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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도연 Apr 11. 2021

졸라 좋겠다, 가 덮친 오후

어느 취준생들의 몽상

침몰하는 태양을 뒤로한 채 노 군과 나는 금연 중인 채 군을 꼬드겨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는 우리의 시든 폐와 뇌의 통풍구 마디마디를 거쳐 나와,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곰팡이 슨 소파에 잠겨 연기를 바라보던 우리는 오늘의 숨통이 끊어져 가는 것을 예감했다. 과실 자욱한 담배 연기는 그 날 우리의 유언이자 서로에 대한 추모의 표식이었다. 과실에는 오직 死학년과 사학년의 표정을 한 후배와, 사학년을 넘겼으면서도 유령처럼 위이위이 떠도는 졸업생만 머물고 있었다.


과실 앞을 지나치는 새내기들은 마치 신세계의 혁명을 외치듯 ‘안녕하세요’를 발랄하게 날렸지만, 혁명 가운데서도 뒷방 늙은이들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듯 섣불리 과실 안으로 들어서지는 않았다.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했던  사학년의 표정을 한 삼학년 학우였다. 그녀는 어젯밤 남자친구가 방에 몰래 장미와 편지를 놓고 갔다고 고백다. 그러자 과실 구석에서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며 뒤적이던 사학년 김 양이 일말의 시기도 담겨있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투욱 내뱉었다. "졸라 좋겠다―"


그 ‘졸라 좋겠다―’가 조용히 과실 밖으로 사라져 주기만 했어도, 그날 우리의 저녁은 평범했을 것이다. 김 양의 ‘졸라 좋겠다―’가 흡연 중인 우리에게 다가오고 만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김 양이 무심하게 내뱉은 그것을 보며 낄낄거렸다. 그것은 한참을 어찌할 바를 몰라 서성거리다가 이내 소파 깊숙이 함몰된 우리 쪽으로 꿈틀대며 기어 왔다. 우리는 뒤늦게 의도를 파악하고 제지에 나섰지만, 이미 그것은 사학년의 굼뜬 몸을 뒤로 하고 매캐한 담배 연기에 휘말려 떠올랐다. ‘졸라 좋겠다―’의 자살이었다.


과실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눈앞에서 ‘졸라 좋겠다―’의 죽음을 목격한 우리는 당황했다. 죽음도 죽음이거니와 그것을 빨아올린 담배 연기는 다름 아닌 우리의 유언이었지 않은가. 우리는 매일의 죽음 앞에서 늘 ‘졸라 좋겠다―’를 내뱉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엄한 깨달음의 순간에 또 한 명의 수줍은 새내기가 과실을 지나치다가 ‘안녕하(세요)’를 던졌다. 음침한 과실 분위기에 순간 멈칫했음이 분명했다. 그는 곧 몸의 일부가 괄호에 묶인 ‘안녕하세요’와 함께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낯설었을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욕망의 대상이 되 이따금 그런 반응을 보이듯, 그는 자신이 우리의 폭로된 ‘졸라 좋겠다―’의 대상임을 직감하고 문득 소름이 돋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과실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나간 시절의 그 무엇을 그토록 되찾고 싶어 하는지 다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무료한 오후를 보내며 가래 끓는 한숨을 내쉬고, 깊은 밤 흐르는 콧물을 훔치며 소주를 마시고, 예전의 소설을 읽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것 따위는 지난 시절 삶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었다.


그 날 저녁 우리는 과실에서 우리를 대속하여 죽은 ‘졸라 좋겠다―’를 위하여 소주병을 땄다. 담배를 물고 있던 나와 노 군, 채 군이 상주가 됐다. 정작 ‘졸라 좋겠다―’를 내뱉은 김 양은 애써 태연한 척 딸기를 먹는다며 나갔다 왔지만, 실은 어디선가 눈물을 훔치고 왔는지도 모른다. 채 군은 우리를 달래기 위해 ‘흘러간 가요 대백과’를 찾으러 갔지만, 돌아온 그의 손에는 ‘N세대 댄스가요’가 들려져 있었다.


더 침울해진 우리의 자살을 우려해 노 군은 인삼주를 미끼로 모두를 방으로 불렀다. 그렇게 취해 잠든 새벽, 김 양은 여고생 귀신이 나타났다며 소리쳤고, 놀라 깬 나는 더 큰 괴성을 터뜨렸으며, 때맞춰 울리는 채 군의 무시무시한 기상 알람 비트에 맞춰 노 군은 폭주하듯 코를 골았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여고생 귀신은 야속하게도 양기 음기라는 되지도 않는 함수 놀음 따위를 핑계로 남학생들에게는 그림자조차 비쳐주지 않았으니, 아아― 사학년의 슬픔이여, 우리들의 우울한 하루는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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