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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아가 Oct 29. 2022

코모도 도마뱀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법칙

2022.2.15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하루도 빠짐없이 방문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방문이라는 표현보다 어쩌면 나의 일상 한 부분을 건재하게 차지하고 있는 그런 사이트다.

새벽 0시가 아주 살짝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습관대로 고민이나 망설임의 흔적도 없이 이 사이트를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어떠한 잡생각을 하기에도 잠시, 게시판 한 바닥 전체가 온갖 글들로 빈틈없이 꽉 채워져 있었지만 이 글에 설명하기도 난감할 정도로 "산채로 내장 태아 먹는 코모도"라는 이상하고도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는 글제목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이 글의 글쓴이는 매우 친절하게도 [약혐]-약간 혐오라는 의미-라는 

말머리까지 달아주는 성의 아닌 성의도 보여주었다.


참고로 나는 변태를 의욕하는 이상충동주의자도 아니며 잔인한 것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상하기 그지없는 글제목이 나의 호기심을 마구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글 제목에서 나타나는 행위주체인 "코모도"와 또 "내장과 태아"는 무슨 말이란 말인가?

"코모도"라는 고유명사처럼 보이는 것은 분명 인도네시아에만 서식하는 

희귀 거대도마뱀을 말하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나는 그 도마뱀이라고 확신 하였다.

'도대체 이 녀석(코모도 도마뱀)이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글의 제목을 클릭하고 영상의 재생버튼을 재빠르게 클릭하고야 말았다.

마치 쫓겨 가는 누군가처럼....


영상은 서두를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재생되었다.

재생시간은 8분이 초단위로 살짝 넘어가는 시간에

사슴인지 말인지 헛갈리는 동물은 예상했던 대로 이 녀석에 의해 숭고한 희생을 당하고만 있었다.

동물원에서도 쉽사리 볼 수 없는 이 희생체에 대해 무슨 동물인지는 모르겠

으나 재생장면의 직후, 글의 리플들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리플 게시자들 조차 사슴이라 지칭하였다. 

이제부터 편의상 사슴이라 부르겠다.


8분 정도 영상의 사슴은 녀석(코모도 도마뱀)의 이빨 신경 독에 마비가 되어 

저항을 1도 하지 못하고 사실 무기력한게 아닌 무기력하게 녀석에게 당하고 있었다. 녀석은 승자였다. 

승자의 여유답게 녀석은 여유롭게 사슴의 몸을 하나둘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상의 절정이라 여겨질 수 있는 장면에 

녀석은 태아로 보이는 사슴의 새끼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었다.

때마침 녀석의 새끼로 추정되는 존재까지 나타나버렸다.


그리고 녀석과 녀석의 새끼는 사슴의 존재가 거의 흔적조차 없어질 정도로 

쳐 먹고 마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나마 시청자로 하여금 위안이 되는 것은 사슴이 강한 신경 독에 마비가 되어

숭고한 희생을 치룬 사슴이 상대적으로 덜 고통스럽게 갔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영상의 리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잔인하다"와 "이것이 자연의 일부다"라는 쉽게 예상 가능한 답변들부터 

끝끝내 "창조주(신을 말한다)의 의도"까지 언급되어 버리기 시작하였다.


3인칭 인간의 관점으로 보기에 녀석은 한편으로는 잔인했다.

고양이과 맹수들(사자, 표범, 치타, 호랑이 등)은 먹잇감의 목덜미, 

즉 급소를 한 방에 물어버리고 숨통부터 끊어놓는다.

인간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고양이과 맹수들의 식사는 비교적 인도주의적인 셈이다.

이렇기에 고양이과 맹수들과는 상반되고 마는 녀석의 식사법은 

인간이 보기에는 한없이 잔인하게만 보이는 것이다.


녀석의 맛있는 식사감이 되어버린, 일종의 희생의식을 치룬 사슴은 

초반에만 약간의 비명이 있었을 뿐, 

자신이 잉태한 태아까지도 무기력하게 녀석의 아가리로 들어가고 있었으며,

신경 독의 온 신체(사슴의 신체를 말한다)의 울려 퍼짐과 신경의 절단(끊어짐)

으로 인해 사슴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눈까지 뜬 채로 그렇게 의식을 마감지었다.

사슴에게는 어미로서의 슬픔도, 자신의 죽음이라는 희생의 슬픔마저도 없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또한 리플들 중에는 저 장면을 말없이 촬영만 했던 인간에 대한 비난도 더러 존재하였다.


영상을 다 본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실 이것은 잔인한 것도 애석한 것도 아니다.

녀석(코모도 도마뱀),죽임을 당한 사슴, 촬영만 했던 인간,

영상을 구성하는 이 세 주체에게는 아무런 책임이나

그들에게 선고할 유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책임과 죄에 대해서 

항변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영상을 본 직후의 시청자들"뿐"이다.

사실 세 주체에게는 이러한 시청자들(인간들)의 항변이나 대변조차 

요구되지 않으며 필요 또한 없을 뿐이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인간들)의 항변들은 

사태가 마감되고 종결되어버린 상황에서의 "외침"에 불과하다.


시청자들로서는 녀석에게도, 사슴에게도 그 어떠한 것을 해주기에는 

선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인간에게는 인간만의 역할이 내재되어 있고, 

이런 역할의 초과는  

애초에 우리들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허용되지 않음"은 우리들이 생각하기 나름인데

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것은 신이 애초부터 인간을 이 정도까지"만" 제약한다는 것이고, 

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제약의 시원을 알 수는 없지만, 

자연 그 자체가 이러한 "법"으로 지금까지 쭉 이어져 왔다는,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신의 "존재여부"와는 무관하게 

자연은 그것만의 필연적인 법칙으로 이것을 품어왔고 

지금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신이 자연을 창조했다 하여도 말이다....

이 필연적인 법칙은 우리들이 알기 쉽게 "섭리"라는 말로 표현된다.

결국 8분짜리 영상의 모든 사태는 "섭리"라는 이름 하에 

모든 것이 한 치의 제약 없이 허용되고 묵인된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녀석과 희생당한 사슴보다도 

제일 어리석은 존재는

영상을 성실하게 본, 인간들의 성실한 감정뿐이다.

인간들의 성실한 감정들은 감정의 성실함에 너무나 충실한 나머지,

인간의 관점으로만 녀석과 사슴 그리고 이 자연의 필연적인 그것조차

마음껏 재단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전술된 것처럼 혹자는 창조주(신을 말한다)를 원망하는 리뷰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점 또한 오류가 있다.

사실 우리들을 포함한-우리 또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자연 그 자체는 창조주가 만든 것이고 

우리들조차 창조주가 마냥 선할 것이라는 모순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이 창조주의 선악까지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알고 보면 우리들의 역할마저도 그 무언가의 제약으로부터 한계가 존재하는 마당에 

그 이상을 알 수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너무나 당연시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어리석은 감정-전술된 영상을 성실하게 본 인간들의 성실한 감정-만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이행되고 있는 것이다.

코모도 도마뱀도, 사슴도, 인간도 모두가 그저 삶에의 충실에 만전을 기할 뿐이다.


다만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평가할 것이 있다면, 이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코모도에게 희생당하고 죽음에 이른 사슴이 자연의 법칙에 충실하였는가? 와 둘째는 짧다면 비교적 짧은 8분간의 영상을 시청한 인간들(시청자들을 말한다)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도와 동시에, 

현재도 그들의 삶에 충실하고 있는가? 의 문제이다.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변은 "사슴은 그렇다"이다.

사슴은 자신만의 삶을 죽음 전까지 충실히 이행하였고 

비록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새 생명의 잉태까지 번식에로의 의욕을 욕망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앞으로 삶을 전개해야할 코모도에게 중요한 영양분의 원천을 제공하였다는 것과
포식자인 녀석에게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사슴이 숙명에 대한 전적인 저항과 반항보다는 숙명에 충실하였다는 

사실이 필자로 하여금 숙연해지게 한다.

이제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변을 불가피하게 피할 수 없는 사정에 이르렀는데 

인간은 타당한 답변을 불가해하게 만들었다.

이해한 자들도 존재하지만 자연의 법칙에 대한 이해를 고의적으로 거부한 

자들이 더 많다는 사실, 선택받은 인간의 존귀함에 있어서 이에 충실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에 대한 사실은 답변을 함에 있어서 난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방금 전 표현한 인간이 선택받았다는 표현과 존귀함이라는 것은 

인간이 타 생명체 보다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는 인간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에 

가깝기 때문이다.


성찰......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사유함에 대해 선을 긋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성찰은 인간에게 아직 제약되지 않은 법칙들에서 만큼은,

이 선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고 선 자체 또한 무한히 팽창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과 이미 현존하는 그 역량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타 생명체들의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에 대한 충실함이라는 것이

포식 또는 희생이라는 숙명에의 그것이라면,

우리 인간은 인간의 세상을 포괄하기까지도 하는 대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우리가 각자 생을 언제까지 다하느냐에 따라 감정의 성실보다는 삶의 성실에 

우리 인간들만의 숙명적 법칙이 존재하고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점에 비추어본다면 필자는 성실함 보다는 

불성실함에 해당되는 일탈을 줄곧 일삼는 반항아이자 이단아라고 불릴 수 

있음을 고백해본다.

나 또한 삶의 이행이라는 충실함에 신경을 기울이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삶으로부터 도주 혹은 회피할 수 있는가?'를 

더욱 더 많이 고민해 보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 도주 혹은 회피는 필자 자신의 삶에의 극단적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짧으면 짧을 수도 있는 이 글 자체만으로도 

지금까지 주구장창 써내려온 것을 보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움의 화끈거림이 

필자의 심경을 말해주는 듯하다.

필자는 비겁하기 그지없고 용기가 없었던,

나약하고도 원자적 개인이었음을 본 지면을 통해 고백한다. 

어쩌면 지금 또한 비겁하고 용기가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본 지면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점은 

포식자로서 코모도 도마뱀의 삶에의 충실함과 

사냥감, 희생자로서 사슴의 삶에의 숙명적 충실함과 더불어

필자를 포함한 이 글을 보는 독자 여러분들이,

우리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성찰을 통해서

한 걸음만이라도 더, 삶에의 충실에 있어 진취적 모습을 스스로에게 보여주자는 다짐이다.


이 다짐이야말로 자연의 필연적 법칙에 가장 충실한 길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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