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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봉선 Sep 10. 2024

백혈병






나에게 첫 죽음을 알게 된건 고등학교 1학년때였다.



한 반에 53명.

아침 등굣길이면 꽉 끼는 버스에 이리저리 버스 흔들림에 소리소리 지르며, 몽둥이 들고 있는 학주선생님 피하려 버스 정류장에서 그렇게 뛰어다녔다.


난 운 좋게 반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친구들과 친해야 한다는 이유로 일주일에 한 번씩 옆칸으로 가, 다른 짝을 만나 일주일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또 일주일이 지나면 옆칸으로 이동. 이렇게 친하지 않던 애들은 일주일간 짝이 되어 공부를 했다. 

그렇다고 그 일주일 사이에 급격하게 친하거나 하진 않더라도 말이라도 붙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점심시간이 되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친구들과 모여 점심도시락을 먹고 매점을 갔다.


그렇게 옆칸으로 이동 이동... 그러다 한 친구를 만났다.

웃긴 말도 잘하고, 스스럼없이 다가오기도 했던 친구였다.


어느 날은 다리에 큰 멍을 갖고 등교를 했다.


"00야. 왠 멍이 그렇게 커."

"아. 아까 버스에서 내리는데 손잡이에 다쳤어."

"괜찮아? 아프진 않아?"

"괜찮아. 이 정도야.."


웃으며 괜찮다고 하는 친구의 무릎에는 주먹만 하게 멍이 있었다.

흰 피부에 그 멍은 도드라져 있었다.


그렇게 3일 뒤.

그 친구는 등교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등교를 하지 않자. 반 아이들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00 며칠 등교 못 할 거야."

"네?"

"음...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부모님이 전화 오셨어. 애들한테는 반장이 알아서 얘기해."


그렇게 멀쩡하던 친구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니 궁금하기도 했지만,

일주일이 지나 난 옆칸으로 이동 다른 짝을 만났다.


아이들은 일주일째 등교를 하지 않는 친구에게 친하지 않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한 반에 53명이기에 한 명의 부재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00야. 담임선생님이 전화 왔어. 교무실에 계시다니 전화 좀 드려."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선생님의 호출에 얼른 전화해 보라 했다.


"선생님. 저 000입니다."

"그래. 00야 놀라지 말고, 내일 반 친구 몇 명 추려서 병원에 가야 할거 같아."

"무슨 병원이요?"

"00 입원한 병원. 그래도 반 친구인데 가봐야 하지 않겠니?"

"아. 네."

"많이는 안 되고, 친한 친구랑, 가고 싶다는 애 5명 정도면 될 거 같은데? 학교 끝나고 병원 알려 줄 테니 갔다 와."

"네. 알겠습니다."


그땐 선생님 말씀이 곧 하늘의 명령이라, 이래 저래 변명이나 토를 달수 없었다.

나는 그 전화에 좀 피로감을 느꼈다.

'학교 끝나면 학원 가야 하는데 빠져야 하는 건가? 그리고 병원을 적어 주셨는데 이 병원은 어디 어떻게 가야 하는 거야?'


다음날, 아침 그 아이와 친한 친구 2명과 부반장이 가기로 하고 학교 끝나고 모이기로 했다.


버스에서 우린 재잘재잘 잘도 떠들었다.


병문안은 처음이며,

가서 먹을 거 우리가 먹고 싶은 것도 사가자하고,

계집애가 얼마나 꾀병이길래 우릴 불러~

좀 들떠 있는 마음으로 병원 앞에 섰다.


"선생님이 몇 층이라고 했어?"

"0층 가서 간호사한테 물어보래."


"000 찾아왔는데요?"

데스크에 앉아 있던 간호사 선생님을 향해 난 그 아이의 이름을 말했다.

교복을 입고 있던 우리를 간호사 선생님은 잠깐 생각하듯이 보곤, 따라오라는 듯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병원 깊숙이 들어가는 복도에서 우린 숨소리마저 죽이고 뒤를 따랐다.

그리고 한 병실 앞에선 간호사 선생님은

"너희들 손도 다 씻고, 마스크 해야 해. 그리고, 오래 있으면 안 된다."

우린 줄줄이 손을 씻고, 주는 마스크를 쓰고, 간식으로 챙겨 온 음료수를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비닐로 쳐져 있던 병실.

그 안 침대에 누워 있던 친구.


친구를 만난다고 들떠있던 애들은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야. 뭐야 꾀병이지?"

"우린 사온 음료수, 과자나 실컷 먹고 가야겠다."

"이게 얼마나 아프길래 학교를 빠져."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고 벼르던 아이들은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말도 못 하고 서서 두려움에 눈물이 그렁 그렁했다.


"00야. 우리 왔어."

비닐 안 침대서 웅크리고 있던 친구는 내 소리에 몸을 돌려 우리를 봤다.

같은 마스크를 쓰고, 그 며칠 사이에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 왔어? 어떻게 왔어? 와. 반가워"

힘없는 목소리는 우릴 반갑게 맞이했다.

비닐 밖에서도 보이는 그 친구는 너무도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친구의 말소리에 밖에 있던 아이들은 들어왔다.

장난을 치거나, 음료수, 과자를 먹자고 하는 아이는 없었다.

우린 왜 갔을까....

한 아이가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에 나는, 아니 어떤 아이도 울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몸조리 잘해. 선생님이 가 보라고 해서 왔어."

"고마워."


우린 언제 퇴원할 거냐는 소리도 할 수 없었다.

"갈게"

나가는 우릴 그 친구 엄마는 마중했다.

"고맙다 얘들아. 이렇게 와줘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누구도 그 아이가 무슨 병으로 그렇게 입원해 있는지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버스에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고 각자 그렇게 집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가다 공중전화에서 선생님께 보고를 했다.

별 다른 말씀 없으신 선생님은 '고생했다.' 그 한마디를 하셨다.


그렇게 5일이 지났고,

난 다시 정신없이 학교 아이들과 어울리며 그렇게 그 친구의 빈자리를 조금 의식하며 보냈다.


"00야. 선생님 전화받아봐."

저녁, 엄마의 부름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00야."

그리고 선생님은 아무 말씀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기다려도 선생님은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계셨다.

"선생님?"

기다리다 내가 먼저 선생님을 불렀다.

"음........ 00이 아까 죽었단다."

"네?"

"내일 주임 선생님과 같이 장례식장으로 가야 할거 같은데, 아침에 갈 사람 5~6명만 추려 줄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 친구를 보고 온 지 5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근데 죽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나이에는 죽음이 뭔지도 몰랐다.

"내일 아침에 보자."

"네"

선생님 전화를 끊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선생님이 뭐라셔?"

"엄마. 나 저번에 문병 갔다 왔잖아."

"어. 그 친구. 왜?"

"죽었대"

"뭐? 어머 어쩌니.... 그 어린애가, 무슨 일이야. 무슨 병 있었어?"

"몰라."

"아이고, 그 부모 가슴 아파서 어쩌니."



다음날, 학교에 등교를 하니 그 친구와 친했던 친구는 소식을 들었는지 울고 있었고, 반 아이들도 충격을 받고 있었다.

난 총무를 불러 반통장에서 국화를 사 갖고 오라고 했다.

"몇 개 사 올까?"

"글쎄? 그래도 우리 반 아이들 숫자대로 사는 게 좋겠지?"

"알았어."

총무와 다른 친구는 꽃집으로 향했고, 바로 커다란 국화를 한 다발 사 갖고 왔다.

가지런히 그 친구책상에 놓자 여기저기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난 왜 그랬는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장례식 갈 사람 정하랬어. 갈 사람 손 들어봐."

여기저기 손 드는 아이들이 있었다.

"많이는 못 가. 선생님차 타고 가야 해서, 너, 너, 너..."

그렇게 6명을 데리고 주임선생님과 담임선생님 차에 나눠서 탔다.


장례식장이란 곳을 처음으로 갔다.


선생님뒤를 따라 그렇게 조용히 걸음을 옮기니 방 안쪽으로 안내가 되었다.

사진으로 보니 그 아이가 맞았다.

아이들은 울기 시작했다.

난 그때도 울지 못했다.


"마침 같이 예배할 시간이니 친구들이 같이 해 줄래?"

친구 엄마는 우릴 향해 말했다.

멋도 모르고 그렇게 따라 뒷방으로 갔다.

그곳엔 관이 놓여 있었다.

그 관을 보자마자 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00야 왜 여기 누워 있니.'

'00야 왜 이렇게 관이 작아.'

'00야 정말 여기 누워 있는 거야?'


울음은 통곡이 되어 주체를 못 할 정도로 나왔다.

나를 보고 선생님이 데리고 밖으로 나가 주셨다.


"진정 됐어?"

"........"

"니가 진정해야지. 니가 그렇게 울면 다른 애들은 어떻게 하니. 진정해 반장."


다시 선생님의 차를 타고 학교로 왔고, 우린 운동장에서 내려 반으로 들어갔다.

난 차 안에서도 눈물을 그치지 못해 세수라도 하고 들어가야 했다.

"니들 먼저 들어가. 난 세수 좀 하고 갈게."

수돗가에서 찬물에 세수를 하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앉아 숨을 고르고 반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어서 시끌 시끌했다.

한참을 그 친구 자리를 봤다.

저렇게 쉽게 죽음이란 게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환하게 웃던 친구가 왜 그 작은 관에 있던 것일까...


점심시간 후 수업을 들어오신 선생님들은 한 번씩 그 자리를 보며 수업을 했고,

2시가 넘어가니 아이들은 다시 일상으로 왔다.

아침에 그렇게 울고 불고, 무겁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래도, 하루 정도는 그 친구를 위해 웃음은 참아야 하는 거 아냐!"

화가나 나는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순간 조용했지만, 웃고 떠들던 아이는 나를 공격했다.

"뭐야. 반장. 너는 아침에도 울지도 않고 그러더니 혼자 슬픈 척은 다하네."

그 아이의 발언에 난 화가 났다.

"그런 소리마! 반장 여기 오는 내내 울었어. 제일 많이 울었고, 니들은 좀 00을 위해 추모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같은 반이었잖아."

장례식장을 같이 갔던 한 아이가 그 애를 향해 소리쳤다.

언쟁은 시작됐다.

그리고 마지막 말이였다.

"그럼 언제까지 우리도 우울해 있어야 하는데!"


반은 조용했고, 그 두 사람의 말에 움직임이 멈췄다.

"그만해. 넌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 하지만, 00가 이 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슬퍼하겠니.

각자 알아서 해."

난 중재를 했고 그때 다른 아이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은 좀 조용히 있자."

"정말 재 웃긴 거 아냐. 너무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00의 죽음을 각자 슬퍼했고, 3일 뒤 몇 명의 아이들과 책상 위에 있던 국화꽃과 양동이를 들고 학교 뒷산으로 갔다.


양동이에 국화를 넣고 불을 붙였지만 불은 붙지 않았다.

훌쩍거리던 아이도, 연신 불을 붙이려 했던 아이도 당황했다.

"이거 어떻게 해? 좋은 곳에 가라고 태워 주려 했는데 안 타면 어떻게 해?"

"아... 진짜 이게 왜 안타는 거야."

이리저리 불을 붙이려 노력해도 불이 붙지 않았다.

"니가 아까 물 줬어?"

"내가? 아냐."

불과 씨름하느라 슬펐던 기운은 언제였는지, 그렇게 불 붙이기에 여념이 없을 때,


"반장. 뭐 해?"

학교건물 2층에서 우리를 보던 남자 선생님이 소리쳤다.

"태워 주렸는데 불이 안 붙어요!!!"

"그게 그렇게 붙인다고 타냐."

"그럼 어떻게 해요?"

"휘발유 부어서 해야지."



"..........."


우린 휘발유를 부어서 태울 용기가 없어 신문지에 잘 싸고 버렸다.





고등학교 1학년이지만,

그때의 반 친구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그저 공부밖에 몰랐고 주위에 누가 죽어 장례식장이란 곳도 잘 가지 않았기에 더욱 현실감이 오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이야 사진에 대고 절하거나, 국화꽃을 놓고 육개장 먹고 오면 그게 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왜 그랬는지,

천주교를 다닌다는 친구엄마는 친구들이 같이 빌어 주면 좋겠다고 우릴 그렇게 관을 보줘야 했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벌서 30년이 더 된 얘기지만, 그 작은 관 안에 누워 있을 친구를 생각하니 그 생각만으로도 많이 슬펐던 기억이다.

그 슬펐던 기억은 누구에게는 견디기 힘든 슬픔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단 몇 시간, 몇 분이라는 단기적인 슬픔이라 더 아련하게 기억이 나는 거 같다.


학창 시절 빛나기만 해야 하는 시절에는 우린 빛을 내고 있지만, 누군가의 빛이 사그라 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나.

아이들, 지금은 많이 변했을 감정이지만, 그때 우리는 53명의 한 반에서 한 아이들 잃었고, 그 슬픔은 30년이 지난 지금의 나에게도 작은 아픔의 조각으로 기억된다.

그 아이의 병명은 '백혈병'이었다.

그래서 유난히도 희였던 아이였나 보다.

작은 충격에도 커다랗게 멍이 들고 힘들어했던 아이는 밝게 학교 생활을 했고, 친구도 많았다.

아이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병실 비닐 안 침대에 누워 있던 아이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커다란 병원복을 접어 입고, 짧은 머리는 노란 고무줄로 사과 머리로 조금 묶어 놓았던, 우리를 보며 밝게 웃던 친구다.


그렇게 이쁜 영혼은 하늘의 부름으로 우리에게 작은 인사를 하고 갔다.

53명 중 몇 명에게 기억이 되고 있는진 모르지만, 내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국화를 태워 좋으니 곳에 보내야 한다고 그렇게 용을 써가며 불을 붙이려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그때 휘발유를 부어야 잘 탄다고 조언해주시던 선생님은 아직도 건강하게 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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