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늘 행복하지 않다.
행복한 순간은 안대에 가려진 어두컴컴한 시야와 적막 속에서,
나의 손으로 무언가를 더듬거리는 듯한,
내게 최후로 남겨진 보물찾기다.
분명 살아가는 동안 우리들에게는 행복한 순간은 분명 있었고 존재한다.
하지만 수차례 이상의 보물찾기에도 불구하고 헤매어버리고 마는 우리들의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행복에 대해서만큼은 맹인과 다를 바가 없다.
누가 맹인을 향하여 보물을 찾을 수 없다고 단언하는가????
이처럼 오만하고 방자한 태도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맹인은 맹인이라는 상황적 설정에 의해 보물을 찾을 수 없다고
쉽게 단정하고는 한다. 이점에 부연 설명을 하자면 맹인이 맹인이지 않은
자보다 보물을 찾음에 있어서 상대적 용이성이 평가절하 될 수는 있어도
맹인이라는 신분적, 위상적 규정에 의해 맹인을 규정하고 단언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일 것이다.
맹인도 분명 보물을 찾아낸다....
맹인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또한 무언가를 더듬거리는 듯한
절묘하면서도 세밀한 손동작으로 보물을 기어코 찾아낸다.
종국적으로 우리는 보물을 찾아내고야 만다.
문제는 보물의 발견이라는 사실 양태보다는,
보물이 발견되고서야 성찰하게 되는 보물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이다.
삶은 보물이라는 행복보다는,
불운, 불행, 불쾌, 절망 등과 같은 감정들과 이 감정들의 흔적들로 대부분 점철되어 있다.
이 감정들의 흔적들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늘 지배하고 관장한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 및 지위, 부의 상태에 따라
개별적인 개차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우리가 늘 동경하는 동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조차, 행복의 박탈과 행복의 발견이라는 난관은 불가피한 숙명이다.
때로는 여기서,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함과 동시에 불운, 불행, 불쾌, 절망 등에서
저급하고 비속한 추구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추구함은 분명 우리 자신이 매우 잘 자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각과 동시에 우리는 그릇된 추구를 지속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생의 감동과 전율보다는,
우리를 자학의 길로 인도해버리는,
좋게 말하면 죽음의 미학이자 죽음의 보편성 추구이고,
냉정히 말하자면 자기파멸의 추구이다.
어느 쪽으로 언급하던 간에, 저급하고 비속한 추구는
우리 모두를 "자멸에 따른 죽음에의 근접함"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구가 비난받아야 할 마땅한 종국적 이유는,
추구 그 자체보다는 추구를 열망하는,
삶에로의 도피를 그토록 꿈꾸는 비겁함으로부터 기인한다.
본디 인간의 비겁함을 상대적으로 대변 및 변호시켜 주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에는 여러 종류가 존재하겠지만,
나는 식욕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인간은 비겁하다.
아니 비겁하기 이전에 창조주는 보란 듯이 인간을 비겁할 수밖에 없는 비겁한 존재로 창조하였다.
한편으로 어찌 보면 인간은 늘 비겁함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숙명적인 존재다.
신년이 되거나 특정 월의 첫 날이 되면,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이 내세우는 결심적인 문구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이 같은 결연하기 그지없을 나름이다.
결연한 의지는 얼마 못가 와르르 무너지곤 한다.
그것도 보는 이로 하여금, 감시하는 자로 하여금 보란 듯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인간의 욕구 중 가장 절실하면서도 광기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식욕 같은 욕구 이상의 욕구 또한 더 이상 찾아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서, 배부름의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음식물의 결핍과 상실을 채워주기 위해서,
비겁함이라는 오명과 타협을 해버린 채, 비겁한 자로 변모하고야 만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비겁함에 대해 조롱이나 비난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인간 스스로가 결핍과 상실을 인지하고 자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은 비겁함의 필연을 회피할 수도 없는 숙명적이고도 운명적인 존재임이 충분히 시사되기 때문이다.
최소 만 24시간~만 48시간, 그 이상의 만 72시간에 근접하거나 이를 훨씬
초과해버린 공복 상태가 한 개인에게 지속된다면,
개인인 그 사람은 이성과 자신 스스로를 차츰 상실해 버리기 시작해버린다.
배고픔과 절망적인 식욕에의 욕망은,
음식물 공급의 상실과 더불어 인간 그 자체조차 상실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배고픔에 대한 절박함을 가진 인간에게
음식물을 공급 내지는 제공해준다면,
인간은 한 없이 음식물들을 입 속으로 쑤셔 넣기 시작한다.
"쑤셔 넣음"이라는 행위는, 위가 음식물로 의해 충족되는,
한마디로 "쑤셔 넣음"이라는 행위 자체가 행위 주체를
"위대한" 인간으로 충족될 때까지 지속된다.
식욕에의 추구는 그가 아사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충족된다.
하지만 수많은 자제와 절제로 이루어진 인간의 공복 상태는
결국에는 그가 섭취해야할 음식물의 양보다
초과됨을 이끌어내기 마련이다.
섭취해야 할 음식물의 초과는
가뜩이나 다이어트를 목표로 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후회의 대상이 되기까지도 한다.
식욕의 충족이라는 찰나의 행복함을 위해,
우리는 금욕적 순간 자체를 그만 망각해버리고 만다.
다시 한 번, 여기서 행복한 순간은 찰나에 불과할 뿐이다.
식욕을 한창 충족시키는 과정 중이라 하면은,
충족이라는 이름의 쾌락적 행복을 의미한다.
이러한 찰나를 우리는 그리워한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또한, 후회의 대상으로
조준된 경험으로써 전락해버리고 만다.
즉, 충족시켜야할 음식물의 과잉 섭취로 인해
우리는 후회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후회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여기에 대한 정답은 없다. 다만, 후회를 하는 자아의식"만이" 그름의 대상이 될 뿐이다.
후회와 행복......
그렇다면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행복을 맛보고 후회를 한다. 또 후회의 이후에 또다시 행복을 맛보기도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순환론적 과정이다.
어찌 보면 지겨울 정도의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케 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환론적 과정은 우리가 가만히 내버려지도록만큼은
좌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 어느 순간 후회를 한다. 이것은 행복을 그리워하는 후회이다.
행복이 언제 다가옴의 발걸음을 할지 모른 채,
기약 없는 발걸음에 대해 우리는 고대할 뿐이다.
우리는 후회의 직전 그리고 후회의 소용돌이 순간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이라는 의미를 되찾기 시작한다.
이 글의 제목처럼 인간의 역할이란 후회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역할이 행복을 영위하는 것이나 이것을 그리워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때로는 후회의 대상이 되었던 찰나의 행복을 그리워하는 존재다.
인간은 행복 이전의 후회 속에서, 행복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그의 책무다.
따라서, 인간역할론에 부합되는 인간의 역할은 행복 직전 행복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역할이다.
비록 후회는 해버렸으나 "행복 이전의 행복에 대한 깨달음 자체"가
진정한 인간역할론이라 할 것이다.
-작품해설
-행복에 대해서만큼은 맹인인 인간의 모습.
-인간의 비겁함과 식욕을 연계.
식욕에 무너지는 인간의 비굴하기까지도 한 숙명.
-식욕의 결핍에 따른 과식에 대한 후회와 행복한 순간을 교차로 진행.
-이왕 경험된 일에 대해 후회는 하지 말라는 필자의 조언.
-삶에서의 행복-후회-행복의 순환론적 과정.
-순환론적 과정에 대한 탈피와 초월을 통해 행복에 대한 인간의 재조명과
행복의 깨달음이라는 지각이 인간역할임을 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