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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봉선 Oct 01. 2024

"배가 딱딱해."

 




"배가 딱딱해."

"배가 왜요?"

"여기 이렇게 만지면 딱딱해."

"병원 가보셨어요?"

"병원 갔더니 큰 병원 가보래."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가 병원 갔다 오신 얘길 하셨다.

"의사가 큰 병원 가보래요?"

"어."

"어디가 뭐가 만져져요?"

"배 요기 요기가..."


"어머니 병원 모시고 갔더니 간암이시래요."

"뭐?"

머리가 띵 했다.

갑자기 무슨 간암?

"의사가 6개월 정도 사실 거라고 얘기하세요."

시댁 근처에 사는 동서가 어머니를 모시고 큰 병원 갔더니 간암 말기라고 했다.


"어머니 병원 갔다 오셨어요? 고생하셨어요. 저녁에 신랑이랑 같이 갈게요.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없으세요?"

"녹두죽"

"녹두죽이요?"

"음. 그게 그렇게 생각이 난다."

"알겠어요. 녹두죽 끓여 갈게요."

저녁에 식구들 모여 어머니에 대해 의논하자고 모인 약속을 잡고 부랴 부랴 녹두를 갈아 끓이기 시작했다.

딱딱한 녹두를 불려 놔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계속 끓이고 끓여 보온병에 갖고 갔다.

저녁에 퇴근한 신랑 얼굴을 보자 눈물부터 났다.

"어머니 어떻게 해..."

"..............,............."

신랑은 아무 말 없었고, 우린 그렇게 시댁으로 갔다.


"아휴... 이 녹두죽이 얼마나 먹고 싶던지."

"그럼 병원에서 드시지 그러셨어요."

"생각이 않는데, 다른 사람이 먹는 거 보니까 먹고 싶더라."


그저 건강 검진 하러 갔다 오신 줄만 아시는 어머니는 해맑게 웃으시며 녹두죽을 드셨다.


식구들은 어머니가 알면 충격 먹는다고 병명을 숨기자고 했다.

하지만, 본인은? 본인의 의사는? 알 권리는?

자식들이 그렇다고 하니 따라갈 수밖에....


처음엔 별 증상은 없으시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니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피를 토하시고 혈변을 보시고 그렇게 입원, 퇴원을 반복하고 복수도 차 오르기 시작했다.


병원 입원 때였다.

"어니 우리 위에 정원가요."

병원건물에 위치한 작은 정원은 나무와 쉴 곳이 있었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일어났다.


"내가 이깟 병 못 이기겠어!"

"네?"

어머니는 환자복을 입으시고 그곳을 열심히 걸으셨다. 한 바퀴, 두 바퀴... 그렇게 운동하듯이 걷던 어머니...



"어머니 뭐 하세요?"

"어휴... 내가... 지금... 김치를 담는데, "

"아니 무슨 김치요?"

"그 김 씨가 배추를 몇 포기 갖다 줬는데 그냥 두면 아깝잖니 그래서 김치 좀 담그려고 하는데 힘들어서. 좀 누워 있었어."

얼마 전 퇴원하셔서 집에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분이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복수가 조금 찼는데 친하게 지내시던 분이 배추 몇 포기를 갖다 줘 그대로 두면 썩는다고 그 몸에 김치를 담그고 계셨던 거댜.



"내가 시집왔더니 니 시아버지는 군대를 갔지 뭐냐."

"아니 새색시를 두고 군대를 갔다고요? 어머니 그 집에 혼자 두고?"

"그래. 얼마나 시집살이를 했던지."

"에구. 너무 했네."

"근데 니 시아버지가 제대를 하고 집에 오니 내가 얼마나 이쁘겠니 옆에만 앉아도 시어머니가 이렇게 노려보고 했다."

간병을 한다고 해도 밤에 잠을 못 자니 그렇게 침대옆 간이침대에 앉아있으면 어머니는 고된 시집살이를 얘기하셨다.

"어느 날은 일하고 들어오면 두 노인이 온 방안에 똥칠을 하고 나를 보자마자 욕을 하는 거야. '이년밥 내놔'하고 말이야. 그럼 다 치고 밥을 얼른 하는데 눈물이 어찌나 나는지."

시할아버지 시할머니는 치매에 뇌졸중이셨다. 그때는 요양원이 없어 집에서 두 분을 어머니는 모셔야 했고, 낮에 일하고 밤에는 그렇게 시할아버지, 할머니를 돌보셔야 했다.



그날도 병원으로 갔다.

아버님과 교대로 번갈아 가며 어머니 간병을 했던지라 내가 가야 아버님이 집에서 좀 주무실 수 있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어머니는 침대옆에 있는 창밖을 바라봤다.

"뭐 좀 드셨어요?"

"...................."

"뭘 그렇게 보세요?"

"이 좋은 세상 조금 더 살았으면...."


그 말에 나는 할 말이 잃었다.

자신의 죽음을 조금씩 느끼셔서 일까? 처연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조금만 더 살았으면' 하고 염원을 하고 있으셨던 어머니.



"어머니 내일 찾아뵐게요.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오이랑 방울토마토."

"에유 그게 드시고 싶으셨어요? 내일 갖고 갈게요."


어머니는 병원에선 더 이상 해줄 게 없다며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해 시댁 근처 요양병원에 모셨다.

오이를 강판에 갈고 토마토도 작게 갈라 통에 담아 병원으로 갔다.

조용히 누워계시는 어머니를 일으켜 간 오이를 드시게 하고 신랑에게 전신 마사지를 하라고 했다.

조심스럽게 어머니를 주렀을때,

"그거 줘."

"네? 뭐요?"

"아~~ 그거! 옷 갖고 오라고."

절대 짜증스럽게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갑자기 짜증 나서 옷을 달라고 했다.

주위를 보니 침대 한켠에 진달래색 가디건이 있었다.

"어머니 이거요?"

"음..."

가디건을 누워계신 어머니 위로 덮어드렸다.

그 가디건은 내가 사다 준 옷이었다.


"아니 어쩜 넌 뭘 사다 줘도 이렇게 이쁜 것만 사니, 옷도 딱 맞아. 아버님 옷도 그렇고."

옷을 사다 드리면 항상 하던 말씀이시다.

진달래색 가디건을 그렇게 좋아하셨는지도 잘 몰랐는데 누워계시면서도 그걸 찾고 계셨다.

머리도 빗겨 드리니 저녁이 나왔다.

"어머니 좋아하는 된장국이 나왔어요. 조금만 드세요."

"아니. 아니."

손사례를 치는 어머니를 일으켜 앉게 하고 국에 밥을 말아 조금이라도 드시게 했다.

"어머니 다섯 숟가락만 드세요. 그래야 기운이 나시죠."

겨우 겨우 받아 드시곤 다시 누우셨다.

저녁에 영양제 하나만 놔 달라고 간호사 선생님께 말을 했다.

"어머니 영양제 놔달라고 했어요. 그거 맞고 좀 기운 차리세요. 담에 또 올게요."

고개를 끄덕이신 어머니.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식구들 모이란다."

아침 8시 아버님의 전화였다.

어제 뵙고 왔는데. 어제는 괜찮으셨는데, 어제 밥도 드시고 영양제도 맞고 하셨는데,

정신없이 신랑이랑 병원으로 갔다.

이미 어머니는 눈에 흰 막이 생기셨고, 힘들게 숨을 쉬고 계셨다.

아버님은 더 이상의 연명은 하지 않겠다고 했고, 어머니는 그렇게 작은 방으로 모셔졌다.

방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뵈니 눈물부터 났다.

"어머니 어제는 괜찮으셨잖아요. 왜 이렇게 누워계세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손을 잡으니 어머니가 힘겨운 입을 움직이셨다.

"네?"

"울.... 지.... 마.... 라..... 괜..... 찮아."

그렇게 한 자 한 자 숨을 내쉬며 내게 했던 말이다...

그 말은 내게 했던 마지막 말씀이 됐다.


정말 의사 선생님 말씀처럼 딱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성정 좋으셨던 어머니.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못하셨던 어머니.

시할아버지, 할머니를 집에서 정성껏 모시셨던 어머니.

병상에서 말씀하셨던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자식을 못 보고 가신 어머니.


자식은 부모의 죽음은 죄책감으로 온다.

좀 더 잘해드릴걸.

좀 더 좋은 곳 여행도 같이할걸.

좀 더 맛있는 곳 모시고 갈걸.


좀 더 옆에 있을걸....



13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많은 것이 가슴에 자리 잡는다.


'이 좋은 세상 조금만 더 살다 죽었으면'

그 말씀은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어떤 이에게는 지옥 같은 세상이겠지만,

어머니에게는 조금만 더 살았으면 하는 세상이었다.




'남은 사람이 뭐가 불쌍해.

죽은 사람이 불쌍하지.'


맞는 말이다.

남은 사람은 시간으로 그 사람을 서서히 잊어간다.

지금도 생각한다.

어머니의 바램처럼 조금만 더 사셨으면...

어릴적 시댁으로 시집와 자식을 낳고 살면서도 치매에 뇌졸증걸린 시부모님을 모시고 일하며 열심히 사셨을 어머니를 그리면 항상 따라오는 생각이 있다.



"어머니 세대의 어머님들은 다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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