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
즉 살아있는 상태로 존재 중이며, 살아있는 상태의 항상적 성격의 본질
그 자체...
나는 소극적이고 볼품없게나마 실존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즘에서 나는 하이데거의 니체에 대한 평을 인용하고자 한다.
"니체에게 있어서 모든 존재는 생성이다".
하이데거의 이와 같은 평과 같이,
실존에 앞서, 실존이기 이전에, 실존은 생성을 그 토대로 한다.
실존의 장에, 실존의 표상이 드러나기 전에,
특정 표상은 관념으로서는, 극한을 넘어선 무한에 근접하게 존재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존의 장에서는 부재에 지나지 않는다.
부재...
관념이 실존의 장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써, 관념으로서만의 한계로써는,
실존의 장에서는 어디까지나 부재일 뿐이다.
예를 들어, 특정관념 A를 현실세계, 존재세계라는 실존적 장의 위에
부상시키기 위해서는, A의 생성을 기초적 토대로 실존해야만 한다.
관념은 어디까지 관념으로서나 머물러 있는 한,
관념은 부재로서나 실존으로서나 그 경계선상에 있는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유동적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유동적 표상을 부재이느냐? 실존이느냐? 를 결정하는 것은,
생성을 위한 기초적 토대와 이를 토대로 한, 실존적 의지"뿐"일 것이다.
생성과 실존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전술된 그 어떤 실존적 의지가 무엇일지는 나로서도 모르겠지만...................
A는 실존의 장이라는 종이 페이퍼에 "직접 쓰여짐"으로서만,
생성과 실존을 동시에 내포한 존재로서만 실존한다.
오직 A가 "직접 쓰여짐"이라는 생명력 있는 행위에 의해서만 말이다.
A는 쓰여지기 위해 투쟁한다.
쓰여짐은 곧 "실존함"이다. 아니 "실존 그 자체"이다.
아기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인용, 출처미상).
우리의 폐쇄된, 아니 갇혀버리고 말았던 우리의 충만한 사상들은,
부재의 막에서 그치기를 이내 포기해버리고,
투쟁을 위해, 그가 쓰여질 장을 연장해 나간다.
투쟁을 위해서...
투쟁을 통해서...
그렇게 A가 쓰여질 장은 전개되고 전개되는 연속의 장이며,
투쟁에 의한 A라는 본래의 실존적 모습은 현실에 드러난다.
다른 한편, 실존 사태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양태를 고찰해보자.
여기서 나는 니체와 그 견해를 달리한다.
니체는 존재에 대해 존재의 가능성 즉, 존재론을 이미 전제되어 있는 선행조건으로 생각한다.
니체의 존재관에서는 최소한의 존재론이 선행되고, 이후 대상으로서의 인식론이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필자로서는 실존 그 자체를 최소한의 존재론과 인식론의 동시성이 환원된 사태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인간 남성의 정액과 정자를 떠올려보라.
정액의 생성과 정자의 존재 선-후에 대해 판단과 비판의 명료한 기준이 존재하는가?
오히려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실존의 장에 "드러남 이전"의 특정관념 A는,
현실세계에서는 존재론적 당위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역설적으로 역행하여, 우리 머리 속에서는 인식론적 당위성이 필연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나의 견해로는, 니체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선-후 관계를 완전히 전복시킬 수는 없어도,
최소한의 이의제기는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존재론"만"으로는 더 이상 독단적 선행조건이 아니다.
존재론-인식론 동시성을 나는 피력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A에 대해서....
A는 "직접 쓰여짐"이라는 순간과 행위로 의하여,
생성과 동시에 완벽한 실존을 획득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의 유동적 표상이 이루어진다.
A는 쓰여지고 또 지속해서 쓰여진다.
반복된 순환 속에서 "쓰여짐"은 이루어진다.
단, 제시된 조건이 존재한다.
이 반복된 순환 속의 쓰여짐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예기간이라는 것을.............
A는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유동적 표상으로서, 유동적 움직임으로서,
A의 실존적 의지는 신선하리만큼 샘솟기 마련이다.
만일 A의 실존적 의지가 좌초되는 시간이 온다면,
그것은 A의 "쓰여짐"이 쓰여지기를 스스로가 거부할 때이리라.....
A는 그렇게 실존하고, 그렇게 부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