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 : 상여는 장례의 발인(發靷) 절차에 따라서 상여꾼들이 망자의 시신을 장지(葬地)까지 운구하는 상구로, 어깨에 메고 망자를 운구하는 여러 상구를 대표하는 용어이다. (백과사전)
단출화된 장례에 상여는 없다.
그저 3일장을 하고 발인을 하며, 매장 또는 화장을 거치면 그것으로 장례식은 끝이 난다.
27년여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전화에 아빠차를 타고 엄마와 할아버지가 계셨던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4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간만큼 차 안에 공기는 막혀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그렇게 사시려고 나를 이렇게 만드셨어."
엄마의 울음 섞인 원망은 차 안에서 계속됐다.
9남매.
그중에 엄마는 큰 딸이었고, 밑으로 동생을 자식처럼 돌봐야 했다.
농사일로 먹고살던 시절. 해가 뜨기도 전에 밭에 나가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 오는게 일상이었다.
참하고, 솜씨 좋던 엄마는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다 도맡아 해야만 했다. 큰딸이라...
그래도 힘든지도 모르고 그 치다꺼리를 마다하지 않고 다 하셨다.
나이가 차니 동네 총각들은 엄마를 좋아했고, 선도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다.
"오빠. 00 시집보내야지. 내가 보니깐 아주 성실하고, 돈도 잘 벌어."
"흠....."
"아이참. 장에서 보니깐 돈다발을 세고 있다니깐. 돈 많은 곳에 시집보내야 동생들도 줄줄이 잘 되는 거야."
고모할머니는 할아버지께 지금의 나의 아버지를 엄마의 선자리로 밀고 있었다.
"아니, 고모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마구잡이로 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어디! 말을 끼어들어!"
외할머니는 안 된다고 했고, 할아버지는 고모할머니말에 넘어가고 계셨다.
"언니. 지금 내가 이상한데 선자리 놓는다는 거유? 나중에 고맙다고나 하지 말고."
그렇게 고모할머니의 밀어붙임에 할아버지는 동네 총각들의 워너비였던 엄마를 시집보내려 하셨다.
그 사실은 안 엄마는 서울이모집으로 도망가셨고, 철회를 하지 않는다면 절대 내려가지 않겠다고 벼르셨다.
"아버지가 약을 드셨다. 니 내려오지 오지 않으면 죽을 기세야. 어쩌겠냐 사람은 살리고 봐야지."
할아버지는 보란 듯이 약을 드셨다. 아주 작게.
그리고 엄마는 울면서 내려가 아빠와 결혼을 해야 했다.
결혼하고 보니 집안이 그렇게 기울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의 곱지 않은 시선과 막내 시누는 꼭 한 마디씩 하며 사람 속을 긁어 머리채 잡고 흔든 적도 있었다.
돈다발을 센 것도 고모할머니한테 보여주기 식으로 일부러 그렇게 많이 버는 척을 하셨던 것이다.
거기에, 그렇게 바람을 피우시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았다..
자식 위해 독해지고 독해질 수밖에 없던 엄마.
시집갈 때 큰 딸 시집보낸다고 바리바리 해줬던 혼수도 다 말아먹고 갈 곳 없어 친정으로 가니 발도 못 붙이게 했던 외 할아버지를 아직도 엄마는 잊지 못하신다고.
외할머니가 울며 빌어도 절대 들이지 말라고 소리치던 할아버지를 미워하셨다..
달리는 차 안에서 울다 쉬다 울다를 하신 엄마.
"야. 지금 니 장인 죽었다는데 지금 음악 틀고 신이 났냐! 신이 났어!"
아빠는 차를 타시면 기본적으로 음악을 크게 트신다.
그것도 뽕짝으로 신나는 노래를....
그날도 꼽혀있던 테이프에서 신나는 뽕짝으로 쿵짝쿵짝했고, 울던 엄마는 뒷좌석에서 소리소리쳤다.
시골 가로등이 그리 많지 않아 해만 넘어가도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은 벌써 불이 밝혀져 북적북적했다.
"아이고, 아이고"
엄마는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울음을 터트리셨다.
집에서 하는 장례라 안방으로 할아버지를 모셨다.
병풍 앞에는 영정사진과 향로가 놓여져 있었고, 병풍뒤에는 할아버지가 모셔져 있었다.
거의 기다시피 해서 방으로 들어가신 엄마는 통곡을 하셨다.
"나를 이렇게 만들고 이리 가요. 아이고, 아이고."
엄마의 울음에 먼저 도착했던 이모들이 모여 같이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에 마당에서 한잔씩 하며 밤을 새울 동네사람들과 친인척들이 모여들었다.
딸들의 울음에 집안으로 조용해졌다.
"왜 그리도 모질게 구셨소. 나를 그리 억지로 시집보내놓고 내 인생 망쳐 놓고!"
"언니..."
"아이고, 아이고."
한탄과 원망의 울음이었다.
어느 정도 진정을 하시고 엄마는 흰 상복을 입으셨다.
밑으로 여동생만 4명이어서 오리가 엄마를 따르듯이 이모들은 엄마를 따라 다니셨다.
처음엔 동네 사람과 조문온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하셨다. 오랜만에 보는 친적과 동생들이 반가웠다.
"야. 시간 됐냐. 애들 불러라."
엄마의 부름에 이모와 삼촌들이 안방으로 모였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곡을 시작하셨다.
곡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어디 사냐"
"가서 술상 좀 봐와라."
"아니 이리 멀리 오셨어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울다 웃다를 하셨다.
할아버지는 왜 그러셨을까.
집안 식구들에게만 엄하게 하시고 소리치셨지 주위 분들에게는 잘하셨다고 한다.
마루에서 식사를 하실 때, 거지가 와 동냥을 구해도 겸상을 하며 밥 대접을 하신 분이시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동네 부자로 동네사람들을 도와주곤 하셨던 할아버지는, 6.25 전쟁 때 죽창을 들고 사람들 죽이고 다니던 청년부에게 꼼짝없이 잡혀 죽을 위기에서도 할아버지만은 바로 보내셨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염할 때 눈물 많이 흘리지 마. 그러다 쓰러지셔."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살면서 그렇게 처 자식 괴롭혔는데 어디서 눈물이 나냐."
"진짜 안 울어?"
"응"
그렇게 다짐하시던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염할 때 그렇게 통곡을 하며 우셨다.
관에서 꺼내져 하나하나 수의를 입혀갈 때 자식들과 그의 동반자는 오열하며 울었다.
그때는 상조회사가 없었기에 오로지 식구들과 동네 사람들 몫이었다.
상을 차리고 나르고, 치우고, 설거지하고, 또 상을 차리고, 나르고, 치우고 무한 반복처럼...
잠깐 쉬려 마루에 앉아 있을 때, 상여가 들어왔다.
이승에서 마지막 떠날 때 타는 가마.
상여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서 가마에 태울 이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상여였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 좀 더 덜 힘들고, 덜 슬퍼하라고 화려하게 치장했던 걸까...
한참의 여름은 눈물 반, 땀 반으로 더욱 지치게 했다.
이제 갈 시간이었다.
분주하게 사람들은 움직였다. 자리를 정리하고 아들들과, 사위들이 모이고, 딸들이 모이고, 며느리가 모였다.
미리 준비했던 상여꾼들은 제 자리에 섰다.
그리고 상여에 관을 실었다.
그리고 문 앞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사위와 아들들은 한 번씩 상여에 타 한 마디씩을 했다.
그리고 딸들과 며느리들은 문밖으로 상여가 움직이자 뒤 따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종소리에 맞춰 '어야~ 디야~"를 노래하며 그렇게 상여가 집을 나섰다.
문밖으로 조금 나가니 더 이상 딸과 며느리는 오면 안 된다며 마지막 절을 하라고 했다.
상여를 앞에 두고 딸들과 며느리는 큰절을 하고 눈물을 훔쳤다.
(이건 나중에 들으니 뒷산 할아버지 묘지에 가는 길에, 당산나무가 있어 빙 둘러 가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거기 이상 나오지 못하고 인사를 했다고 했다.)
그렇게 내 눈에 보였던 장례는 끝이 났다.
외할아버지의 기억을 찾자면 글쎄... 뵌 것도 5번 기억일까?
서울 사는 엄마를 찾아왔다 일 나가 보지 못하자 나에게 용돈을 쥐어 주며 가셨던 할아버지,
시골에 가니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을 마루에 앉아 먹자 그 모습을 보며 작은방 문 앞에서 쪼그려 앉아 '아가 그게 그리 맛있냐'를 말씀하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다였던 거 같다.
"왠수 같아. 왠수."
를 외치던 할머니의 통곡스런 눈물.
"나를 왜 그런 곳에 시집보내 평생 힘들게 해 놓고!"
원망 섞인 한을 쏟아 내던 엄마.
내가 모르는 가족 간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빠 때문에 굶는 게 일상이었다며 자기를 억지로 시집보낸 할아버지를 지금도 엄마는 가끔 원망하신다.
그래도 아버지의 죽음에 통곡을 하며 상여뒤를 따라가던 길...
할아버지의 장례에는 화려하게 나아가는 상여와,
눈치도 없는 아빠는 차에서 왜 그렇게 신나는 노래를 틀어
"야. 신났냐! 신났어! 니 장인 죽어 신났냐고!"며 머리채를 뽑을 기세로 소리쳤던 그 기억이 있다.
상여.
그 상여는 그 마을에서도 마지막 상여였다고 한다.
내 눈으로 처음 보던 상여는 화려했다. 왜 사람이 죽어 슬픈데 상여는 왜 저렇게 화려하게 치장을 했을까... 그때 든 생각이었다.
그 상여에 타 장지까지 가야 했던 소리꾼들의 노래 가락은 너무도 슬프다.
마지막 집을 떠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야 하는 길.
얼마를 살았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듯이
상여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슬픔으로 죽은 사람의 삶을 알 수 있는 듯하다.
"떠나간다 떠나간다/ 영결 종천 떠나간다/ 마지막 가는 길에/ 정든 초옥 돌아보자/ 구중궁궐 좋다 해도/ 우리 집만 못하더라/ 고루거각 좋다 해도/ 초옥만도 못하더라/ 매일 보는 새간 살이/ 모두 다 버려주고/ 두 번 다시 못 올 길을/ 저승사자 재촉하네/ 문전옥답 많다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 황금보화 많다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 빈손으로 나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자자손손 많다 해도/ 임종시엔 할 수 없고/ 친구벗이 많다 해도/ 임종시엔 동행 없네/ 우리 자녀 애통소리/ 귀에 쟁쟁 들리옵고/ 눈에 삼삼 보이오니/ 남겨두고 어이갈고/ 들에 오는 북소리는/ 빨리 가자 재촉하네/ 마지막 가는 길에/ 목이라도 적셔가게/ 수물너히 상도군아/ 잠깐만 이 쉬어가자"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슬프게 울리던 상여소리는 그저 한 순간, 한 찰나를 살다 돌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생각하며 가는 길이다.
"내가 그 고모를 얼마나 미워하고 원망했는 줄 아냐. 네 할머니도 고모 싫어했어. 그런 곳에 중매했다고."
"아니 그렇게 좋은 자리면 자기 딸 보내지 엄마를 보냈대?"
"그러니깐 말이다. 근데 웃긴게 고모 딸도 시집갔다 이혼했다."
"설쳤네"
"그래서 고모가 중매하면 못산다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