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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아가 Oct 29. 2022

2022.2.21  -몽중인

-1-

요즘 현대인들은 현실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심지어 자처하기까지도 한다.

사실 냉정한 이해관계 속에서 나의 타산을 따지고 이것이 수량화, 계산화 또한 공리적으로 된다는 것은 

이를 잘 증명해준다. 어찌 보면 현대인들은 현실주의에서 도주가 불가능한 존재들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현대인들이 도주하지 못하게 그들을 값비싼 포로나 노예처럼 꽉 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들 또한 과거의 사람들 못지않게 비현실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해 볼 수도 없는 일이기도 하다.

분명 현대인들도 현실에서 거부되는 비현실을 꿈꾸는 것은 

인간적이고도 동물적인 본능으로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현대의 현실주의는 비현실주의를 너무나도 쉽게 거부해버린다.

이러한 "거부함"은 비현실적 관념이 현실주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며 막아서기까지 한다.

단지 비현실주의가 계산적이지 못하다는 비합리성을 산출해 낼지 모른다는 

불안함의 이유에서 말이다.

어쩌면 현대의 삭막함이라는 것이, 비현실적 관념이 침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음을 

이를 증명시켜주는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장에서 현실주의가 존재한다면 비현실주의 또한 역시 존재한다.

이것은 명암의 구조와도 같은 이항 대립적 구조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잠을 자며 꿈을 꾸기도 한다.

이러한 수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생리적인 꿈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미래에 펼쳐질 자신의 이상상에 대해 희망을 가지며 살아가곤 한다. 

이 역시 꿈의 일부이기도 하다.

다만 수면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생리적인 꿈이

우리의 꿈들 중, 저차원일 수 있다면, 우리의 이상상에 대한 희망에 대한 

꿈은 고차원적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우리의 바람을 무의식의 기저에서 스스로에게 넌지시 암시라도 하듯이 

자신 스스로를 꿈에 투영시키는 것이라면, 

후자는 우리의 전개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청사진은 청사진으로만 존재하기 쉽지 않다. 

인간은 전자의 경우처럼 수동적인 경우도 있지만 

꿈 트는 욕망을 스스로가 미처 참지 못해

이것을 행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함은 우리의 의식의 욕망에서 출발한다. 다만 의식 속 욕망은 청사진을 토대로 구체적인 건축물을 지으려는 적극적인 행위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비록 과정의 도중에서 시련을 겪다 못해 이것이 실패로 마감된다 할지어도 말이다.

현실적인 것이 아닌 오히려 반대적인 비현실적인 몽상을 통해 

우리는 실재를 자각하고 우리 스스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우리는 현실적인 것을 통해 현실을 알기 쉽지 않다. 

우리의 몸을 담은 뜨거운 물조차 시간이 서서히 지나버리면, 

이 뜨거움의 맛을 망각해버리듯이

현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실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게 할 뿐이다. 

사실 현대인들은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현실과 괴리된 존재이다.



하지만 실재와 실존 속에 

우리는 우리를 자각해야만 한다. 

우리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모습으로 행위하고 있음을 모른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모른 채, 저속함과 방탕함의 넝마들 속에서 

하나의 에로티시즘을 창조하는 그런 동물적인 존재만으로만 몰락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몰락이라는 것은 실패보다 더욱 악독하기 그지없다.

실패는 우리의 욕망과 의지를 수반한다. 다만 결과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다.

몰락은 우리의 욕망과 의지가 전혀 수반되지 않은 상태로 

스스로가 무기력함과 실재의 염증, 환멸을 꿈꾸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재를 부정하고 우리를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혹여 자각하더라도 

실재의 염증, 환멸이라는 환각상태를 거부할 수 없는, 

환각의 유희라는 늪에 빠져 스스로의 생명줄을 끊어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는 몽상만을 통해 현실에 더욱 더 다가갈 수 있음이다.

몽상은 빛나는 유리구슬만도 같아서 

우리 자신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의자가 발아해버리고

비현실적인 욕망은 발아해버린 직후, 푸른 새싹으로서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성장해만 간다.

욕망과 의지는 우리의 이상상이라는, 꿈꾸는 조각상을 위해, 그렇게 기어코 전진해 버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사정해 버리고 마는 의지의 욕망에 의해서............


이렇게 우리의 속옷마저도 의지의 욕망이라는 이름 모를 비밀스러운 액체에 의해 기어코야 물들고 만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에조차 그것이 마르리라고는 기대조차 

불가할 정도로.....


그래도 우리는 몽상을 꿈꾼다.

기러기가 늪 위에서 날개 짓을 수 없이 하듯이  

이제 우리는 의욕하는 욕망을 위해 날개 짓을 안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제때, 긴 여정을 시작할 수 없다.

아니 도태되어 이내 죽고만 말 것이다.



날개 죽지는 이제 축 쳐지고 

더욱 더 노곤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우리는 날개 짓을 해야 하는 것이 필연에 가깝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것은 1차적으로는 우리의 동물적 삶의 본능이요, 

2차적으로는 날아오른 우리가, 바로 밑을 바라볼 수 있는 

관조 속 행복의 충만함에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함이리라.......

이런 연유로 우리는 가까스로 날개 짓을 하고 

날아오르고야 만다.


드디어 날아오른다.

아래에서, 바로 밑에 실재하였던 우리의 옛 자욱을 

우리는 이제 바로 위에서 본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관조는 아니다.

관조를 위해 가장 필요한 우리 의식의 충만함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저기도 ....저 멀리 저기까지도 

쉬지 않고 날개 짓을 해야만 한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헐레벌떡이는 와중에도 

우리는 역시 꿈을 꾼다.


이 꿈 역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비현실적이고도 때로는 낯선 몽상이다.

몽상은 태양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면이 있기에 

태양의 빛이 몽상을 이내 비추곤 한다.

우리는 눈이 부시지만 

눈부심을 상대로 눈을 깜빡 거리며 

몽상의 비춤 속에 희열을 느낀다.

비록 태양은 보지 못한다 할지어라도.......


활할 타오르는 기적 같은 태양은

우리의 몽상을 계속해서 비추기 시작한다.

몽상을 완전히 태워버리려고 할 것처럼...



우리는 눈부심 속에 눈부심을 애써 외면하려

눈을 깜빡깜빡 거리지만 

눈부심은 끝날 줄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아니던가?

태양의 타오름의 만개 속에 펼쳐진 

이 빛 조차 우리의 익숙해진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빛조차 익숙해져 버린 지금 

우리의 시야는 조금 더 확장되기 시작한다.


-2-

우리의 외연이 확장되는 동안 

우리의 몽상 또한 성장해버리고야 만다.

아직 완전히 성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몽상 또한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이제 몽상은 우리를 영도하기 시작한다.

비록 몽상은 우리보다 나이가 어리긴 하지 말이다.


넓혀진 외연과 이에 따른 확장된 시야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어쩌면 태양의 그늘에 가려져 소외 돼버리고 만 

그림자 또한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림자를 단순히 볼 수 있는 것만이 아닌 

우리의 날개로 직접 만져보고 

또한 축축하고 습한 그 촉촉함 마저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 


그곳에서 우리는 나와 똑같이 몽상을 꾸는 타자를 체험한다.

묵언수행이라도 하듯 나도 무언의 날갯짓을 하고 있지만

다른 이 또한 무언의 날개 짓을 한다.

우리는 그 흔한 독백조차 없다.

이 사실은 그 누구와 투쟁이나 반목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동시대와 동시간에 똑같이 날개 짓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다른 이에게서 이름 모를 유대감을 느낀다.

이것이야 말로 하늘의 공동체인 것이다.

나와 다른 이가 서로 무언을 하고 있다는 그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늘의 공동체를 나와 그가 동일하게 향유한다는 사실은 

서로의 입을 분명 열게 할 것이니깐....



우리는 동시대에 처한 실재 하나만으로도, 

시대적 텍스트를 날개 짓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공유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하늘의 공동체.......

알고 보니 우리가 생명의 대지 또는 터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사실 우리의 어머니와도 다름없었다. 아니 이것은 어머니다.

그것도 불사에 근접한 영원한 어머니 말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가지고 놀면 안 되는 위험한 장난감을 

우리의 손으로부터 떼어놓는 대신 우리에게 안전한 장난감을 선사한다.

이것은 상실과 보상의 양면성이다.

하지만 비록 상실을 포함하고 생각한다 할지 언들,

보상은 우리로부터 의식의 충만함을 선사해준다.

이러한 충만함이란 유대적 관계 내지는 유대적 선상에 놓인 

무언의 동반자, 즉 동지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 말이다. 또한 이것은 그 연장선상으로 우리의 생의 약동 또한 느끼게

한다.

어쩌면 우리조차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강요된 생의 약동이다.



상실의 조각상....

부언하자면 또한, 상실은 마냥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상실에 대해 -(마이너스)로 생각하기가 쉽다.

과연 그럴까?

-(마이너스)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탄생할 때 또는 우리가 사망할 때조차 

우리는 상실됨이 없는 순진무결한 상태이다.

오히려 우리가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에의 상실로 인해 

이러한 상실을 메꿀 수 있는 

오히려 충만함이라는 대체 보상이 그러한 것일 것이다.

보상이라는 생의 약동은 그렇게 두근거리며 생명의 소리를 

스스로에게 알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인생은 쉽지가 않다.

알림과의 동시에 생의 조각상은 깨져버리고 파편화되어 

곧 상실의 조각상이라는 결과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 몽상 중이다.

생의 이상적인 조각상은 이제 바닥에 널 부러진 

파편만이 전부이다.

우리는 날개 짓을 하던 하늘에서 떨어져

이제는 파편의 바다 위에서 

노를 젓기 시작한다. 

파편을 지나치기 위해서 말이다...


조각상이 파탄 난 것은 결코 실패가 아니다.

그저 과정의 시련만이 전부일 것이다.

사실 시련 또한 아니다.

파편의 원인을 끊임없이 사유하여 

다시 조각상을 만들면 그만이니깐....


늪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바다로 

우리는 그렇게 움직이고 움직였다.

"더 이상 우리는 갈 곳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이제 파편으로 가득 찬 지랄 맞은 이 바다를 지나쳐 

뭍으로 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거기서 조각상을 다시 만들면 된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이상을 잔뜩 품어버린 

그런 조각상 말이다...


"어기자~어기자~어허라~"

바다를 한시 빨리 떠나고자 

우리는 그렇게 구슬땀이 맺힌 상태로 

노를 젓는다.

우리가 다급한 것은 

몽상적 욕망이 우리를 충동질하기에 그러하다.

그러하니 노를 젓는, 

노를 꽉 쥔 우리의 양손은 

우리의 초상화에서 스펀지로 그것이 애매모호하게 보일 정도로 

번지듯이 처리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다급함은 금물이다.

우리가 충동질에 달아오르건 그렇지 않건 

우리는 항상 일정하기 때문이다.

일정함은 한편 우리의 평정심을 표상해 내기도 한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바라던 것 중의 하나가...


드디어 뭍에 도착한다.

다른 이와 나는 작심이라도 한 듯

다시 또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마치 겁에 질려버린 듯한 여성의 얼굴처럼

하얗기 그지없는 흙토에 

나는 꿈을 섞기 시작하고 

다른 이도 꿈을 섞기 시작한다.

우리는 마구 마구 섞기만 하면 된다.

"어기자~어기자~영차~영차"



조각상을 만들 반죽재료가 완성되었다.

다른 이는 나에 대한 낯선 감정을 버리고 

흐뭇한 미소를 던진다.

나 또한 답례로 그에게 흐뭇함을 선사해 버린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이것"은

우리의 몽상이 잔뜩 담긴 

야심찬 작품 이전의 그 무엇이다.

이제 이것은 우리의 목표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야심찬 작품을 넘어선 야심찬 몽상!!!!!


-3-

나와 다른 이는 작품(꿈의 조각상)을 서서히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또다시 우리는 외쳐버린다.

"어기자~어기자~영차~영차"

이마에 구슬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더불어 욕망의 눈물까지 맺히기 시작한다.

"어기자~어기자~영차~영차"

작품은 거의 다 만들어간다. 

야심찬 몽상에 의해서.........



"아이고~아이고"

"어쩌나~저쩌나"

야심차게 조각상을 거의 다 만들었으나 

나와 다른 이는 지쳐버린 나머지 

대지를 요로 삼아,

무성한 잡초를 베개로 삼아,

하늘을 이불로 삼아,

그렇게 꿈의 나라 속에 잠들어 있었다.


너무나 꿈이 달콤한 탓이었을까?

나와 다른 이가 잠든 사이에-

달님의 습하기 그지없는 습함은 

조각상의 내부를 물컹거리게 만들기 시작하였고 

우리가 눈을 떴을 땐 

야속하게도 햇님이 조각상을 갈라놓기 시작하였다.

"빠지직~빠지직~뿌드득~뿌드득"

이렇게 야심찬 우리의 몽상은 

다시 한 번 파편화되기에 이르렀다.



분함과 억울함을 짓누르지 못해 

나와 그는 울기 시작하였다.

달님과 햇님의 야속함에 대한 

원망의 눈물이었으리라.......


나와 그는 한 없이 울어버렸다.

나의 눈물, 그의 눈물은 

흐르다 흐르고 넘쳐 

이내 지류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눈물은 

형형색색의 열매들이 맺힌 

대지의 다양한 과수들을 자라나게 하였다.


눈물은 그친지 오래였다.

다만 나와 그는 다양한 과수들을 바라보며

긍정의 눈물을 새로이 쏟아내었을 뿐이었다.

이것은 몽상적 욕망의 초월이요, 해탈인 것이다.

"그깟 우리의 의욕이 꺾이면 어떠하리"

"의욕은 다시 한 번 자라면 그만인 것을....."


우리는 이름 모를 마음의 위안과 안식을 얻었다.

"이리 오너라~이리 오너라"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혹여 우리의 의욕마저 파편화 시켜버릴 

유혹적인 뱀의 목소리란 말인가?

"안갑니다. 안갑니다요"

또다시 누군가가 외치듯이 말을 한다.

"이리 오너라~이리 오너라"

정말 미쳐버리겠군. 말하는 자는 누구이고 왜 우리가 오기를 바라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형씨 어떻게 할 작정이요?" 

그는 어찌할지 몰랐고 나도 몰랐다.



적막한 고요함만 오랫동안 가득하였다.

이 부름은 분명 하늘의 신이 부르는 것이리라.

나와 그는 약속이라도 한 듯 

뱀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굳은 확신을 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우리에게 뱀이 아닌 

뱀과 모양만 비슷한 길고 기다란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줄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것을 잡고 하늘로 올라 오거라"

분명 이것은 신의 목소리가 틀림없으리라............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지난날의 나와 다른 이가 날개 짓을 하던 하늘보다 

우리는 더 높은 곳에 와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토록 의욕하고 욕망한 

대지에서는 파편화된 조각상이 

이곳에서 떡하니 있는 것이 아니던가?

"신이시여...지금 제가 보고 있는 저것은 

현실입니까? 꿈입니까?"

"부디 이것만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신은 엄청나게 화라도 난 듯, 

아무 말이 없었다.


몽상의 의지와 욕망은 

바로 이 곳 하늘에서 성취된 채로 있었다.

나와 다른 이는 조심스레 조각상 가까이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다가갔다.

우리는 그것의 바로 앞에서, 

우리가 의욕하던 꿈의 조각상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움푹 파인 곳도 있는 한편,

어떤 곳은 심지어 찌그러져 있기도 하였다.

저 멀리서 외형은 그럴 듯 하였으나,

가까이에서의 그것은 그렇지만은 아니했다.

이것은 분명 부재는 아니었으나,

완벽함이나 완전함과는 거리감이 있는 

그 어떠한 것에 지나지 아니 하였다.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구름처럼 

휙~휙 소리를 내며 지나가버렸다.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듯이 

마침내 깨달아버렸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던 이상성의 꿈의 조각상은 

완벽한 조각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양보를 해야만 했다.

우리의 몽상적 욕망을 조금씩 이내 양보해버리고 만,

또한 양보의 결과로 인해

우리가 본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아니 우리의 이러한 불완전한 모습을 성찰해 버리는 것이 

우리가 얻은 유일하고도 고유한 하나의 진리였다.

우리는 다만 혼란스러웠다.

지금 우리가 처한 실재하는 이곳이 

꿈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현실에서의 몽상인지....

몽상에서의 현실인지....

하지만 나와 그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영원한 몽상 속에서 영원토록 살고 싶었다.

우리는 곧장 합의를 봤다.

해인지 달인지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우리의 자취를 숨겨 버리기로..................


이것이 독자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우리 몽상의 전부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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