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태어남으로써 새로 온 자, 지각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주도권을 쥐고 행위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인간의 조건>> P.275, 이진우 옮김, 도서출판 한길사)
유모차에 앉아있거나 엄마 품에 안겨 언어구사의 미숙함은커녕 언어구사Speaking ability 자체가
아직 채 되지도 않는 눈망울만 똘망똘망한 채 여기저기를 관찰하는 아기를 보라.
아기의 시선과 더 넓게는 아기의 오성에 지각되는 그 모든 것들은 아기에게 미처 다가오지 못했었던
새로운 세상의 지평이 열리는 셈이다.
아기에게는 아직 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인식만이 그나마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인식은 지각과 더불어 수많은 다발로 생성될 것이고 이는 지성으로
공고히 되기에 이르게 된다.
아기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움의 일상이자 연속이다.
연속은 여기서 그치거나 지체遲滯되지 않는다.
아기는 눈을 포함한 감각연관들로 인해-(또는 통하여) 자신의 세상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구성됨” 조차 완성형으로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미완성이다.
이것은 끝, 종결을 나타내지 않는 무한한 연속일 뿐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구성됨은 재배열 되어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은 아직은 미성숙한 아기의 주관으로써만 재배열의 과정을 거친다. 이제는 아기만의 세상이다. 아기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지평 위에 이름 모를
지상물地上物도 세워 두고, 자신만의 물감으로 색을 칠하기도 한다.
이때, 아기의 손에는 물감이 전혀 묻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아기의 가상적 주관에 내맡겨져 있는 가상의 시공간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사태를 가상이라고 너무 치부는 하지 말자.
이 가상은 아기의 바람대로 가상의 대부분은 실재화 될 것이다.
아기는 자신의 주관성 혹은 인식 내의 결함들을 하나 같이 인식과 지각을 하는 동시에 교정해 나갈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날로 확장되는 아기의 지성이라는 장막에 기인한다.
아기는 이제 매우 모범적인 경험론자가 된다.
성공과 실패, 심지어 좌절까지 맛보면서 아기는 이제 옳고 그름의 전문적인
감별사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아기는 여기서 그칠 줄을 모른다.
지성의 확장과의 동시에 아기는 이성을 추구하게 된다.
아기는 지각, 인식이라는 붓brush 대신 이제 이성이라는 붓을 힘 있게 부여잡게 된다.
완성되었던 줄 알았던 세상이라는 지평 위에서 드디어 그(아기)는 미완성을
보게 된다. 이러한 미완성이라는 작품이야 말로 아기 인생 최고의 걸작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토록 염원했던 걸작은 종국적으로는 미완성에 불과하다.
아기는 아직 많은 것을 모른다.
오직 미완성이라는 사태 자체에만 집중하고 집착한다.
아기는 고민을 한다.
자신의 미완성을 충족시켜주는 그 어떠한 풍요로운 질료나 재료적인 원천에 대해서 말이다.
아기는 마음이 그저 조급할 뿐이다.
황급히 그(아기) 조차도 풍요로움만을 갈구할 뿐,
정작 중요한 미완성 그 자체는 시야를 아기의 시야를 벗어난 지 오래다.
아기의 풍요로움을 갈구하는 조급함만 더욱 더 벅차 오를수록
아기를 질식시키는 것은 허구적인 기대에서 비롯된 그의 상상이라는 상상력
이라는 힘 혹은 능력과 허탈감이다. 허탈감은 이제 그(아기)에게 허무주의nihilism만을 안겨준다.
아기는 이때 난생 처음으로 심오한 고민에 빠진다.
이 고민에 대해 주관하고 심판하는 자는 당사자인 행위주체 아기,
만일 신神이 존재 한다면 그것은 아기와 더불어 신만이 전부일 것이다.
아기는 분명 고민 중이다.
자신의 걸작을 보존을 시킬지,
아니면 이 아까운 걸작마저도 모두 해체시키고, 분쇄시키고, 가능한 한
수많은 조각으로 파편화 시켜버릴지를........
물론 해체나 분쇄가 끝이 아니다. 아기는 이제 걸을 수 있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방식(두 다리로 인한)으로 걸음마를 할 줄 안다.
엄마에게 하나 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아기, 엄마의 눈에 넣어도 아프질 않을 그런 사랑스러운 아기는 난생 처음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아기의 딜레마dilemma, 즉 아기의 선택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 본인과 독자 여러분들은 아기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도 실재와 비실재 사이에서의 선택을 늘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기에
더욱 더 그러하다. 아기는 분명 시간이 지나면 여러분과 같은 성인이 되고 만다.
아기의 형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명 달라지고 달라지겠지만
주체의 동일성 내지는 정체성은 같다. 우리가 상상으로 해봄직한 아기가 성인의 그로 변모한 것이다.
달라진 것은 주체의 형상, 계곡의 물처럼 흐르는 시간뿐이다.
우리는 그저 같은 장소에 서 있기에 우리의 다리 사이에 새로 흘러 들어온
그때 그곳의 계곡물마저도 예전 그 당시의 그 물처럼 느낄 뿐이다.
다시 돌아온 주제: 자살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아기가 난관에 봉착되었었고, 성인이 돼서 또다시 난관에 봉착되었다.
그 아기는 자신의 생사여부가 달린 자살에 대해 고민을 하리라 상상이나 해봤을까?
우리의 잊혀지고 지워지기까지 했던 망각은 어느새 우리 곁으로 그렇게 돌아왔다.
먼 과거의 내가 아기였을 때와 여전히 이 삶이라는 심판을 주관하는 아직도 잘 알 수조차 없는
그때의 신神과 함께 말이다.
이 글의 부제-Requiem(레퀴엠)
-레퀴엠이라는 용어는 망자를 위한, 정확히 말하자면 망자의 영혼을 위한
미사곡이다. 수많은 레퀴엠이 존재하지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유명하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미완성작이다.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들과 함께
건강한 육체는 살아 움직이고 있지만
우리의 지각과 의식은 망자와 다름없는 오늘,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같이
우리의 미완성된 부분을 다 같이 채워나가길 바라며 이 글을 진정으로 독자들에게 헌정하는 바이다.
Requiem(레퀴엠)이 연주되며
제 아무리 저주 받은 사람에게도 마지막 선택권은 존재한다. 그것은 죽음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자살이다.
자살조차도 자신에게 선택권조차 없다면 실로 이것은 저주가 맞다.
이 엄중하고 고귀한 선택권조차 자의와는 박탈된 극소수층은 소수 존재한다.
이러한 불우한 사태에 대해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그 어떤 항변할 것이 마땅치 않다.
전술된 불우한, 지칭된 극소수층만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선택권은 존재하고 그것의 가치라는 것은 너무나 존귀하다 못해 독자적인 인간 생에의 마지막 카드(선택)로서만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