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본래 본문과 같은 글을 전개하리라고는 애초에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필자는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아직도 부족한 면이 많고 배워나가는 중이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필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인간은 한없이 죽음에로의 의지를 지향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삶에의 맹목적 순응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지함을 의욕"하는 인간의 심경에 대해
명백히 말하고 밝힐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다분히 본능적인 면부터
시작하여 신학에서 말하는 "창조주인 신"이라는 개념으로까지 무한히 확장되고 말 것이다.
"유지함을 의욕"이라는 인간 실존적 측면에 대해
나름대로 상당한 고민을 해왔다.
이러한 의욕됨의 원인에 대해서는 필자는 지금도 확신스러운 목소리로 독자들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의욕의 원인은 차치하고라도 의욕의 원인됨의 근원, 흔히 시원이라고
말하는 의욕의 시원의 샘조차 필자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필자로서는 원인과 그 시원을 간과해버리는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감수
해서라도,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실재가 "의욕한다"라는 욕망이라는 대상에 대해서만큼은, 연구하고 미약하게나마 글을 써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이글의 계기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인간 실재의 추동력은 인간의 욕망인 셈이다.
이로써 인간의 욕망에 대해 더욱 더 고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욕망에 대해 수천 번 이상은 생각을 해본 것 같다.
생각의 결과는 의외로 단순하다.
소위 말하는 의ㆍ식ㆍ주라는 3가지 기본적인 필수요소에 대해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명하다는 필자만의 확신과 이 중에서 가장 강한 욕망은 식욕, 더 나아가서 식욕과 대비되고 상응하는 욕망은 성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식욕이나 성욕이나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적 측면을 설명해 준다는 것은
그 누구도 쉽사리 반박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식욕과 성욕에도 차이점은 분명 존재한다.
식욕은 분명 부재하거나 결핍될 경우, 인간은 죽고 만다.
한마디로 괴로움의 고통에 몸을 비틀 다가 이마저도 위한 에너지를 모두 다 탕진해버리고 그렇게 힘없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아사餓死라고 부르는 전형적인 경우이다.
반대로 성욕은 부재하거나 결핍될 경우, 인간의 생과 사에는 관련성이 명백하지 않다.
성욕이 거세되어도 자괴감이라는 감정이 극단적 선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상, 인간은 생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비록 성욕이 결핍된다 할지어도, 인간은 다른 욕망을 향해 탐닉하며,
그런대로 살아간다.
한마디로 전술된 자괴감이라는 극한 파도가 휘몰아치지 않는 이상,
인간이라는 배는 성욕 때문에 난파될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성욕은 다르다.
암컷 한 마리를 사이에 두고 목숨까지 걸고 수컷 맹수 두 마리는 난폭
하게 싸운다. 난폭함이라는 단어도 미약하다.
어찌 보면 그들은 생과 사, 모든 것을 걸고 전념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인간도 예외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투쟁의 성격상, 창조주로부터 그 어떤 면죄부를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면죄부가 없는 이상 인간 또한 맹수들처럼,
시뻘건 액체가 대지에 낭자한 투쟁은 불가피하다.
우리에게는 투쟁이 강요된다.
이것이 비록 창조주에 의해 강요 되었건 그렇지 않던 간에....
시뻘건 액체가 바닥에 낭자하게 되고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 검붉은 색의 빛을 만개滿開하게 된다.
난폭한 투쟁의 패자敗者는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검붉은 색으로 변모해간다.
그의 살과 육...이 모든 것이 말이다.
수컷의 측면에서 보자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식욕의 결핍은 용서할 수는 있어도,
성욕의 결핍은 용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도 수컷들이란 그것이 정상적이라면,
투쟁의 숙명을 피해갈 수는 없다.
수컷인 이상, 우리는 투쟁을 대면해야만 한다.
투쟁을 넘어서도 영원히 충족되지 않고,
영원히 결핍되며, 영원히 수컷이라는 존재에게만큼은 구제될 수 없는,
성욕이라는 무서운 욕망이 꿈틀거리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내면 한 가운데에,
기묘하고 해괴하기 그지없는 이것은,
최소한 우리 수컷들만큼은 지배하리라 하는 것은 분명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연유로,
인간의 욕망과 성욕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본문이 후반부로 전개될수록 성욕의 측면은 더욱 강조될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씀에 있어,
나남에서 출판된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와
2: 쾌락의 활용이라는 두 권의 도서에서 각 10페이지, 각 20페이지 정도의 미리보기 서비스를 통해 모티브를 얻고 참조하였다.
다른 참조 도서로는 세창미디어에서 출판된 -질 들뢰즈의 "마조히즘"
읽기-를 곁들었음을 미리 시사해둔다.
참조 도서 중, 푸코의 저작 중 필자의 주관으로 중요시 여긴 부분에서는,
부분적으로나마 푸코의 권력 및 지식의 측면에서 성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조망하고 해석하였다.
그의 "권력의 다형적 기술"이라는 표현이 이를 잘 말해줄 것이다.
또한 푸코는 성의 해방보다는 인간의 성에로의 의지에 주안을 두었으며,
이에 대한 근거로 푸코는 과학의 체계화와 진보를 그 이유로 염두에 두었다.
푸코는 부르주아 및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가, 은폐된 성이 개방되고
공공담론의 영역에까지 성이 확장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이와는 상반되게, 필자는 성의 원초적 측면과 다소 지면의 공란을 차지하는 종교적인 측면,
정확히는 고대~중세~근대까지의 1차적 종교,
근현대~현대(오늘날)의 2차적 종교에서의 성에 대한 담론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질 들뢰즈의 마조히즘에 대한 이론을
상당수 참조하고 참고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한 획의 중요함과도 같다.
미약하고 부족하게나마 필자는 글을 썼다.
어쩌면 이 글은 완성보다는 미완성에 가까운 글이다.
필자가 성적 욕망의 결핍을 말하는 것처럼
이 글 또한 결핍이 분명 존재한다.
결핍을 무릅쓰고 감히 이 글을 쓰는 것은
인간 실존에 관심이 있는 누군가들에게
조금이나마 모티브를 제공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족한 글을 읽게 될 독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2022.3-
-1-
아...그 누가 말했던가?
이것은 비밀이라고...
"그렇지...이것은 누군가에게는 철두철미한 비밀이지.....“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점은 다른 누군가에는 비밀이 아닌
공공연한 추구의 대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몰라도 너무 몰라....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공공연하다 못해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그렇다. 이것은 바로 성이다.
한 곳에서는 철저히 억압과 금기의 대상이자
다른 한 곳에서는 축복받는 대상이자 누군가에게도 강권할 정도로
자칭 개방된 장소이다.
누군가에게 강권할 정도라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를 자신의 욕망을 위한
덫으로 한 걸음 더 몸부림치게 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를 제3자로 인식하며,
그에게 이타주의적 배려를 맛보게 하려는 것인가?
이유야 어찌되었든 욕망의 제1 인과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며,
욕망의 귀결 또한 나 자신을 위해 귀결되는 것이다.
나는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이고
나 자신부터 먼저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말한다.
이타주의라는 것을...
타인에게 건내는 무형부터 유형까지 이르는
찬란한 배려심의 잡동사니의 나열들을........
"사람은 한-두끼니 정도의 식사만 걸러도
배가 무지 고픈 존재이다.
“암...그렇고 말고..."
간혹 인류문명사에 있어 극한의 고난기, 즉 기아와 아사의 충만함의
소리가 인간에게는 높아 보이는 하늘까지 빼곡히 드리 메웠을 때,
인간은 식인까지 하였다. 그것도 어머니가 너무 배가 고파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는 행위까지 말이다.
이것은 분명 극단적인 행위라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 행위는 인류문명사에 있어 단 몇 번만으로
그친 것만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기후변화와 사회변동 등으로 인해
인류는 아사의 위기를 생각보다 수없이 겪어왔다.
위기는 이러한 극단적 행위들로 점철되어 왔고
역사라는 이름하에,
통치자라는 서슬 퍼런 이름하에,
은폐되고 또 재은폐 되기에 이르렀다.
난 이러한 인류의 극단적 역사 몇몇에 대해 비난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인간에게는 이타성이 우리의 예상보다는 훨씬 부족하다는 것을,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욕망하고 의욕하며,
그렇게 공전한다.
지구도 공전하고 우리도 공전한다.
참고로 그리스인들은 기독교문화에서와는 달리 성행위를 그 자체로서
악이라 규정하지 않았으며, 그것의 비도덕성의 과잉과 수동성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미셸 푸코, 성의 역사2, P.13 옮긴이 서문 中, 문경자,신은영 옮김, 나남, 2019).
-2-
욕망 중에서도 가장 우선시되고 손꼽히는 것은 바로 성욕이다.
전술했던 대로 인간은 한-두 끼니 정도의 식사만 걸러도
배가 무지 고픈 존재이다.
이것은 원자적 1인人 인간 자체를 뒤흔들어 놓아도 좋을 정도로
그에게는 참을 수가 없는 순간이다.
물론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배고픈 인간의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식에의 의욕은 이내 사라진다.
식욕은 그렇게 해서 사라진다.
대신 식욕의 사라짐-정확히 식욕이 결핍된 고통-을 대가로
대가를 지불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식욕이 결핍된 자의 무기력함이요, 아무런 힘없음이다.
이제 그는 먹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의 제전반에 대해
그 어떠한 것도 의욕 할 수가 없다.
그는 의욕 할 수 있는 추동력을 빼앗긴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괴로움과 고통마저 망각해버릴 정도의 이것은,
인간이 경험해 볼 수 있는 최악의 고통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최악의 고통과 나란히 병기竝記 시킬 수 있는
욕망이 바로 성욕이다.
성욕은 자유로울 수도 있고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자유롭지 못한 후자의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 대해, 우리들은 쉽사리 성적 욕망의 결핍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결핍 또한, 우리가 성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결핍 그 자체의 중요한 표상 중의 하나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후자의 경우는 따로 존재한다.
예를 든다면 성폭력, 양자 간 한쪽이 (성적 관계에서) 우세한 관계,
의무 방어전, 오르가즘의 편향 또는 양자 간 오르가즘의 절망적 상황 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의 성은, 모든 것이 전부 다 부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의 부정됨...”
이것은 인간의 욕망...그것도 가장 우선시되는 성욕에 있어서 최악의 귀결이다.
성욕을 포함한 모든 욕망을 금기시하는 것 중의 하나는 금욕주의이다.
금욕주의라는 것은 어딘가 신비로운 곳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실증주의의 발달과 문명의 근대화로 인해,
(미래 시점에)그것이 드러나고 또는 해체되고 파괴되어버리고 말게 된
기독교 문화에서 기인된다.
또한 기독교 문화뿐만 아니라 동양의 유교문화, 이슬람 문화, 힌두 문화 또한 우리의 금욕을 제시해준다.
나는 종교의 긍정적 역할을 애써 부정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특히 이들 종교적 문화는 모든 욕망의 기저에 있는,
우리 생활 제전반에 대해 일종의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침은 어느새 우리의 의무요, 우리의 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쩌면 법보다 더한 것일 수도........
생활을 전 지배한다는 것처럼 끔찍한 것은 없을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가혹한 금욕의 선상에 서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내가 이 글을 쓰는 2022년 또한 예외는 아니다.
전 인류사적ㆍ지구상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가혹하게 금욕으로부터 강요받았고, 받고 있는 중이라는 것은 애써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곳으로 눈을 돌려보자.
여성의 최고미덕은 자명하다.
그것은 사랑받는 여성의 혼전순결이다.
여성의 혼전순결은 결혼하기 전 여성의
최고의 미덕이자 최고의 가치로 치부된다.
서구권에서는 일부의 종교적 신념이,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종교적 율법이 이를 제약해준다.
바로 전술한 바대로,
나는 여성을 사랑받는 주체로 정립해 놓았다.
이것은 여성이 수동적이며, 주체와는 다른 비주체적인 것임을 암시해준다.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것...?
성적인 측면에서만 보아도 여성은 주인공도 아닌 조연도 아닌 것이다.
이것은 남성을 초월한 세상의 금욕주의에 의해
끌려 다니는 모든 것을 증명시켜 버린다.
여성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결코 그녀들의 꽃을 활짝 피울 수가 없다.
꽃이 만개하기는커녕 그 씨앗의 발아마저도
저지하고 금기시하는 것이,
구시대의 유물인, 종교적 신념 아닌 신념이, 빼도 박도 못하게 남겨
놓은 그 말도 못할 신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를 정확히 보자면, 이것은 이상화의 상징에 가깝다는 것을
쉽사리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을 표상하는 기호이자 상징이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 기호와 상징은 근현대의 훌륭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로 인해,
무자비하게 해체되고 파괴되었다.
또한 그 이상이라는 것이,
한낱 허무에 지나지 않는 것임 또한 증명해주었다.
종교는 그렇게 오늘날까지의 허무주의의 연속임은
이제 그 누구도 알 법 하다.
하지만 종교보다 사람을 수동적이게 하고 절제하게 하며,
금욕의 늪에서 영원한 감금을 시키는 것은 따로 있었다.
사실 종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존재한다.
이것은 인류문명사의 누적되어온 “관습“이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 같은 자들은
종교가 종이 걸레짝이 되도록 재창조한 재창조주들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종교의 재해석이나 재편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종교의 제2의 창조", 엄연히 그들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창조주들인 셈이다.
(여기서부터 재창조주들이라는 표현 또한 창조주라 표기하겠다).
창조주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제2의 신식 종교(형식과 논리에서의 새로운)를 창시한 채, 그만 현세를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주어진 책무에 충실하였고 창시에 있어서 나름 모범적인 일조를 하였다고 착각하였다. 그들이 창시와 관계되고, 관련된 일조에 대해
혁혁한 공로를 조금이나마 세운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지나치게 망각해버려 대수술의 집도를 마침내 끝내버리지 못해버린 것은
기성 종교라는 거대한 간판 밑으로 깔려있던 인간의
관습, 이를 이루는 인간의 도덕, 즉 한마디로 그 뿌리 깊은 원천이
"인간의 죄의식"이라는 원초적인 측면을 알아 채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이를 알았던 것은 독자 여러분들 또한 잘 아는 프로이트,
자크 라캉, 칼 융 정도에 그칠 것이며, 이들 또한 이것에 너무 전착한 나머지 인간의 죄의식과 관습,
그리고 우리 시대와 인간들을 지배하고 총 망라하는 세상과 시대에 대해,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정의할 엄두는 내지 못하였다.
그러기에는 이 문제는 너무나 원대하고 거대했으며,
작은 인간 한명이 해결하기에는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거북하고
숭고했으리라.......
그렇다... 이 위대한 제2의 창조주들은 새 종교의 창시에는
다소 성공했으나, 인간의 가장 정직하면서도 동물적인 모습, 이 적나라하고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순수한 자연의 세계에서는 떳떳하게 자랑할 만한 인간의 죄의식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면을 간과해버렸다는 것이다.
"단순한 간과를 지나쳐서 이토록 과감한 외면이 더 이상 존재할
것인가?"
어쩌면 외면이고, 어쩌면 그들이 지나치게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제2의 창조주들......
오직 그들만이 알 것이다.
"인간의 죄의식"
이것은 단순히 내가 타자를 향해 악한 행위를 한 것 따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폭력, 기만, 사기, 살인 등등...타자에 대한 가학적 행위만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죄의식을 대부분 설명할 수만은 없다.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 발전된 효의 개념,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불효로부터 기인하는 죄의식조차 인간의 원초적인 죄의식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인간의 거창하고도 그 잘난 죄의식이라는 것은,
거창함 속의 단순함을 지향한다.
이것은 당장 주변의 어린 아이들만 유심히 보아도
단 번에 알 수 있다.
그것은 유아기를 거치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자위행위"이다.
아이들조차 알건 다 안다. 다만 그들이 느끼는 쾌감에 대해서만 말이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자명하게 인지하는 점은, 그 행위로 인해
자신들의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쯤이다.
공리주의적인 입장에서 보면,
유아기 때의 그 행위를 하는 아이들이 가장 행복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가장 최선의 수단을 알고 있으며 이를 행하고 만다.
"행위를 함"으로 인해 그들은 마침내 행복의 궤에 오른다.
그들은 바깥 세상에 대한 부러움 따위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만큼은 가장 행복할 것이며,
내면세계에서 만큼은 "신"과 같은 경지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전술한 제2의 창조주들은 제1의 기성종교에 대한 폭력성에만 의존하고,
이를 파괴하는 작업에 열중하였을 뿐,
기성종교가 그토록 열망스럽도록 절제시키려던 이 행위에는 열중하지 못하였다.
즉, 실패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2의 창조주들은,
인류학사, 그것도 인류의 문명사에 대해서는 가장 철저한 반역자들이자 배신자들인 것이다.
"아이들은 행위한다"
인간은 동물적으로 꾸루륵 소리가 나기도 전에 배고픔을 느끼며,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인 인간들은 자연스레 성욕 또한 느낀다.
아이들도 성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아이들은 그저 결핍된 쾌락을 추구할 때, 단지 결핍이 느껴질 때만 자위행위를 하고 만다.
이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며, 아이들의 부모들이 나무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솔직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만인들이 인정하지 않는가?
솔직함을 넘어선 아이들의 그것은
어른들로 하여금 경외심이 느껴질 정도로
원초적이며 동물적이다.
이것의 자연스러움과 순수성은 인간세계의 극한의 그 무엇과도 같아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순수함을 고이 간직한
원시림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 아이들은 원시림이라는 숲 속에 숨어
그들은 스스로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무언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죄의식"
"아이들은 나쁘지 않다."
아이들은 그저 정직하고 솔직할 뿐이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신이 존재한다면 신조차도 이런 모진 짓만큼은 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없는 죄를 어른들이 묻는다면,
그것은 아이들의 원초성과 순수함이 전부일 것이다.
보통 유아기라 함은, 1세부터 6세경까지의 기간 즉,
보통 초등학교 취학시기에 달할 때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유아기를 거치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자위행위",
행위는 그 자체로 공평하다.
어른들의 성행위와는 달리 억압도 금기도 존재하지 않으며,
남자, 여자 어린아이의 성별에 있어서, 구분 없는 성차 간 불균형도
부재하다.
또한 수동적이지도 않고 자발적이기까지 하며,
이러한 능동적인 치솟음은 쾌락을 넘어선,
아직은 미완성인 아이들의 자기기술自己記述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본다면, 어른들은 유아기적 아이들만도 못하다.
다만 아이들에게 치명적 약점이 있다면, 반복되고 순환되는
자위행위를 하고 나서도, 이름 모를 모종의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세계가 아이들에게 강요한 것도 아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부모에 해당되는 어른들이 이를 지켜보고
제지하기 이전에, 이러한 죄의식은 이미 존재한다.
죄의식은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심할 경우, 하루를 넘어선 며칠이고서야 아이들의 뇌리 속을 꿈틀꿈틀 거리며 또한 헤쳐 놓으며
아이들을 괴롭혀 버린다.
이것을 못 이기는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부모에게 이실직고라도
하거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린 채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하는
어떤 형태와 양태를 보인다.
아이들은 마냥 불건전하거나 나쁘지 않다.
너무 솔직하고 순수한 것이 문제이다.............
-3-
-제1에 해당되는 기성종교-
전술된 것처럼 제1에 해당되는 기성종교는, 아이들의 이러한 죄의식에 대해 단지 명문화 하였을 뿐이다.
이 몹쓸 만한 명문화 내지는 성문화는,
부분 문화적으로 할례의식 등을 통해 표상화 된다.
기성종교의 창조주가 심술을 부리는 것인지, 어른들의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들을 억제하고 제압하려는 것인지 그것은 불분명하기만 하다.
심지어 기니, 말리, 시에라리온 같은 아프리카의 서부, 동북부 국가 등에서는
여자 아이들 성기의 성감대 부분을 가혹하게 잘라 내버리는
일종의 할례의식을 하기도 한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마냥 좋은 것인가?"
이것은 분명 기성종교와 여기에 물들어 버린 어른들,
한편으로는 바람직하다고 불 수 없는, 그 시원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문명이, 인간 스스로를 감금하고 억압해버린 나머지,
문명과 인간이라는 "순환적 체계"를 통한 자기기만에 가까운 행동,
즉 자학행위를 순환적 체계에 삽입함으로써,
원만한 인류문명사의 전개를 도모했던 것이다.
자학행위는 그 시원을 알 수 없는, 전진하는 추동력을 가진
자동적인 무엇인 것이다.
이 추동력을 자동하게끔 움직이는 것이 "신"이 아님은 자명하다.
그러나 추동력을 가진 이 무엇을 설계한 것이 "인간"임은 자명하다.
여기서 신은 다만, 모티브(동기)로서만 작용하였을 뿐이다.
원시사회와는 구별되는 고대사회가 문명화로 접어듦으로써,
신과 기성종교를 토대로 우리의 먼 선조들은 이렇게도 이 위대한 엔진을
설계해버리고 만 것이다.
"억압과 감금, 폭정 그리고 이 금욕의 엔진은 왜 설계되었는가?"
인간의 성적 욕망이 생각 외로 너무나도 강렬하여서 또는, 인간이
성적으로 너무나 방탕해서라는 이유가 허울만 좋은 그 근거제시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라는 가능성에 국한될 뿐,
“~는 그렇다~” 라는 단순 명제 혹은 참 명제에 가까운 정의와는 무관하다.
인간이 성적 욕망을 이 세상에 발현하기 이전부터,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죄의식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것은 종교적인 것과는 무관하다.
다만, 존재적 인간이 “원초적이고 타고난 선천적인 무엇이다“라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피조물로 만든 창조주가 죄의식을
인간에게 주입시켰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는 필자로서는 다소 난감하고 어렵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죄의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바로 인간 스스로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 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초기 문명시대의 종교의 탄생과 함께,
종교의 사제들, 공동체 또는 결사체와 같은 집단의 지도자들,
기타 중산층 이상에 해당되는 부유한 상공업자와도 같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부르주아지들에 속하는 계층들이,
민중에 대한 통치의 유용성, 즉 효율성을 위해,
이러한 "금욕적 자동엔진"을 설계하고 기꺼이 수용했는지도 모른다.
이들을 이제부터 고대의 기득권층이라 일컫겠다.
하지만 고대의 기득권층은 이 "자동적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웠는가?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보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고대의 성적 욕망이라는 것 또한 오늘날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을 뿐, 분명 제약은 존재하였다.
다만 우려하던 대로, 이 고대의 기득권층은 예외적으로 이러한 제도적 제약을 피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동적 시스템"과 더불어 인간이 설계한 것은 도덕과 윤리, 법 등과
같은 것들이다. 분명 기득권층은 설계된 제약으로부터 민중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웠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하지만 이들 또한 방종 내지는 방탕으로부터의 충만함 속에 기댈 수는 없었다. 고대 또한 지켜보는 자들,
파수꾼과도 같은 감시자들은 분명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기득권층 또는 지도자에 해당되는 인간들이,
파수꾼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애써 부정하지 않겠다.
지도자들도 분명 이를 인지하고 자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성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 좀 더 은밀하고 폐쇄적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고, 이것은 불가피했다.
반면 이런 기묘한 방법이 언제라도 들통이라도 나는 순간,
이들은 불명예(오명)와 함께 자신의 몰락을 기묘하게 경험할 뿐이었다.
시대는 흐르고 흘러 제약적이고도 억압적인 금욕주의는,
매우 좋은 동반자인 제1세대 초기 기성종교와 더불어,
휘황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는 '금욕주의의 르네상스'라 일컫을 수 있다.
"인간은 마조히스트적 존재다"
대다수의 석학들이나 권위자들은 필자인 나의 이러한 견해로부터
극심한 반대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견해를 유지하고 싶은 바람이다.
인간은 기묘하면서도 때로는 음흉한 그리고 변태적 욕망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는 누구나 찬동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변태적 욕망에 대해서는 다수가 부정할 것이다.
찬동과 부정과의 이 괴리...
이것은 우리가 지나온 나날들에 대한 이해와 오늘날의 이해와의 괴리를
대변해주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괴리를 종합하고 이해시켜줄 희망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종국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변태적 욕망이라는 부정적 선입관에 대한 견지에 대해 분석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희망이다.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성적 욕망이 너무나 당연시되듯이,
인간의 변태적 욕망 또한 너무나 당연시된다는 것을.............
이것은 유동적 상황에 따라 불건전하거나 자칫하면 범죄라는
크나큰 과오로 진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격의 방향 문제가 문제를 결정할 뿐이지,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초적인 성적 욕망과 더불어,
선천적 기질, 본능적 기질에 다름 아닐 뿐이다.
비록 변태적 욕망의 시원에 대해 구체적 해답은 내릴 수는 없을지라도,
이것은 분명 인간 본질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오늘날까지의 인간은 가학적 억압과 학대를 통해
그들 나름대로의 신선하고도 쾌감적 만족을 느껴왔음은 분명하다.
인간은 만족하고 또 만족해왔을 뿐이다...........
"인간은 지나치게 반항적인 존재다"
전술된 대로 어른들은 아이들을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는 차치하고서라도 나무라서도 안 된다.
이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니깐.................
실은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하다.
어른들은 머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기존의 체계 혹은 체제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한다.
저항의 강도는 그들이 쇠약해져 버리고 연로한 노인이 되기 이전까지 강화될 것이다.
제1의 기성종교는 우리의 욕망, 그것도 성적 욕망을 금기시하였다.
고대를 넘어선 중세까지 그리고 어쩌면 현대까지도,
우리는 인류에게 있어서 위대한 발명품인 "자학행위"가 쉴 새도 없이
그 기제가 작동하는 "금욕적 자동엔진"에 의해 지속되는 "순환적 문명사"를 전개해왔다.
이 엔진의 추동력은 인간의 단순한 성적 욕망"만"을 특유의 물레방아질로 분쇄시켜 버리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에게 존재하고 전개되려 하는 모든 욕망,
예를 들어 인간이 하늘까지도 솟구쳐 버리고 싶은 이상까지도
이 엔진이라는 몹쓸 만한 그 발명품은 처절히 분쇄시켜 버리고 말았다.
비로소 인간은 초월 내지는 반항이라는 것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대로 머무르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이 또한 원초적이고 선천적이고 본능적이기 그지없는,
지금까지의 선보이지 않은 새로운 화약고를
인간은 마련 중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화약고, 전쟁의 서막을 울리다"
시원을 알 수 없는 추동력이 존재하는
금욕적 자동엔진과 인간이 최후로 발악하고 몸서리치는
새로운 화약이라는 신무기의 대결은 흥미로움을 넘어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할 수 있는 가능성에는 거의 다 도전해 본 인간의 입장으로서는,
이것은 인간이 직접 참전하는 마지막 전투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화약고에서 화약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성적 욕망만큼은 어느 정도 용인되던 그 시절조차
억압되고 저지되었던, 아니 강요 속의 부름에 맹목적 순응을 하던
변태적 욕망은 이제야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본디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부재중이었을 뿐이다........
부재 속에서 침묵만을 고요히 유지하던 주인공이
본디 자신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주인공은 '권좌에로의 복귀'를 꿈꾸고,
월계수 잎이 풍성한 월계관을 쓰고 대관식을 하루 빨리라도
성급히 하고자 한다.
그는 이제 '제1의 기성종교'와의 전쟁을 선포해 버리고 만다.
오늘날의 나는, 이것을 '제1차 대전'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전쟁은 전면전이 아니다.
정확히는 '게릴라 전'이라고 하겠다.
변태적 욕망이라 일컬어지는 새로운 화약들은
가톨릭 신부들, 즉 종교적 사제들과 권력층에 해당되는 지도자들의 눈을 피해, 그들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은밀하고 폐쇄적인 곳으로 침투한다.
쌀롱, 유곽(집창촌, 사창가를 말한다), 성을 사고파는 매매춘(이것은 일종의
계약관계이자 암거래이다)...
이 모든 곳들로 화약들은 침투하고 만다.
화약이 터질 때마다 그 향기는, 우리의 오르가즘을 태양의 빛으로 인해,
이내 그 빛이 반사되고야 마는,
눈부신 새벽의 달님과도 그 거리감을 가깝게만 한다.
어쩌면 우리는 달님과의 밀애와 밀교를 은밀하게 즐기고 말았다.
이제 그렇게 해방된 밤 속에서, 우리의 성적 욕망은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게 되었다(인용, 알베르 카뮈, “페스트” p.400,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21).
-4-
-목수들의 등장, 제2의 종교 탄생-
뚝딱!! 뚝딱!!
벌써부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제1의 기성종교는 서서히 허물어져만 갔다.
이러한 허물어짐은 기성종교가 너무나 쇠약해진 면도 있었고,
목수들의 등장이 한 몫 한다.
목수들은 야심가들이자 의욕으로 충만한 사상가들이다.
대표적인 목수들은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와 같은 작자들이다.
실상 제1의 기성종교는 환상이고 허상이었다.
목수들은 ‘파괴적인 의도’를 가지고
철저히 자신들의 책무에 전념하고 헌신하기까지도 한다.
이제 오래된 성벽은 허물 때가 되었다.
목수들의 역량으로는 파괴하고 해체할 수 있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의 결과로,
목수들은 자신들의 의도와 자기 사유라는 측면이,
기성종교에 대해 나름 승리를 성취했다고,
공공연한 믿음에 도취되어 있었다(일부인용, 칼 야스퍼스의 “니체와 기독교”
읽기 p.111, 정영도 지음, 세창미디어, 2016).
오래된 성벽의 무너짐으로 인해,
목수들의 승리는 기정사실화 되어버렸다.
이것은 수천 년 만의 승리이자 쾌거다.
하지만 성벽이 무너진 그 곳에는,
파괴된 성벽의 파편화된 조각들이 여기저기 널 부러져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승자가 완전히 전도되어버린,
허무주의의 승리였다.
그리고 뜻하게 않게 ‘승자의 권좌’에 앉혀져버린
허무주의라는 이 기묘한 존재는 근현대에 이르러서야
인류문명사의 제2의 공공연한 종교로서 선포되기에 이른다.
“제2의 창조주들”
제2의 종교를 창시한 창조주들은,
제1의 기성종교를 타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일부 세운 것은 맞다.
그들은 기성종교에서 파생된 금욕주의를 어느 정도 일소 하였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새로이 부상하게 되었다.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이 기세등등하게 인류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허무주의이다.
제1의 기성종교에 대한 환상 문제는,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와 같은 자들과 같은 제2의 창조주들에 의해 어느 정도 해결된 듯 싶었었다.
허무주의는 내가 이 글을 쓰는 2022년까지도 연속된 펼쳐짐을 자랑하고 있다.
허무주의는 내가 지적한 인간의 관습, 정확히 말하자면
"관습의 폐해"를 영원히 간직한 채로 그 독을 내뿜고 있다.
사실 금욕주의는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허무주의가 대를 이어 금욕의 또 다른 모습인, 앞에서 지적한 "관습의 폐해"를 오늘날까지 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제1의, 제2의 종교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성까지는 없을 듯
싶다.
더 나아가 예견되지도 않은 제3의 종교라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힐난 혹은 고성에 가까운 나의 이러한 말투의 정답은,
바로 허무주의라는 것과 함께 일 것이다.
-5-
우리는 연장 통에 가득히 담겨 있는 망치를 꺼낸다.
금욕주의, 허무주의, 관습의 폐해를 산산조각 내기 위해,
다시 한 번 망치질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파편화되고 가루가 될 때까지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망치질을 해야 하는 것은, 새로이 부여받은 기회이자
책무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폭력성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 인류에게 있어서의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인간의 각성된 새 의식을 위한 무장투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오늘날에도 조용히 기대하는 중이다.
성性은,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성적 욕망은 어떠한 경우가 있어도 절대 억압될 수 없다.
이것은 계보학적으로,
도덕적 금욕주의, 기성종교의 억압, 허무주의 속 관습의 잔존에 대한 폐기 실패.........
이 모든 것들이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우리는 모든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인간의 성적 욕망의 순수성과 그것의 발현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외연의 확장을 도모한다는 것을...
다만 우리는 이 욕망이 올바른 방향을 선택하고 그렇게 지향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어쩌면 이러한 지향이 달성되는 순간, 그날은 성적 욕망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욕망이 철저하게 해방되는 "평화의 날"일 것이다.
평화의 날이 언젠가는 도래하기를 고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작품 해설-
인간의 욕망에는 다양한 욕망들이 존재한다.
그중 필자는 본 글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욕망들 중,
성욕을 중심으로, 특히 성과 성욕의, 인류문명사 중 억압적 기제의 역할과 이에 따른 기제의 추동성 그리고 억압의 결과론적인 면인 동시에 해석적인 측면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인류문명사가 근대라는 시점에 접어듦으로써의
(여기서는 성에 대해서만 말한다) 억압적 기제로부터의 해방,
또한 이러한 해방 이후의 인간과 그 문명을 둘러싼
공공연하게 된 성 내지는 성의 담론, 또한 추가로 (성에 대한) 인간들의 (성에 대한) 그간의 억압적 기제의 해방 이후에 현현하게 된 (성에 대한)에 인간의 허무주의, 또한 이를 넘어선 필자로서는 조금은 욕심 부려 본
니힐리즘과 그 이후까지, 간략하게나마 고찰하게 되었다.
또한, 억압적 기제로부터 해방 이후의 인간은 아무래도 불안정하고,
내면적으로나마 동요가 불가피한 존재이다.
하지만, 반드시 인간은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우뚝 서서 실재하며,
실존이 강력히 요구되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인간이 타고난 실존적인 선천적 기질을 중심으로,
미래지향적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게 되었다.
간단히 본 글의 전개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필자의 모티브와 영감, 그리고 본 글을 쓰게 된 계기,
-봉건적인 반反 여성주의,
-중세시대의 신학적 금욕주의, 신비화 그리고 허무주의적 환상,
-관습적 금욕주의와 폐해,
-인간의 내재적 죄의식,
-자기기만적 인류문명사,
-변태성욕을 소유한 존재론적 인간,
-지나치게 반항적인 실재로서의 인간,
-변태적 욕망의 꿈틀거림과 해방의 서막,
-허무주의의 승리,
-허무주의의 불완전성(결핍),
-해결책으로서의 니힐리즘과 새로운 시대로서의 니힐리즘,
-욕망의 해방으로서의 지향
-도래하게 될 최후의 평화의 날(????)
마지막으로 독자들과 필자 상호 간의 미완성 과제.
즉, 평화의 날을 다함께 꿈꾸며.......................
-2022.3 필자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