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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구봉선
Oct 15. 2024
200년 된 집.
"그 동네 한해의 운을 보려고 하면 할머니의 신수를 보고 동네 운을 결정한다."
할머니는 그 지역 터줏대감이다.
아름아름 옆집은 삼촌 동생이고, 뒷집은 동서네 집이고, 당산나무를 지나면 막내딸 집이고, 또랑을 하나 넘으면 조카네 집이고... 예전엔 동생이 결혼하면 옆집으로 분가를 시켰고 논, 밭도 주며 가정을 이루며 살라고 어른들은 그렇게 한 동네에 부락을 이루며 사셨다.
외할머니도 예외는 아니다.
형님, 동서, 조카를 어우르며 한집 걸러 가족이었다.
할머니 집은 도로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바로 있는데 논이 많아 시야는 넓었다.
앞마당도 넓어 마루에 앉아 바로 보면 하늘과 논이 맞닿아 있는 거처럼 시원시원했다.
그 마당 앞 마루는 할머니의 자리였다.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작은동서를 맞이하고 자식들을 맞이하며 동네의 이웃을 관찰했다.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마루에 앉아 있으면 할머니 동서는
"형님 일어났소?" 하며 자연스럽게 할머니 옆자리에 앉으셨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뉘엿해가지려면 자신의 집으로
"형님 저 가요."를 외치며 가셨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어김없이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시골은 부지런해야 한다.
할 일도 많아 이것 끝내놓으면 다음걸 해야 하듯이 겨울 끝부터 다음 해 가을 끝까지는 쉬지 못하고 일을 한다.
잠시 타이밍을 놓치면 1년 농사가 끝나버릴 수 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할머니를 뵈려 1년에 2~3번 내려갔다.
9남매가 모이면 북적 북적 잔치가 된다. 할머니가 주무시는 방에 앉아 그간 못 나눈 이야기를 하고, 옛이야기를 한다.
일제시대, 6.25를 넘기신 분이라 그 모진 세월 힘드시게 살아오셨다. 그래서 들을 이야기가 많았다.
남편이라고 이해심 많기를 하나 시집와 자식 아홉을 낳으면서도 농사일에, 자식 키우며 힘드시게 살아오신 세월 얼마나 많은 이야기 보따리가 있겠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자식 아홉에 그 짝까지 맞이했으니 어디 좋은 일만 있을까.
하나, 둘 짝지어 분가를 시키니 남는 건 남편이었다.
젊어서는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살았는데 나이가 드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이판 사판 소리도 지르시고, 욕도 하셨다.
옆에 사는 자식 아들, 딸들이 내다 보고 소소한 일거리도 주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셨다.
어느 날 마루에 앉아 밭일을 나간 자식을 기다리다 내가 할머니께 물어봤다.
"할머니 자식 중 누가 제일 걱정돼?"
"그런 게 어딨냐. 다 걱정이지."
"그래도 제일 아픈 손가락이 있지."
"........ 셋째."
셋째 삼촌은 젊어서 오토바이를 타다 넘어지셨는데 파상풍으로 죽는다고 병원에서도 퇴원하라 했는데 기어이 살린다고 그 작은 할머니는 커다란 삼촌을 짊어지고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아 치료를 해 완쾌시켰다고 한다.
그래도 40년이 더 된 일인데도 제일 걱정인 건 셋째 삼촌이다.
힘들게 키웠더니 나이 들어 그 자식들이 용돈을 준다.
또 그 자식의 자식이 용돈을 준다.
하지만, 그 용돈은 다시 자식의 자식에게 또 그 자식에게 간다.
"아나. 아가 이걸루 까까 사 먹어라."
장손에게, 그 자식에게 돈을 그렇게 주셨다.
"할머니 왜 그렇게 장손. 장손해? 그러면 다른 손자, 손녀들이 서운해해."
"그놈이 내 제삿밥 차려줄 거 아니냐."
"차려 줄질 안 차려 줄지 그걸 어떻게 알아?"
"안 차려 주면 그만이고, "
장손과 그 장손의 자식에게 한량없던 할머니께 한번 물어봤더니 자신의 제삿밥을 줄 새끼니 그런다고 하셨다.
미리 주는 밥값과 같았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제사는 없어졌다.
"내가 어찌 이렇게 안 죽는지 모르겠다."
할머니 생일날 엄마와 할머니 댁으로 갔더니 큰 딸인 엄마를 붙잡고 할머니는 손수건에 눈물을 찍으시며 얘기하셨다.
90을 넘기시니 불안해하셨다. 이렇게 살아서 자식 고생시키고 죽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90에도 tv에 나오는 자막을 안경도 없이 읽으셨고, 뉴스 앵커의 말도 들려 대화를 하듯이 말씀하셨다.
평생 병원입원이라고는 70이 넘어서 대상포진이 눈 쪽으로 와서 그때 병원에 입원하셨던 게 전부였다.
건강하게 90을 넘기신 할머니.
"머리가 아프다."
엄마와 할머니의 통화에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고 연신 말씀하셨다.
"언니, 어머니가 욕실에서 넘어지셨대요."
셋째 숙모는 엄마에게 할머니가 욕실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고 연락을 했다.
연세가 문제였을까... 상태는
급격히
안 좋아졌다.
자식들은 병원 1인실에서 돌아가며 할머니를 간병했다.
누워계셨어도 사람말 다 알아듣던 할머니는 3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92살.
남들은 오래 살았으니 '호상'이네 하지만,
사람의 죽음에 '호상'이 어디 있나.
자신의 손으로 밥 먹고, 걸어 다니며, 화장실 가고 다 하셨던 분인데...
장례식은 장례식장에서 했다.
염을 하는데 시골이라 그런지 처음부터 그 모습을 다 지켜보게 했다.
이 세상 마지막 가는 길 미리 장만했던 수의를 입으며 자식과 또 그 자식의 자식들은 절을 받으셨다.
할아버지가 계시는 곳으로 할머니를 실은 차는 서서히 움직였다.
할머니가 계신 버스 뒷좌석에 앉은 엄마는 장지로 가는 길목에서 할머니 관에 손을 얻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할머니의 죽음을 엄마는 어떻게 받아들이셨을까...
19살에 시집와 자식을 키우다 보니 큰딸은 친구였다. 할 말 못할 말 다 했던 친구.
언제 가도 반겨주던 어머니,
"아야. 저 놈좀 혼내줘라."
벼르고 있다 큰딸이 오면 일러 혼을 내라고 말씀하셨던 어머니.
그렇게 고향을 찾아오고 싶어도 먹고사는 게 힘들어 자주 못 봤던 어머니.
이제 먹고살만해서 몇 번 오니 돌아가신 어머니.
게반찬, 토하젓, 갈비를 큰 반찬통에 꽉 차게 해 가면 온 동네 자식, 친척들 불러 잔치를 하고, 그 모습을 방에서 가만히 보고 웃던 어머니.
"니 이제 가면 내가 또 볼 수 있을까?"
할머니는 엄마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엄마. 내가 또 올게요. 건강하게만 있어."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엄마도 우셨다. 아니 거기 계셨던 이모들, 숙모들도 우셨다.
그 마지막을 직감했듯이 그 해 할머니 생일이 마지막이었다.
할머니는 그 마을의 당산나무처럼, 마당 있는 마루에서 앉아 마을을 내다보셨다.
동네사람 누가 나가는지, 누가 들어오는지,
온다는 자식을 그 자리에서 기다리셨다.
작은 몸집의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계시면 그 집이 꽉 차 보였고,
주인 잃은 마루는 외로워 보였다.
할머니의 자리에 누가 와서 앉아도 주인을 잃은 마루는 빛을 내지 못한다.
맞는 자리가 있듯이 할머니의 자리는 언제나 그 마루였다.
작고 마른 할머니는 요구르트를 좋아하셨다.
"할머니 그게 그렇게 맛있어?"
"밥 먹고 이걸 꼭 먹어야 해."
"왜?"
"니도 내 나이 돼 봐라. 나이 먹으며 기능이 잘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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