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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봉선 Sep 28. 2024

아침 일찍 울리는 전화벨 소리 2.

 






"0 서방!!!  0 서방 어디 갔어?"

언니네 친정엄마는 연신 오빠를 찾았다.

농사짓는 분이시라 급하게 올라오셨는지 검게 탄 얼굴에 곡소리도 크게 못 내시고 눈물을 훔치며 오빠를 찾아 탓을 했다.


"잘 좀 하지. 어떻게 해서 쟤가 저렇게 죽어. 자네는 왜 이렇게 멀쩡하고."

자신의 딸은 죽었는데 오빠를 멀쩡히 살아있는 것에 원망하듯 오빠의 어깨를 때리고 있었다.

오빠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야?"

큰 오빠라는 분이 오빠에게 화가 난 듯이 물었다.

그렇게 온 가족이 오빠에게 따지듯이 화를 내고, 오빠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모습에 화가 났다.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혼을 내든지 화를 내든지 해야지. 큰 올케한테 전화할 때는 남 일인 듯 태연스럽게 받아놓고는 저리 장례식 와서 보란 듯이 소리 지르는 모습에 화가 났다.


"혼자 차 타고 가다 사고 난 거예요."

가족이 죽어 슬픈 건 알겠는데 추궁하듯이 오빠를 대하는 모습에 내가 나섰다.

언니네 가족은 나를 봤고,

"언니가 오빠 데려다준다고 오빠 내려주고 혼자 집으로 가다가 사고 난 거예요."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럼 혼자 타고 가다 그런 거야? 아이고. 왜 운전을 해서는..."

울음소리에 장례식 한켠에 마련된 방에서 1살 손녀 밥을 먹이던 엄마가 조카들을 데리고 나왔다.

"오셨어요."

"사돈. 아이고, 우리 딸이 뭣 때문에 죽어요."


딸을 잃은 슬픔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울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는 사돈어르신께 누구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영정사진에 쓸 사진이 필요해 사촌 오빠랑 고모랑 오빠 집으로 갔다.

눈물을 훔치며 이리저리 사진을 찾았다. 앨범을 뒤져도 아이들 사진뿐 영정사진에 쓸 사진을 찾지 못했다.

"큰일 났네. 어떻게 하냐. 아니 무슨 사진 한 장 없어."

그때 장식장 옆에 돌돌 말린 종이가 보였다. 꺼내 펼치니 1살배기 조카가 태어나기 전 찍은 오빠네 가족사진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언니.

또렷하게 나와 이것으로 쓰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영정사진에 웃는 모습을 써도 괜찮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사진을 찾을 수 없어 그걸 가지고 장례식장 사무실로 갔다.


"이것도 괜찮을까요? 아무리 찾아도 사진을 찾을 수가 없어서요."

"웃고 있는 사진이네요."

"웃고 있는 것도 할 수 있나요?"

"괜찮을 거 같아요. 우는 것보다는 웃는 모습이 좋죠."


그렇게 웃는 사진은 영정사진으로 액자에 껴졌다.

그 영정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다시 한번 울음이 터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웃는 모습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가는 길에 이쁘게, 이쁜 모습을 보여 주니 사람들 머릿속에는 그 사진의 미소를 기억할 것이 아닌가.



"사자 없는 죽음."

엄마는 그랬다. 갑자기 죽은 죽음은 '사자 없는 죽음'이라고.

아침에 봤다 단 몇 시간 만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게 되어버린 아내에게 오빠는 아무 말하지 못하고 그저 영정 사진만을 바라봤다.

고맙게도 많은 분들이 왔고, 많은 화환에 들어올 자리가 없어 장례식 나가는 층계에 리본만 걸었다.

병원관계자는 돌아가신 분이 누구냐고 물어볼 정도로 북적북적했다.

그 모습에 사돈 어르신은

"0 서방이 좋은 사람이라 이 많은 분들이 오시는 깝다. 외롭게 가지 않는구나."



"니들이라도 상복을 입어."

"엄마. 올케 시누인데 상복을 입어?"

"애들이 어리잖니. 그래도 니들이라도 상복을 입어라."

엄마는 언니와 나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했다.

상복을 입고, 안경을 쓰고서 머리도 못 감고 난 열심히 음식을 날랐다.




"아. 이렇게 가다가 혼자 여기에 박았나 보네."


올케 언니 오빠들은 사고 현장으로 가보자고 했고, 나도 따라갔다.

그곳은 전신주가 부러져 있었다.

큰 도로 코너를 돌 때 전신주를 박아 사고가 났다고 했다.

운전 미숙이였다.

그 광경에 언니 오빠들도 더 이상 사고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사돈 아니 무슨 꿈도 않꾸셨어요? 이렇게 갑자스럽게 며느리가 죽을게 아니잖아요. 꿈에서라도 무슨 꿈을 꿨으면 조심하라고나 하지..."

"꿈에 까마귀 떼가 하늘을 날았어요."

언니의 아버지, 사돈 어르신은 죽기 전날 하늘에 검정 까마귀 떼가 날아가길래 무슨 일이 있을려나 했다고 했다.


조카들은 껌딱지처럼 엄마한테 떨어지지 않았다.

1살 손녀는 업고 다니고, 6살 손녀는 손 잡고 다니며 엄마는 힘든 기색도 내지 않았다.

힘들 거 같아 1살 조카를 내가 업으려 하며 울고 불고 난리였다.

그때부터 엄마와 25년을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난 절대 못 키워요."


마지막날 사돈은 엄마랑 대화하다 갑자기 큰소리를 냈다.


"저 어린것을 두고 어떻게 그렇게 갔을까요? 저 어린것들이 눈에 어른 거려서 어떻게 갔을까요?"

그 소리에 언니 엄마는 손치레를 치며 못 키운다고 못을 박았다.

"키워달라고 하지도 않아요!"

그 소리에 엄마도 같이 언성이 높아졌다.

엄마의 말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우리 애들 내가 키워요."

엄마는 쐐기를 박듯이 얘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어린것들을 맡길까 그랬을까. 장례식장에서 저런 소리를...

그래서였을까?

장례식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나 언니네 큰 올케, 작은 올케가 오빠한테 전화를 했단다.


아가씨 얘기를 하면 어머님이 눈물 바람 하니깐 그냥 전화하지 말고 연끊자고.


딸의 자식이 둘이나 살아 있는데 연 끊자는 소리가 어떻게 나올까...

그렇게 조카들은 그때부터 외갓집을 모르고 살았다.


장례식을 마치고 오빠는 엄마집으로 왔다.

곤히 자고 있는 오빠를 보니 정말 막막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정신없이 장례식을 치르기는 했지만,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틀뒤 아빠 엄마와 함께 오빠집으로 가기로 했다. 중요한 것과 오빠 옷을 조금 챙겨 와야 했다.

근데 왜 그리 무서움이 드는 걸까.

난 큰 염주를 목에 두르고, 집에 있던 금강경을 배에 붙이고 갔다.

아파트 주차장부터 주문처럼 불경을 외우고, 집으로 갔다.

난 이렇게 무서움이 드는데 엄마 아빠는 거리낌 없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1살 손녀를 업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엄마는 또 통곡을 하셨다.


"이게 이게 지 돌아올 줄 알고, 물 끓여 놓고, 빨래해놓고 갔어. 아이고. 며느리야."


베란다에 걸어놓은 빨래며, 가스레인지에 큰 주전자에는 물이 끓여 있었다.

하나하나를 보며 엄마는 정리를 하기 시작하셨다.

"이렇게 갑자기 가면 어떻게 하니. 니 새끼들을 두고 어찌 눈을 감았어."

엄마는 울면서 빨래를 개고, 냉장고에서 버릴 음식, 갖고 갈 음식을 분리했다.

장롱에 오빠 옷을 담으며, 남겨져 있을 언니 옷을 보며 우셨다.



그렇게 서서히 정리를 했고, 오빠 살림은 엄마네 집 근처에 집을 얻어 갖다 놓고 오빠는 현장에 있기로 했다.



젊은 영혼 불쌍하다며,

엄마는 최고급 관에 최고급 수의를 했다.

49제를 했고, 천도재까지 엄마는 정성을 다했다.

갑작스럽게 맡게 된 아이들이지만, 엄마는 힘든 기색 하지 않고, 그렇게 1살 6살 손녀들과의 동거가 시작됐다.

황혼 육아를 그렇게 엄마는 25년 전부터 하고 계셨다.

그때 엄마는 가계를 하고  계셨다.

아침에 아빠가 공사를 맡고 나가시면 애들을 씻기고 밥 먹이고, 유치원, 유아원으로 보내고 가계를 가 장사를 하시고, 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시간에 맞춰 학원을 보내고, 5시가 되면 시장을 봐 아이들과 집으로 가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기를 하셨다.

그리고 늦은 저녁이면 자고 있는 아이들이 불쌍해 눈물을 흘리셨다.


엄마 없다고 놀림을 받을까 항상 눈을 치켜들고 아이들을 주시했고,

부족한 부분 없이 키우려, 엄마는 옷을 뒤집어 입고 가계를 가도 애들은 깨끗하고 이쁘게 키워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조카들은 유명했었다.



'사자 없는 죽음'

때를 모르고, 시를 몰라 가는 준비를 하지도, 보내는 준비도 하지 못하고 이별해야 하는 죽음...


오빠와 조카들은 아내와 엄마의 자리를 한순간에 잃어지만,

그 자리를 엄마는 최선을 다해 채워줬다.


어느 날 난 엄마 입을 옷을 하나 사다 드렸다.


"엄마. 엄마 이거 사 왔어. 봐봐."

"........"

"엄마? 엄마!"

"야. 엄마 소리 좀 그만해."

"무슨 소리야?"

"애들이 들으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니. 지들은 엄마라고 부를 사람이 없는데, 너는 자꾸 엄마를 찾아."

"?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내가 지금 엄마를 뭐라고 불러? 00 씨! 이름 불러?"

"하튼 조심해서 불러."

엄마는 생각지도 않는 것에 애들 마음 다칠까 걱정을 하셨다.


"야~ 니들 팔자는 엄마가 없는 팔자야."

"?"

"엄마 없는 거 가슴 아파?"

"아뇨."

"엄마 보고 싶어? 납골당 갈까?"

"아뇨."

난 가끔 아이들한테 나름 정신교육을 시켰다.

지금은 에피소드가 되어버린 "엄마 없어. 보고 싶어?"사건은 애들의 정신교육에 잘~ 적용했다고 한다.


"자기들도 아는 건지. 큰애 00가 지 엄마 다 기억하는데 엄마 찾으면 나도 키우는데 힘들었을 거야."

"맞아. 근데 어떻게 저렇게 지 엄마를 안 찾지?"

"장례식장부터 엄마 찾지도 않고. 지 팔자지. 팔자야. 에휴."


1살 조카는 엄마를 모른다고 해도, 6살 큰 애는 엄마의 사랑이 뭔지, 엄마의 부재가 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장례식 이후로 엄마를 찾지 않았다. 엄마는 귀신이 됐다고 무서워했지....

그렇게 큰 아이들은 엄마의 고생을 알아서 인가 지금 아주 잘~크고 할머니밖에 모르고, 어딜 가더라도 할머니 먹을 거, 할머니 옷을 그리도 사 갖고 오고, 건강에 신경을 쓴다.



그럼 됐지.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

이별의 아픔은 어디선가 날아온 날카로운 화살에 가슴을 맞은 거처럼 죽을 거 같이 아프다.

화살촉을 빼내도 그 자리에 자국은 지워지지 않듯이 누군가의 죽음은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흉터와 같다. 기억하면 그때의 아픔이 떠오르지만 시간이 흘러 그 자국이 서서히 아물 때면 내 기억 또한 치유가 되듯이 떠오르면 눈물이 흘렀지만, 시간에 기댄 기억은 그저 씁쓸히 떠오르곤 한다.


어쩔 수 없는 이별이지만,

그 이별을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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