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이스커밍
1. 어떻게 날짜까지 세는지 신기하겠지만, 헬스장 출석 기계에서 남은 기간을 알려줘서 알고 있다. 고시원 첫날부터 헬스장도 등록했으니 40일이 조금 넘었다.
2. 아침 헬스장은 아저씨, 할아버지들의 모임 장소다. 신도시 아줌마들이 브런치 가게에서 모인다면, 공업지역 아재들은 헬스장에서 모인다. 몸 좋은 청년들에게는 넉살 좋게 운동을 물어보고, 서로 운동보다는 떠드는 시간이 많다. 그래도 보기 좋다. 저번에 140kg 레그 프레스를 하는데 김 사장 아니냐고 말 걸어서 큰일 날 뻔했다. 이런 것만 빼면 뭐 활기차서 좋다.
3. 처음 왔을 때는 아직 여름이 남아있었는데, 벌써 겨울이 오고 있다. 출퇴근 때는 무조건 롱 패딩을 입어야 한다.
4. 추워서인지 모기가 사라졌다. 물론 주방이 공용이라 음식물이 계속 있어서인지 주방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방이나 복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5. 그래서 그런지 나도 춥다. 일어나는 순간에는 떨면서 깬다. 깔깔이에 히트텍에 수면양말을 신고 자도 춥다. 바지를 두 겹 입어야 할지, 이불을 두꺼운 걸 챙겨야 할지 고민이다. 두꺼운 이불은 방안에 부피감을 차지하고, 바지 두 겹은 잘 때 불편하다. 그런데 이 1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부피감이나 디자인을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래도 두꺼운 이불을 당근 마켓에서 구해야겠다.
6. 건조기에 니트를 돌렸는데 기장이랑 어깨가 꽤 많이 줄어 쫄티가 됐다. 요즘 오버핏에서 슬림핏으로 유행이 변한다니 오히려 좋다. 건조기를 처음 써봐 편해서 세탁 시간은 줄이고, 건조기 시간만 최대로 늘려서 했는데 앞으로 웬만하면 자연 건조해야겠다. 버려도 될 법한 옷만 들고 왔지만 아깝다.
7. 회사에 다니면서 식비가 많이 줄었다. 사내 자체 간식도 있지만 여초 회사라 그런지 간식들을 많이 사 먹고, 입도 짧아서 나눠주신다. 그 덕분에 나는 저녁값을 아낄 수 있게 됐다. 그분들의 다이어트를 도와준다는 사명감으로 나도 거리낌 없이 잘 받아먹고 있다.
8. 회사 근처 기사식당에서 제육볶음, 불백을 먹은 지 15일 차다. 아직까지는 먹을만하다. 나도 내 한계가 궁금하다.
9. 궁금한 옷이 있어서 하나 주문했다가 반품했는데, 고시원이라 반품이 걱정이다. 새 박스가 아닌 건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잘 될까. 이번에도 송장이 늦게 나와서 이틀 동안 혹 버리신 건 아닐까 걱정했다. 아무래도 다음번에는 직접 편의점 택배로 보내야겠다.
10. 게이머가 돌아왔다. 보통 12시 전까지는 게임을 끝내는데 하루는 1시 넘어서까지 했다. 그 탓에 나도 잠을 못 잤는데 다행히 1시쯤에 끝내서 다행이었다. 층간소음도 아니고, 이런 소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11. 닭가슴살 소시지가 8일 만에 20개가 사라졌다. 의심하는 걸로 신경 쓰는 게 싫어서 굳이 안 세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양이 너무 적어서 세봤다. 30개를 주문했는데 9개가 남았다. 하루에 2개씩 먹어도 5개가 남는데, 무엇보다 내가 하루에 2개씩 먹지 않았다. 닭가슴살 팩은 소스도 있고 귀찮아서 잘 안 훔쳐먹은 거 같은데 소시지 같은 건 편하니 막 빼먹나 보다. 앞으로 그냥 가루형 단백질만 먹으려고 한다.
48일차
1. 별 다른 일 없는 날들이었다. 늘 회사에 가고 늘 운동을 했다. 가끔은 서울구경을 했는데, 고시원에 살기 전에도 했던 것들이라 크게 적을만한 거까진 없다.
2. 추워졌다. 최근 일주일새 급격하게 추워져 여름이불로는 버티지 못하게 됐다. 난방이라고는 나오지 않는데, 내복을 두 개 껴입고 자고 있다. 이불도 본가에서 조금 두꺼운 결로 바꾸었다.
3. 큰일이라고 하면 중간에 경찰이 고시원에 왔던 건데, 무전기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던 날이 있다. 의경을 해서 그런지 경찰에 대한 큰 두려움은 없고, 큰 사건도 아닐 거 같아 책 읽으면서 경찰이 왔나 보구나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잠깐 나가봤어야 브런치 소재가 나왔을 텐데.
4. 빨래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건조기를 돌려 쫄티가 된 니트가 사라졌고, 양말이 한 짝씩 사라지고 있다. 아마 옥상에 말리면서 날아가거나 누가 착각해 가져 가는 게 아닐까 싶다.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양말과 속옷을 싼 값에 여러 개 구비해둬 신경을 덜 쓰는 쪽으로 돌리고 있다.
5. 운동 습관을 좀 바꾸었다. 씻으려고 아침저녁 헬스장에 가고 있는데 혹독하게 아침저녁을 운동하니 열심히 한 느낌은 들었지만 고생한 대비 큰 효과는 없는 거 같았다. 그리고 아침에 너무 열심히 하면 오전에 피곤할 때도 있어 의문이 들기도 했다. 친구들과 카톡으로 이야기하니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하는 건 혹사지 운동이 아니라고 했다. 유튜브에서도 찾아보니 휴식이 중요하다 해서 운동시간의 10~20분 정도는 유산소로 바꾸었다. 아침에는 공장 사장인지 아저씨들이 많아 기구 이용하기도 힘들고, 생각 없이 뛰는 시간을 곁들이니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6. 자취의 장점 중 하나는 내 습관을 바꿀 수 있다는 거다. 예전에 형과 자취했을 때도, 수면습관을 이것저것 실험해봤다. 동의보감을 보고 생체리듬을 좀 맞춰보고자 새벽 5시까지 깨어있고 12시까지 자는 걸 실험해봤다. 조용한 밤에 글 쓰는 건 지금의 브런치를 쌓아오는데 큰 도움이 됐다. 당시 새벽에 카페 마감 아르바이트를 했어서, 씻고 3시간 정도 더 글을 쓰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대신 학교에서 오전 수업이 있는 날은 미칠 듯이 피곤했다. 회사에 다니는 지금은 더 어렵겠지.
밥도 냉동 볶음밥에 냉동 컬리플라워를 먹는 걸로 바꾸었다. 친구들이 말하는 걸 듣고 구매해봤는데 칼로리도 낮고 포만감도 제대로 주어서 꽤 괜찮다.
7. 또 다른 습관 이야기. 원래는 아침에 일어나서 1시간 정도 운동하고 회사에 갔다. 지금은 아까 적었던 것처럼 유산소를 더하고 운동시간도 40분 정도로 줄였다. 대신 아침에 10분을 업무와 관련된 책 읽는 시간으로 바꾸었다. 아침에 정신이 가장 멀쩡할 때 바로 운동하러 가는 게 조금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꽤 잘 바꾼 습관이다. 운동 후 리프레쉬된 기분으로 회사에 가는 것도 좋지만, 아침에 조금 더 무언가를 읽고 약간 피곤한 상태를 리프레쉬한 후 회사에 가는 것도 좋은 선택 같다.
7-2. 시간을 넉넉하게 가져야겠다. 업무에 도움이 될 거 같은 전시가 있어 가려고 했는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처음에는 전시 시간을 공간 운영시간과 헷갈려 허탕을 쳤고, 두 번째는 1분 정도 늦었다고 못 들어갔다. 평소에 애매하게 시간이 뜨는 걸 싫어해 영화도 거의 딱 맞춰 들어가고 비행기도 1시간 정도 여유만 가지고 이용했는데 이번에 큰 코 다쳐서 차라리 애매하게 빈 시간을 뜨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쓰는 방법은 전에 쓴 글들을 다시 보거나, 글 소재를 생각하는 거다. 나쁘지 않다.
8.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죽어도 나는 열심히 살아서 후회가 없을 거 같다고 했다. 말하고 조금 민망하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인정받고 싶었던 거 같다. 이렇게 기록하지 않으면, 책을 읽고, 운동하고, 출근하고, 점심 먹고 책을 읽고, 도서관에 가고, 운동하고, 책을 읽는 이런 삶을 아무도 몰라주었을 테니까. 대학교 친구들이 바디 프로필이라고 사진을 찍었다. 한 명은 대학원생이라 유산소를 2시간 하면서 논문을 봤다고 한다. 이렇게 6개월 1년 3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 죽어도 후회가 없다니. 참 교만하다. 자신감은 가지되 교만해지지는 말아야겠다.
9.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있었다. 그다음 날도 나는 헬스장에 갔는데, 예전에도 글에 적었는데 여기 헬스장에 몸 좋은 외국인이 있다. 한 달 전만 해도 혼자 조용히 운동했는데, 지금은 아저씨들이 말을 걸어 짬짬이 운동을 가르쳐주는 듯하다. 이 날은 한 아저씨가 이 외국인에게 이태원 안 갔었냐며 말을 거는데, 외국인이 "저 늙어서 그런 데 못 가요" 답하면서 서로 허허 웃었다. 다들 힘든 와중에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