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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아가 Oct 29. 2022

2022.2.23  -고독의 광기

고독처럼 참으로 한 개인을, 한 인간을 괴롭히고도 미쳐버리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저 고독은 너무 잔인하기만 하다.

고독은 성당 내의 성모 마리아상과 함께 있는 어리고 순한 양의 모습을 가진 

피해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어쩌면 고독이라는 가해자는 

피해자의 고통 이상의, 미쳐버림 이상의 

피해자 내면의 순결조차 차츰차츰 그것에 빼앗겨 버리고 마는 

광기의 질주를 조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고독의 늪에 빠진 수많은 피해자들은 

광기의 마지막 길까지 가다 내면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거나 

이름 모를 원인으로 죽음에 직면해버리고 만다.


참으로 잔인하지 아니한가?

고독에 있어서는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합목적성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보기 좋게 덫에 걸린 사람들을 광기의 그 이상을 넘게 하려는 것도 그 목적은 더더욱 아니다.

고독은 보기 좋은 먹잇감들이 내면이 파멸되는 것을 보고도 만족하는 법이 없다.

고독은 먹잇감이 파멸되거나 이것을 극복하거나 관심이 없다. 

고독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존재한다"라는 사실만으로도 고독은 존재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고독은 두려움을 초월한다. 이것은 잔인함 또한 초월한다.

바로 전술된 바와 같이 고독이 심연의 공포의 대상인 것은 

바로 그 자체에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꼽으라면 고독 그 자체가 "존재한다"라는 원인 모를 목표 아닌 

공포로부터 기인한다.


인간을 파멸시키는 존재...그것은 고독이다.

뚜렷한 대상도 없고 명확한 목적도 없는 그것은 

도대체 왜 인간을 광기의 질주로 몰아넣는가?

고독은 생의 소중함을 망각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가혹한 형벌인 셈이다.

이것은 단순한 형벌은 아니다.

이것은 억압하고 구속하는 형벌을 넘어선

한 인간의 정신착란증세를 충동질하고 또한 그 궤적에서 

끝끝내 인간의 정신세계를 파멸시켜버린다. 

한 마디로 이 "형벌의 선고"를 받은 죄수들은 

미쳐버린다. 아니면 미쳐버린 나머지 불의의 뜻밖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는다던지 말이다....

결국 고독이 형벌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이 형벌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 "사형" 그 이상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은 아니다.

고독은 생을 영위하는 모든 인간들은 수 없이 겪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홀로 외로이 서있음은 물론 많은 나 자신의 동지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인간은 충분히 외로울 수 있는 존재이다.

이른 아침 해가 뜨기 무렵이나 그 직전

한 인간을 둘러싼 시공간의 영역은 적막함과 고요함 그 자체일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뒤로 하고 

겨울이 아닌 이상, 

인간은 풀밭에서 나는 땅으로부터 나는 약간의 구린내가 나는 

대지의 습기를 느끼곤 한다.

대지의 습기는 아침이 밝아 옴을 말한다.

아침이 밝아옴으로서 대지는 구린내가 나는 트림을 하기 시작하고 

대지에 의존하는 생명체들은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 

그들의 삶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비록 하루 24시간 전부에 해당되는 유일한 삶일지라도......


반면 이 불쾌한 대지의 습기를 맡은 인간은 

아무도 없는 가운데서,

홀로이 고독을 느낀다.

생명들의 깨어남과 대비되는 한 인간의 고독이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하지 않다. 

인간의 감성이라는 것은 언제라도 끊어질지 모르는

삭아버린 노란 고무줄과도 같다.

이런 조건에서 끊어지지 않고 고독의 감정을 맛본다는 것은 

오히려 삶의 건전하고 유희적인 그것이다.


내가 말하는 인간 파멸 또는 광기의 종결,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은 

건전함과 유희를 넘어선 그때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시야를 불투명하게 만들 정도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헤어 나와야만 한다.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현실과 실재로 돌아가는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러한 탈출구를 거부하고, 

때로는 이러한 탈출구 목전의 안개의 도취와 환각에 빠져 이를 긍정하는 자도 있다.

이러한 자들은 결국 대지의 자욱한 뭉게구름에 의해 

감금되고 구속되기에 이른다.

즉 이러한 자들은 스스로가 "죄수"임을 선포한 것이다.


도취와 환각을 처음 맛 볼 때는 그 기분은 좋다. 

어쩌면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함정까지임을 알아야만 한다.

도취와 환각이라는 것은 

"죄수"들을 더욱더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

"죄수"들이 극한의 고통에 무뎌지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죄수"들이 사형집행인에 의해서가 아닌,

"죄수" 스스로에 의한 파멸에 이른 사형집행을 

스스로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더 이상 "죄수"들의 생의 욕망에 기댄 과거의 모습을 상기시키리라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영원한 감금이라는 단절이, 그들을 죽음의 시간까지도 가로막아 서있기 때문이다.



"죄수"들은 도취와 환각에 의해 쾌감의 미소를 짓는다.

어떤 "죄수"들은 거친 성행위를 할 때보다 이것이 더 좋다고까지 말한다.

이제 그들은 취해가고 취해짐이 더할수록 미쳐가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미쳐감이 더해질수록 그들의 뇌세포 하나하나는 황급히 파멸의 길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이 속도는 아인슈타인마저 부정한, 

존재라는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를 것이다......

그렇게 "죄수"의 육체와 정신은 죽어가기 시작한다.

육체와 정신이 생명과는 멀어지고 파멸이라는 죽음에 더 가까이 갈수록,

"죄수"는 쾌감의 "만족감"을 강도 있게 느껴버리는 법이다.


"죄수"는 행복하다.

심신이 훼손되고 파멸될수록

그들은 더더욱 행복하다.

이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찬 욕망이 그들을 지배해 버린다.

이제 "죄수"들은 파멸적 죽음에 오히려 위안을 느낀다.

그들은 생을 부정해버린다.

정신착란의 멜로디는 귀로는 듣기도 힘들 정도로 희미하다가 

어느새 귓가에 반복된 율동을 할 정도로 강해지고 만다.

"죄수"들은 멜로디에 환호한다.

정신착란에 의한 정신분열 현상은 일사천리로 가속화 된다.

다만 중요한 점은 이것은 "죄수"들이 그토록 원하고 원하던 것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은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다.


죄수들은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사이로 

등을 맞대어 기대고 있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는 모른다.

그들은 등을 맞댄 벽을 향해 외치기보다 

반대편의 허공을 향해 

주절거리기 시작한다.

주절거림의 대사들은 

우리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무엇이다.

그들은 성경의 경구조차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성경뿐만 아니라 신은 사라진지 오래다.

"죄수"들에게는 죽음이라는 일생 마지막 사건만이 

절대적인 전부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그들은 빨간 명찰이 달린 수의를 입고 

죽음을 기다린다.

그리고 죽음의 고통을 각성하고, 

남아 있는 생의 가능성마저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무감각해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죽음의 희열조차 맛보지 못한 채, 

죽어버린다.

첫 번째는 그들의 정신이 무감각해진 것이고

두 번째는 그들이 미쳐버린 것이고-고독의 광기에 의한 정신착란에 사로잡혀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그들은 삶을 부정해버렸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로는 "죄수"들에게는 

죽음의 희열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 절대적인 사실은, 

"죄수들"이 관에 들어가기 직전 

유족들(생을 긍정하는 자들)에게 남긴 유일한 상흔일 뿐이다.

생을 부정하는 자들에게는,

그 어떠한 죽음의 희열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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