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문장은 간단히 주어+동사+술어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가장 먼저 우리는 두 가지의 실험적 작업을 해볼 수가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주어와 술어를 그대로 고정시킨 채, 동사를 무수히 바꾸어보는 것이다.
이러한 "바꿔봄" 내지는 "변화시켜봄"은 처음의 일회성으로부터 수 차례 이상의 그 무언가의 행위들, 그리고 극한에 가까운 반복에 도달하게 된다. 어쩌면 세상의 진리가 무라면 이러한 동사의 공허한 빈 공간에 "바꿔봄"은 무한반복이 가능할 것이다.
"가능해짐에 도달한 무한반복"에 의해 주어+동사+술어의 구조로 이루어진 하나의 문장에서 동사는 무한해지고야 만다.
동사의 무한해짐은 시시각각 전술된 하나의 문장을 변화시킨다.
하나의 문장의 "변화됨"은 이제 극한을 뛰어 넘어 무한으로, 그리고나서 무에 근접해지는 것이다.
또한, 문장의 변화됨이 "무한으로 변화됨"에 따라 하나의 문장( 주어+동사+술어를 말한다)이라는 것은 변화됨의 순간 마다마다, 시시각각 (문장에서의) 죽음과 탄생이 "무한으로"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시간으로 무한됨을 형성하는 동시에 발생하는 죽음이라는 양태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겠지만-여기서는 굳이 논하지는 않겠다.
우리는 (문장에서의)무한됨을 형성하는 동시에 발생하는 실시간적이고도 움직임이 있는
탄생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하나의 문장이라는 것은 동사라는 단 하나의 변수의 현재 진행적인 변화에 따라 탄생하고 또 탄생하는 거듭 탄생함을 의미한다.
동사라는 변수의 현재 진행적 변화에 따라 문장은 그때그때마다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며,
끊임없는 생명의 출발은 무한을 넘어선 단계로 연이음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문장을 위한) 생명은 거듭 태어나고 탄생한다.
단지, 생명의 출발과 동시에 (하나의 문장을 위한) 죽음이라는 전제에서만 이는 가능할 것이다.
생명력을 그때마다 부여받는 하나의 문장을 위한 거듭 반복됨에 따라서,
(하나의) 문장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생명을 유지해오고 있다. 아니,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하나의)문장은 살아있는 것이다.
기묘하고도 오묘한 이 무언가가 필자의 죽음 이후에도 무한으로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무한의 지속됨에 따라 무에 수렴되고 무라는 때아닌 진리를 만들어내고 구성해
낼 것인지는 운명의 신과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길 것이다.
둘째는 첫째의 방법과 같은 방식과 형식으로,
주어와 동사를 그대로 고정시킨 채, 술어를 무수히 바꾸어보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첫 번째의 방법, 동사의 "바꿔봄" 내지는 "변화시켜봄"과 동일한 방식으로
술어라는 변수 또한 "바꿔봄" 내지는 "변화시켜봄" 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술어의 공간에 첫 번째(동사의) 방법과 동일한 방식의 변화가 행해진다.
그래서 독자들 중 일부는 이 부분을 생략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바꿔봄" 내지는 "변화시켜봄"은 처음의 일회성으로부터 수 차례 이상의 그 무언가의 행위들, 그리고 극한에 가까운
반복에 도달하게 된다. 어쩌면 세상의 진리가 무라면 이러한 술어의 공허한 빈 공간에
"바꿔봄"은 무한반복이 가능할 것이다.
"가능해짐에 도달한 무한반복"에 의해 주어+동사+술어의 구조로 이루어진 하나의 문장에서 술어는 무한해지고야 만다.
술어의 무한해짐은 시시각각 전술된 하나의 문장을 변화시킨다.
하나의 문장의 "변화됨"은 이제 극한을 뛰어 넘어 무한으로, 그리고나서 무에 근접해지는 것이다.
또한, 문장의 변화됨이 "무한으로 변화됨"에 따라 하나의 문장( 주어+동사+술어를 말한다)이라는 것은 변화됨의 순간 마다마다,
시시각각 (문장에서의) 죽음과 탄생이 "무한으로"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시간으로 무한됨을 형성하는 동시에 발생하는 죽음이라는 양태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겠지만-여기서는 굳이 논하지는 않겠다.
우리는 (문장에서의)무한됨을 형성하는 동시에 발생하는 실시간적이고도 움직임이 있는
탄생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하나의 문장이라는 것은 술어라는 단 하나의 변수의 현재 진행적인 변화에 따라 탄생하고 또 탄생하는 거듭 탄생함을 의미한다.
술어라는 변수의 현재 진행적 변화에 따라 문장은 그때그때마다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며,
끊임없는 생명의 출발은 무한을 넘어선 단계로 연이음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문장을 위한) 생명은 거듭 태어나고 탄생한다.
단지, 생명의 출발과 동시에 (하나의 문장을 위한) 죽음이라는 전제에서만 이는 가능할 것이다.
생명력을 그때마다 부여받는 하나의 문장을 위한 거듭 반복됨에 따라서,
(하나의) 문장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생명을 유지해오고 있다. 아니,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하나의)문장은 살아있는 것이다.
기묘하고도 오묘한 이 무언가가 필자의 죽음 이후에도 무한으로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무한의 지속됨에 따라 무에 수렴되고 무라는 때아닌 진리를 만들어내고 구성해
낼 것인지는 운명의 신과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길 것이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주어+동사+술어의 구조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문장에서,
우리는 전술된 두 가지의 방법과 동시에 주어지는, 동사 또는 술어라는 두 가지 변수의
변화를 통해서(이하 두 가지의 실험적 작업),
또는 동사와 술어의 "동시적인" 양가적 변화를 통해서,
"무한반복됨" "무한됨" "(문장 생명력의) 거듭 태어남" 을 고찰해 볼 수가 있었다.
한 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전술된 두 가지의 실험적 작업과 변수를 통해서,
우리는 "무한한 탄생" 정도를 기대해 볼 수가 있었다.
동사나 술어라는 변수의 변화를 통해서는 우리가 기대한 바와 이의 표상을
얼마든지 꿈꿀 수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에서 정작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전술된 변수의 무한한 변화라는 방법은 동사 또는 술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해보고 싶은 것이다.
하나의 문장 즉, 주어+동사+술어의 구조에서 주어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가,
또는 변화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주어는 이 텍스트를 전개해야만 하는(당위적인), 또한 텍스트를 무한히 연장해 볼 수 있는(가능적인),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동사와 술어는 이 주어의 실존주의적 주체라는 존재에 의해서만 "무한한 탄생"을 꿈꿀 수가, 기대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주어는 그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가 없다.
주어는 "나"라는 실존적이고도 의식적인 자아에 의해서만,
실존적이고도 의식적인 주체에 의해서만 동사와 술어를 무수히 꿈꿀 수가 있는 것이다.
"주어는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은 주어인 것이다".
고로 나 자신은 대체될 수가, 나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가 나라는 주어의 자리를 대신 점령할 수가 없다.
오직 주어는 의식적인 나라는 행위주체로서만 존재하고 또 존재하는 것이다.
주어인 내가 폐기되는 순간, 주어+동사+술어의 구조라는 하나의 문장마저도 전부 폐기되고 마는 것이다.
나라는 주어는 무한을 뛰어넘고자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거니와 영원성과 항구성을 가질 수가 없는 불멸의 존재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했던 "무한한 탄생" 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디까지나 "꿈"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한 탄생"의 박살냄과 부숴짐에 따라 이 글을 읽는, 실망하는 독자가 제법 있을 것이라고 분명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 마라......
실망의 차선책으로 또는 유보책으로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 있다.
S->S" 와 같은 종의 연장과 무한함의 연장에 대한 인간의 동물적이면서도 도약적인
생명적 기질을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S"는 선대 또는 선조의 S의 기질 상당수를 전승해오고 있다.
따라서 후대 S"는 선대 S의 완전한 폐기, 말살과는 거리와 괴리가 존재한다.
나는 이 글의 마지막 부분으로 이토록 부르짖고 싶다.
"무한한 탄생"은 망상과도 같은 그 "꿈"에 지나는 것만은 더더욱 아닌 것이며,
S->S" 와 같은 인간의 종 그 특유의 고유성과 실존성으로 인해,
우리가 상실하고 싶지 않아했던, 망각하고 싶지 않아했던,
우리 주어 S의 자리는.........................
지금 이 순간은 물론 앞으로도 지속해서
주어 S로만 남겨져 있을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