도 전에 두려움에서부터 젖어버리고 만다.


우리가 전혀 알 수 없었던 미지의 세계, 무지의 세계, 그리고 신비한 세계,

이 모든 세계들을 비밀스러운 비율에 의한 혼합이라는 그 어떤 것은

우리를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우리들은 

사실은 비겁하고 나약하고 용기가 없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의 주된 특징은, 

대면할 표상조차 마주하지 않은 채, 

미리부터 공포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우리는 용기를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딛어

초상화에 시야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기호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공포감은 사라진다.


공포감은 이내 자취를 감춰버린다.

아니, 도주해버린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기호는 사실 낯설지가 않았다.

오히려 낯익으면 익을수록, 낯익은 기호들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어디서 많이 사용된 듯한.............‘

...........


초상화에는 후대의 현대인들, 즉 우리가 사용하는(또한 사용 중인) 기호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우리는 낫을 놓고 ㄱ 자도 모르듯,

그 기호에게서 엄한 공포심을...

괜한 낯설음을 미리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이들이나 오늘의 우리들이나

사용하는 장치와 도구는 다를지라도

우리의 기호는 대부분 유사하며 동일하였다...

그것은 사랑, 설레임, 만족, 외경심, 자유, 기대감, 원한, 시기, 증오, 질투. 

경멸 등등.....

비밀의 열쇠는 사실 우리에게 모두 친숙한 것들이었다.

다만 우리가 비밀의 열쇠를 그토록 오랫동안 찾을 수 없던 것은,

극소수의 비밀스러움과 알맞은 열쇠를 찾아보려 하지 않은

우리의 이름 모를 두려움과 나태함에서 기인한다.


-17-

"기호는 분명 친숙하다"

무지에서 지知로의 변화를 경험하고 나서 

우리는 기호들에게서 분명 친숙함을 발견하고야 만다.

다만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기가 있다면,

기호들의 밑바닥에 깔린 그 무언가와 

앞부분부터 전술된 혈흔의 기호일 것이다.


얘기를 잠시 돌려보자. 그것도 아주 잠시...

그림을 그릴 때 화가는 스케치를 마친 직후,

꼭 거치는 행위가 하나 있다.

그것은 스케치 부분 위로, 좌우, 위아래 할 것 없이 

그만의 배경화면을 그리는 것이다.

제한된 공간을 가득 메우듯이

화가의 배경화면은 그렇게 완성된다.

우리는 아직 초상화의 배경화면을 미처 보지 못하였다.


배경화면을 보도록 하자.

배경화면에는 추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런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해골들의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무도회가 그려진 의도도, 

어떤 해골은 미적인 아름다움을, 

어떤 해골은 내세우기도 부끄럽기 그지없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배경화면을 전혀 알 수 없다. 

또한 이대로는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죽은 이들은 분명 말을 하지도 행위 하지도 못한다.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외침조차 그들에게는 불가하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간직되고 전승된 초상화에는, 

분명 지금은 죽은 존재가 된 자들이, 혈흔이 되기 전 "혈 그 자체"였을 때,

"혈의 존재"로서 남긴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것은 전술된 무도회 같은 우리네의 삶의 모습,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혼탁하게 섞인 우리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또한 이 모습들은 "혈의 존재"들이 "혈"로서 존재했을 때 그들 삶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이기도 하다.


투쟁의 지속적인 반목과 반복.....

이것들 또한 후대들인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승되고야 말았다.

하지만 무언의 메시지는 여기서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죽은 이들과 오늘날 우리들의 각자 모습을 비교하고

검토함으로써 그들(죽은이들)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독자들)의 그려질 초상화에 대해서...................."

 

-18-

"또다시 본의 아니게 강조하게 되었지만,

죽은 이들은 후대에게 어떠한 보상이나 인정조차 원하지를 않는다.

또한 그들로부터 잉태한 새 생명으로부터 

선구자의 위상과 지위로서 인정받기 조차도

원하지를 않는다." (인용구, 출처미상)


죽은 이들의 살과 육이 썩어가고,

하얀 뼈마저도 남김없이 사라진 작금의 시점에서 

죽은 이들이 있는 곳이라고는 

이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흙토만이 전부인 흙토일 뿐이다...


죽은 이의 혼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필자는 쉽사리 말할 수는 없겠지만,

혼이 존재한다 하여도 그것은 우리의 육안으로 보기 힘들 것이며,

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토록 존재하지 않는 것이리라...


종국적으로 우리의 육안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흙토만이 전부인 흙토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강요스럽게 전승된 초상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너희들의 선조이다. 우리를 잊지 말아라"


죽은 이들은 단순히 오직 우리들의 망각에만 거친 반항을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반항은 반항으로써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이 아닌 연속된 대 서사시를 마저 채워나갈 우리들에게 하는 메시지이다.


그것은 죽은 이들이 형성한, 이제는 죽은 이들의 산물이 되어버린, 

죽은 이들이 기록하고 남겨둔 "인간이라는 숙명"의 "인간적인 삶"에 대해

마지막으로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은 이들이 설파한 "인간적인 삶"의 길을 걸어야만 할 것이다.

이점은 당위성의 성격을 지닌다. 왜냐하면 설파된 길을 걷는 것이야 말로 

우리들 또한 대 서사시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어리석게도 영원성을 갈구하고 

우리는 죽지 않기를 바란다.

이게 우리 본연의 모습일 뿐이다.........


-19-

우리는 항상 영원한 존재이기를 갈구하여 왔다.

주변의 다른 이들이 모두 영면한다 할지라도, 

그것만큼은 내 일이 아닌, 내가 아닌 타자의 영역으로만 생각되던 것이었다.


"우리는 타자의 시신을 본다"

분명 내가 잘 알던 친숙한 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의 범주에 속한다.

더 이상 나와는 겹치지 않는 다른 세상의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자의 시신과 죽음을 

어디까지나 다른 세상의 일로만 생각한다.

나와는 무관한 다른 세상의.......

최소한 내게는 다가오지 못할 그런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나는 전술된 부분들에서 우연성, 선택성, 우발성 그리고 인과관계의 법칙 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우리들의 시대적 삶과 개별적 삶은 

우리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선택으로 많은 것이 이루어진다.

물론 강요적인 선택도 적지 않아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잉여인간"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람 구실을 못한다는 평가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한 불행 그리고 목표지향적인 행위를 통한 성취...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안 중 우리의 선택에 부합하는 것이

보통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편으로, 우리의 삶은 선택과 우연의 교차로 인해 그것이 총합 이상을 이루는 것과도 같은 

보기 힘든 혼탁의 성질과도 같다.


하지만 선택과 우연으로 그 지연은 가능할지라도 

죽음은 이 지연의 법칙으로부터 이탈해버린다.

죽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적 법칙이다.

지고지순하고도 유일한 필연성의 성격을 가진 사태이다.

필연적 법칙은 누구든지 그것에 강요당함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들이 갖춘 게임 중 유일하게 회피할 수 없는 규칙이기도 하다.

죽음으로부터 도주한다는 생각은, 

무모할 정도로 극도의 이기심의 발현이기도 하다.


-20-  

마을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원인불상의 병으로부터 사람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쓰러져 가는 것만으로도 그친 것이 아니다. 쓰러져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들이 죽음으로부터 도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근접해졌다. 

그렇게 해서 내가 알던 이들, 나와 지낸 이들은 도래한 죽음으로 인해 죽음마저 형성하고 있었다.


-21-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그제서야 찾지 않던 조상신을 찾기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는 마당에 이제서야 라도 

조상들께 기도를 드리고 일종의 제의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와 마을 사람들은 동굴로 빠져든 것만 같았다.


모두가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외란 존재 없이 모두가 길을 잃어버렸음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만져보라고 뽐내기라도 한 듯한, 울퉁불퉁한 무언인가가 내 팔을 감싸고 있는 야릇한 느낌이 느껴졌다.


분명 동굴의 벽은 분명하였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채, 넘어가려던 참에 

"아~" 하는 미약한 신음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굴 벽면의 날카로운 부분이 날 이대로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지못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몹쓸 놈의 동굴 벽면을 쳐다보았다.


이때의 나는 알아볼 수 없는 검색 물감으로 칠해진 형형의 다채로운 모습과

그것이 암시하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분명 알아차려야만 했다.

누군가 강요한 것이 아닌 필연적인 다가오는 운명과도 같이 저 형체를 

반드시 해독하리라....는 것 말이다....


"저 거대한 것을 보아라~~~"

이것은 분명 오래 전 존재하던 조상의 목소리도 아니었고,

절대불명의 최고신 목소리도 아니었다....


동굴에 불을 가진 이가 얼마 되지 않아,

모두들 달빛에, 약간의 불빛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누군가 거대하게 외치던 그 "거대한 것"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굴은 분명 그 길이와 높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낙관적 추측보다는 부정적이고도 비관적인 추측에 가까웠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곤경에 있었다.

조그맣게 된 우리는 조그맣고도 소심하게 되어버린 달빛에 의존한 채,

이내 동굴의 벽화들을 조금씩 조금씩 이나마 볼 수가 있었다.


굴의 벽면은 분명 검색이었다. 하지만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은 

굴의 벽면의 색깔이 검색이라는 것도 지나침조차 존재 없이,

굴에 새겨진 벽화 또한 검색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흑색에서 흑색을 보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순간만큼은, 유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신중의 신, 

달빛과 촛불은 그 외양조차 거의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들도 이내 생명을 다하려는 것인지, 

그들이 지금이나마 지닌 생명의 미약한 숨결조차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나와 마을 사람들 모두의 귓가에 잔잔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빛들만을 토대로, 흑색에서 흑색으로 남겨진 흑색 벽화를 경외로운 시선으로, 한편으로는 두려움 속의 공포로, 그렇게 말없이 응시하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양가적인 감정 모두에 몰입하게 만들었던 것은,

벽면의 흑색 바탕의 그 무엇보다도 명료하고 분명해 보이기만 하는 

흑색 벽화(그림).....

단, 그것의 선명하고도 다양한 형체와 그 모습이라는 전부였던 것이다.


우리는 전부이기도 하면서 단순한 이름 모를 그 하나에 우리의 정신과 기억을 

모두 빼앗기고 만 것이었다............


'사람들이 뛰어 논다 뛰어놀아~'

'사람들이 사냥 한다 사냥을 한다~'

'사람들이 춤을 춘다 춤을 추어~_


정체 모를 무명의 사람들이 다채로운 활동들을 하는 것이,

전부 흑색 벽화로 남겨져 있었다.

난 벽화의 의미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뛰어놀고 사냥을 하고 춤을 추는 것이 더 이상 내게,

아니 정확히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인지...........................


차라리 벽화를 구상한 화가에게 무엇이든지 물어보고 싶었다.

단순한 인체의 활동들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적인 그 무언가들은 

오늘의 내게 무엇을 의미하고 싶었던 것인가?............................


소나기가 내리기가 무섭게 재빨리 비를 피하는 알록달록한 앵무새처럼....

발정기가 무섭게 찾아와 발정이 광기로 포화된 원숭이처럼....

나는 분명히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아니, 도주해야만 한다.

그것도 도주 직후에 나는 이 벽화의 의미를 해독해야만 한다..................


나는 기어코 굴 밖으로 도주해 나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굴 밖에는 앵무새도, 원숭이도 없었다...........

굴 밖의, 이 넓기도 넓은 광장에는 그 누구도 없이 

나 혼자만 서 있었다....

그렇다고 외롭거나 고립된 감정이 뇌리를 스쳐 가지는 않았다.

벽화로 인하여 나를 답답하게 하는 그 무엇의 것,

벽화로 인하의 내 깊은 가슴 속 응어리 진 무 그 무엇의 것,

난 그 무엇의 것을 향해, 아니 위해서 

단 하나의 행위를 하였을 뿐이었다..............

'그 무엇의 것'을 해독하기 위한 나의 정열, 욕망 그리고 정력.........

나는 황야한 광장에서.....

'아~~~~~~~~~~~~~~~~~~~~~~~" 하고 내 성대의 맨 끝자리마저 훼손될 정도로 목 놓아 소리치고 말았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해독하고 싶었던 내 정력의 유일하고도 마지막 표현이었다......


내 마지막 표현 끝에,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조그만 의미는 

자각하기도 불투명한 먼 조상들의 생활과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의 생활에는 

어느 정도의 일치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우리들의 생활을 그 시발점으로 삼는다 할지어도 이것 또한 미래의 후대들과 어느 정도의 일치감이 존재할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이었다....


-22-

죽은 이들은 그저 혈흔만을 남겼을 뿐이다.

남겨진 혈흔은 오늘은 죽은 이들의 심장이 마구진창 초원에서 요동치고 있었을 적을, 

그들의 생동감을 그저 묘사해줄 뿐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묘사되고 상징으로 남은 선조(죽은 이들)들의 혈흔을 해석하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해석을 통해 죽은 이들이 그토록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점을 하나둘씩 서서히 찾아간다.


혈흔의 남겨진 표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남은 삶의 가능성과 여분을 조망하기 시작한다. 이로서 망자는 망각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더욱 

깊숙이 각인되고 기억된다. 중요한 점은, 망자는 잊혀지고 마는 존재가 아닌 기억되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망자를 기억하기에 이른다.

망자들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찾지 못한 삶의 미美와 가능성을 찾기 시작한다.

우리가 찾기 시작하는 이 모든 것들은 어찌 보면 죽은 이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생의 구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은 이들은 신학적인 존재와는 다르다.

신학적 존재들은 인간들로부터 그들이 부름 받고 숭상받기를 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은 이들은 이를 거부한다.

죽은 이들은 자신들이 신적 존재와 괴리가 있고, 

또한 후대들로부터 숭상받기를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죽은 이들로서 죽은 이들로 머물기를 바랄 뿐이다...........


죽은 이들의 상징적 혈흔은 이렇게 표상한다.

"지금까지 지루하고 ‘무의미‘했던 우리들의 표상을, 

활기차고 거친 숨이 벅차오르던 죽은 이들의 표상들처럼 우리들의 삶 또한

무의미에서 의미로 다가가기를............."

 

-23-(에필로그1)

신화가 아닌, 신화가 비신화로 변모해버린 오늘에 있어서, 

우리는 말없이 길고 긴 미로를 감춰둔 동굴을 탐험한다.

넘어지기도, 자기 혼자만 불쑥 나온 바위에 우리의 다리가 가볍게 스치기도 

하지만, 우리는 동굴의 끝을 마침내 나오고야 만다.


그곳은 우리가 관조하게 될 죽은이들의 혈흔이 잔뜩 숨겨진  

"푸른 바다라는 숭고한 신화"이다.....

 

"몽상"

몽상은 단순히 꿈을 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꿈이라는 유용한 수단을 빌려와

환상과 실재, 실재와 환상이 뒤섞인 상황에서 

자신의 실재마저도 분간이 안가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이것은 쉽게 예단하기도, 판단하기도 어렵다.

그만큼 난해하다.


몽상은 꿈이라는 수단을 통해 환상을 창조한다.

환상은 우리에게 도약할 수 있는 희망과 미래를 예견해준다

-이것이 비록 헛된 희망일지라도...

중요한 점은 단순한 도약으로 치부될 수 없는 현실에 있다.

환상은 가공의 표현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의

폭발적인 추동력을 삶에서 만들어낸다.


이 추동력은 오직 희망과 미래라는 재료를 통해 

그것은 가히 폭발적일 정도의 거대함과 파괴성을 동시에 양산해낸다.

폭발적인 면 덕분에 인간은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원대함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정력 그 이상의 

집념과 집중이라는 몰두를 선사해준다.

인간사에 있어 이보다 더 무섭고 폭발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파괴적이기도 하다.

가학적이다 못한 폭발성이 파괴성을 지닌 것이다.

인간의 야심차고 계획적인 이 원대함이라는 실천적 행위는 

결코 완성되지 못한다.


원대함이 완성되기도 이전에, 

이 가공스러운 파괴성은 이 원대함을 스스로 파멸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

인간은 항상 원대함을 만들다가 

원대함이라는 그릇의 완성 직전에 

늘 좌절하고야 만다.


좌절은 상당히 규칙적일 정도로 반복적이다.

인간의 시도와 도전이 규칙적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폭발성으로부터 인간은 원대함에 근접해지고 

파괴성으로부터 인간은 원대함을 파멸시켜 버린다.

인간은 스스로가 끝내 원대함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번에도 또한 미완성에 그치고 말, 

원대함에 또다시 도전한다.

이러한 인간은 미련 맞거나 어리석은 자는 더더욱 결코 아니다.

사실 그는 원대함에 도전하기보다 

원대함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도전하는 것이며

이에 도취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건전하고 올바른 인간의 

진정한 몽상이다...

그는 깨져버릴 원대함을 알면서도 원대함을 만들어간다.

원대함을 만드는 과정 내내 

그의 얼굴은 환희로 빛이 난다.

더욱더 자세히 그의 얼굴을 지켜보면 

그는 그렁그렁 맺힌 땀방울 속에서 

은은한 미소 또한 짓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원대함이 아닌 

진정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간다.


그가 인간이라 불리는 것은 

이러한 가치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정통하기에 그러하다.

그는 오늘도 몽상에 빠진다.

매일 만들고 파괴되는 

늘 반복되는 작업을 위해서................


이런 연유로 

그는 인간이고, 

인간은 꿈을 꾸고, 

꿈은 후대까지 전승된다....


이것이 전형적인 몽상가들이 사는 법이다....


-24-(에필로그2)

수 세기 전부터 뿐만 아니라 

태곳적 원시적 시대부터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며 상호를 이해하고 교류하여 왔다.

비록 그 언어가 모호할 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언어가 모호할 지라도 그것이 이해 불가해한 것은 아니다.

언어를 표출하는 인간의 표정, 음성 그리고 갖가지 뉘앙스들은 

인류를 하나의 결속체로 만들어왔다.


결사체를 만들어버린 인류의 언어에 대해

지금 내가 명백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류 내지는 인간은 이 특이한 종만의 상호간 사랑만큼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인류가 상호간 사랑을 말하는 언어를 지니지 않았거나 또는 사용 및 활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인류의 언어를 말하기도 전에,

인간이라는 특이한 종은 

이미 세상이라는 실재적 장에서 퇴색되고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위대한 선조들이 남긴 그들의 혈흔은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닌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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