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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가 살아있는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신성한 것이니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진리를 구한다는 것....진리를 찾아 나선 다는 것은,
순환회귀에 가까운 우리가 서 있는 지점으로,
분기점을 돌아 다시 돌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것은 진리라는 것은 차라리 순환회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폐기된 것이 아니다.
신성한 것 또한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몽상적으로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내공이 높다는 자들, 내면이 훌륭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
양자 모두에게 가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문들을 던져보라.
제각기 나름 생각을 해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만족되지 못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리는 없다.
깨달음을 한 인간의 생애동안 수십 년간 겪었어도,
우리 내면에 또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몽상적인...
그 어느 것을 갈구하고 희망하는
몽상적인 규정과 목표일뿐이다.
나는 여기서 니힐리즘과도 같은 사상을 설파하려는 것이다.
니힐리즘은 기존의 존재하는 사상들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나는 존재하는 사상마저 존재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억지로 짜 맞추기라도 하듯이, 우리에게 존재했던 것을 내게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어처구니없게 규정해버린 우리의 몽상이 그 전부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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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되고 느껴지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은 새롭지도 않을 것이며, 벅찬 놀라움으로 다가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 내면의 한 구석에 보란 듯이,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일하게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면,
자리 잡고 있는 이 부분들의 각 차이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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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존재한다면, 이것은 단일하지 않다.
물론 진리라는 것은, 비록 유기적이고 단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진리는 끊임없는 반증에 의해 도전 받으며,
진리의 틈새를 향해 비진리라는 것이 늘 침투하기까지도 한다.
진리와 비진리는 다른 것이 아니다.
어느새, 비진리와 진리는 서로간의 합일을 모색하며,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기 이르게 된다.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 원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진리가 만약 존재한다면,
늘 비진리가 침투해야 할 만한 틈새를 늘 유지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틈새는 차이에 의한, 차이의 추동력에 의한 진리의 파노라마를 향해
그것의 지향을 위해 늘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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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에는 우열 및 우위가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그것들이 있다고 한다면, 생과 사의 범위 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생과 사라는, 극한의 범위 밖을 초월하는 진리는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과 지각하지 못하는 영역의 밖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인식과 지각할 수 있는 영역의 내에서만, 그것을 고찰해야만 할 것이다.
종국적으로 진리는 초현실적일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것.
영원한 무지에만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유와 내면에는 초현실적인 진리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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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는 내면적 진리에만 탐구를 해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면적 진리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뿐더러,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면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가정해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별다른 교훈이나 깨달음 같은 것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이러한 함의가 그 무언가의 격동적 혁명을
동요시키지 않았음을 잘 안다.
차라리 내면적 진리보다 더욱 유익한 것은,
이러한 내면적 혁명의 동요를 휘몰아치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다가오는 영감일 것이다.
영감은 가르침이나 수많은 백과전서를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누구에게도, 아니 스스로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그 순간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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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지각하게 해준다.
우리가 늘 살아있다는 신호 내지나 경고를
영감으로부터 항상 수신한다.
영감은 우리에게 이미 존재하였던 그 어떠한 사유에 있어서의
대장간의 쇳물을 끓어오르게 하는 그 불꽃과도 같이
우리를 번뜩이게 해준다.
이것은 사유의 연장이다.
사유의 연장은 연장과 연장이라는 연장-연장-연장-연장이라는 결코
그치지 않을 것만 같은 연속적이고도 항구적인 성격을 지닌, 순환적이고도 연쇄적이고도,
지속적인 과정을 지닌다.
여기서 우리에게 선택이라는 것이 요청된다.
수많은 연장의 선택안 중, 우리가 택해야 할 연장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 고유의 사리분별적인 고찰과 혜안이 이 선택의 올바름을 보증해 줄 것인가?
이 역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선택 또한 우리에게 지각을 안겨주는 영감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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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영감에 의한 선택이, 비합리적이라는 견해를 얼마든지 내보일 수 도 있다.
사실 내가 보아도 영감에 의한 선택은, 수량적인 사고라는 궤도에서
충분히 이탈 했다는 점에서, 비합리적 성격을 지닌 점이라는 것에는 충분히 찬동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다.
비합리성의 합리성으로를 지향한 영도라는 그것이다.
비합리성은 비합리성 그 자체로는, 비합리성 그 자체로밖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비합리성은 어디까지나 항구적인 비합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합리성은 비합리성을 무수히 낳게 되고,
이렇게 해서 비합리성은 수적으로 누적이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내가 전술한 영감이라는 것이
우리의 비합리성을 그대로 좌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감이라는 것은 비합리성의 촉매제가 되어, 비합리성 그 자체가 스스로를 반성하게 만들어 버린다. 비합리성은 라이프니츠가 말한 모나드처럼, 서로에게 상호 반사되며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의 비합리성이 절대적인 수가 누적되어 온 방식이라면,
이제부터의 비합리성은 상호 성찰과 반성이라는 수가 누적되는
방식으로, 그 운동이라는 것을 전개해 나간다.
이제부터 비합리성은 수의 누적에 비례하여, 반성이라는 것을 일종의
기회로, 일종의 장으로 서로의 오류 내지는 결점을 수정해주며 합리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극한이 되었던, 무한이 되었든 간에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결국 그대로 정체되어야만 하는, 혹은 정체될 수밖에 없는 비합리성은,
뜻하지 않는 영감이라는 지각적 촉매로 의하여,
비합리성의 합리성을 영도해내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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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인간들은 진리를 구하려고만 애써왔다.
이러한 인간들의 지향적 방향이라는 방법에 대해,
나는 전복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진리는 구하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지향에 대해서는 진리를 구하려는 우리만의 자아를 버려야만 가능할 지도 모른다.
진리를 구하려는 자아의 망각...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진리가 얻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얻어진 진리라는 것 또한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진리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한 것이, 진리와는 상반되는 그 무언가일 수도
있고, 우리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그와는 상반되는 인류의
혜안을 돌이킴이 가능케 하는 진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상대적인 것 이상의 다원적인 것이라 말할 수가 있는데,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가 될 수 있고,
진리라고 일컬었던 것이 진리가 아닌 것으로 폐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어떤 것이 진리라고 우리는 쉽사리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진리 아님과 진리임의 차이는 없다.
다만 진리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규정이라는 방식대로의,
진리 아님과 진리임이 무수히 교차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영감이 어느 지점에 내려앉는 순간, 이 순간이 진리로 규정될 것이다.
종국적으로 본다면, 진리 아님-진리임의 무수한 스펙트럼 내에서,
순간적 영감이라는, 우리의 이성보다는 감각적인 발광으로 진리라는 것을 규정할 것이며, 진리아님과 진리임은 언제라도 폐기될 수 있거나
언제라도 융기할 수 있는, 각각의 사멸과 생명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진리를, 애써 의도적으로 갈망하고 갈구하였던 우리의 전통적인
방법론은, 진리아님-진리임의 이분법적 허상을 가공하고 조작해왔던 것이며,
우리는 허상의 사이에 가로놓인 상태로,
어리석은 의구심과 탐구심만을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처럼,
그렇게 지워지고 사라질 것을 모른 채, 갈망해왔던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있어 진리라는 것은,
운명을 가장한 우연이라는, 영감의 선택을 받은 것이며,
선택과 동시에 실존적으로 우리의 눈앞에 융기가 되었을 때,
만인에 가까운 다수에게 용인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것은 살아있으면서 예정되었던 새 생명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진리의 파노라마에서는,
차이는 불연속적인 것이 아닌 연속적인 것으로서,
사멸(폐기)-생명(융기)의 무한한 예정된 가능성을 가지고,
극한이 아닌 무한이라는 무無에 가까운 신성함의 한 가운데에서,
그렇게 순환하고 또 순환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인식론적 지각이 무뎌지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이것이 내가 진리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의 전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