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혼하고 싶으면 자식 생각하지 말고 이혼해."
어릴 적부터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자식으로서 그런 말을 어떻게 하냐고 하겠지만, 가정을 등한시했던 아빠에 그다지 정을 많이 못 느끼고 살았다. 아니 정이 아니라 고통이라고 해도 맞는 말일 것이다.
아빠는 결혼초부터 그렇게 여자들과 놀기를 좋아하셨다.
"남자가 잘났으니 여자가 따르는 것이지!"
할머니는 자기 아들 두둔하기 바빴고 엄마는 그렇게 시집살이를 하셨다.
자식을 낳기만 했지, 아니 만들기만 했지 책임은 절~대 남의 일이 되어 버렸다.
이혼하고 싶어도 무릎 꿇고 빌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빌면 애들 보고 살아야지.. 하며 마음 고쳐먹고.
그러기를 몇십 년 세월이다.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
그건 처음부터 잘못 됐을 때 고치고, 고치면 고쳐진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흘렀는데 고쳐진다고 고쳐질까?
지금 생각하면,
좋게 말하면 '한량'이다.
버는 돈 모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쓰는 거에 집착하고, 남한테 보여주길 좋아하고,
남이 좋아해 주면 더 좋고...
입담도 좋아 사람 사귀는 건 귀신같이 홀린다.
엄마가 모은 돈 귀신같이 찾아 그걸 다 쓰면 집에 왔다.
그래서 엄마랑 난 아빠를 '배짱이'라고 불렀다.
어릴 적부터 아빠에 대한 정은 없었다. 아니 차라리 집에 오지 않았으면 했다.
밖에서 잘 놀다가도 집에만 오면 화를 냈다.
아빠의 존재는 차라리 부재가 더 좋았다.
그러다 올케가 죽고 오빠의 아이들을 엄마가 집에 데리고 와 키우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신경 쓰느라 더욱 아빠에게 신경 쓰지 않았고, 아빠는 맘껏 '케세라'를 외치며 사셨다.
일본에 살고 있는 언니가 보고 싶어 일본에 갔을 때다.
"엄마 별일 없어?"
"음... 니 아빠가 가다 넘어지셔서 좀 다쳐서 병원에 있어."
"왜 넘어져? 그래서 병원에? 또 엄마 신경 쓰게 하네."
화가 났다.
날짜 변경해 돌아와 공항에서 남편이 하는 말.
"아버님 뵈러 가야지."
"됐어. 내일 가도 되는데."
병원에 간다는 말에 엄마는
"니 아빠가 넘어진 게 아니라...."
"그럼?"
"뇌출혈"
"뭐? 그럼 지금 어떤 상태야?"
"좀 마비가 오셨어."
더 화가 났다. 그렇게 술, 담배를 줄이라 해도 '넌 떠들어라. 난 나다.'란 식으로 술을 그렇게 마셨다.
거기에 다른 것도 아닌 뇌졸중.
병원에 갔다.
침대에 앉아 계신 아빠가 보였다.
"아빠."
"어.... 와... 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물을 드시면 옆으로 흘리는 게 대부분 이였다.
젊었을 때는 자신만 알던 사람이 이제 나이 드니 손발이 되라고 뇌졸중으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나?
그때부터 조카들에게 스케치북에 각종 동물, 식물, 가구를 써서 할아버지랑 함께 읽으라고 써 줬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되고, 아빠는 학생처럼 잘 따라 했다.
동대문에 있는 큰 한방병원도 다니면서 제법 좋아졌다. 말도 하게 되고,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잘 걸으셨다.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할 정도로 호전되었었다.
"아빠가 쓰러지셨다."
엄마의 전화에 얼른 병원으로 갔다.
심장 전문으로 널리 알려진 병원이었다. 심근경색.
허벅지를 통해 스텐트 시술을 했다. 5개가 막혀있는데 3개밖에 못했다고 사셔야 2년 정도 사신다고 했다.
2년? 2년밖에 못 산다고?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눈물부터 났다. 그렇게 사고만 치는 아버지지만 2년?
하지만, 아버지는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술, 담배를 끊으시고 그렇게 2년은 흘러 5년이 되었다.
중간에 한번 더 쓰러지셨지만, 잘 퇴원하시고 5년을 넘게 주말농장을 왔다 갔다 하시며 소소하게 움직이셨다.
"엄마, 아빠 차 언제까지 둘 거야? 팔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 그래도 아빠는 저게 낙이니 놔둬. 저거 팔면 충격 먹으셔."
"근데 75살인데 어떻게 운전해? 관상용으로 두는 것도 아니고, 세금이니 보험 나가야 하잖아."
아빠는 차를 좋아하셨다.
어디를 간다 하면 차부터 닦고 광을 냈다. 음악도 크게 틀며 신나게 운전하면 그렇게 스트레스가 풀리신다는 분이었다. 근데 운전 안 하고 주차장에 저렇게 놔두기만 할 거면 파는 게 좋지 않을까....
"저거 어떻게 팔아야 하니?"
"중계상한테 얘기하거나 올려야지."
"얼마나 한다니?"
연식과 키로수를 입력해 2군데 중개상에게 전화하니 터무니없는 가격이 나왔다.
"팔지마. 미쳤다고 얼마 주고 샀는데 그거 받고 파니. 그냥 놔둬..."
"그래도 한해 한해 갈수록 가격은 더 떨어져."
"판다니 나도 이렇게 서운한데 니 아빠는 오죽하겠니. 놔둬라."
아빠는 몸이 불편한데도 멀쩡한 거처럼 그렇게 다니셨다.
그러다 사고를 치시고, 그걸 해결하고, 또 일을 만드시고, 난 그걸 말리고... 이과정이 계속 됐다.
사업이라고 작은 사업을 몇십 년 해오신 분이라 그냥 집에 있는 게 싫으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나이 들고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누구든 금방 사기를 칠 수 있다.
아니, 일을 해도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라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물어주기 때문에 말렸다.
처음엔 좋게 시작했다.
"아빠 그거 하지 마세요. 몸도 불편하고 멀쩡한 거 같아도 조금만 힘들면 쓰러지세요. 그러면 또 병원 가야 하는데 그냥 운동이나 하시고, 주말 농장에 갔다 오세요."
"................."
그렇게 말을 무시하고 다시 일을 벌릴려고 하시고 엄마는 걱정돼서 전화 오고,
"아빠, 도대체 왜 그러세요. 그냥 계세요. 식구들 걱정시키고, 하지 마세요."
"................"
"왜 제 말을 듣지 않는 건데. 사람 테스트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몇 번째인데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너 한번 죽여봐라야?"
"................"
악을 쓰게 됐다. 3남매가 있어도 가까이 사는 자식이 죄인가. 매번 나였다. 화병까지 날정도였다.
"아버님 차 팔릴 거 같은데? 아는 사람한테 얘기했더니 사겠다고 하네."
신랑은 지인에게 아빠차를 소개했더니 자신이 사겠다며 얘기해보라고 했다.
"엄마, 이 가격이면 좋게 파는 거야. 생각해 봐. 내년이면 반값도 못할 거야."
"에휴. 니 아빠가 서운할까 봐 그런 거지. 그래 팔아라."
아빠한테 차를 팔겠다고 했을 때 아무 말 않고 그저 tv만 보셨다.
그렇게 며칠 후 그분은 직접 와서 차를 몰고 갔다.
차를 보내는 모습도 보지 않고 그날 저녁을 드시지도 않았다.
그때부터 아빠는 조금 변하셨다.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는 아이처럼 어딘가 뚱해 보이고 말이 없으셨다.
그리고 나와 부딪치는게 더 거세졌다.
그날도 그랬다.
엄마가 집을 고칠 곳이 있어 아는 설비사장님을 불러 고치고 있는데, 아빠가 갑자기 오셔서는 소리를 지르고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며 엄마한테 사장님이 있는데서 소리를 치니 엄마도 같이 소리가 나갔다고 했다.
그걸루 삐지신 건지 저녁도 안 드시고 있다고 속상해하셨다.
가까운 곳에 집을 하나 놓고 거기에 아빠 운동기계도 놓고 숙식도 할 수 있게 준비도 해 놨었다. 베란다에 고추도 심고, 상추도 심어놔서 가끔 따다 엄마를 갖다 주시곤 했다.
혼자 있고 싶으면 계시라고....
"밥 먹어요! 밥"
"안 먹어."
"굶을 거야?"
"안 먹어."
아빠의 고집에 엄마는 그냥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렇게 고집불통으로 주말농장과 집을 오가셨다.
"119 연락해라."
"엄마 왜?"
"니 아빠 쓰러지셨다."
잘 견디고 있던 심장이 멈춰 버렸다.
준비 없는 아빠와의 이별.
부랴 부랴 장례식장으로 갔고 정신없이 꽃이며, 영정사진이며, 절차를, 음식을, 차를 계약했다.
갑작스러운 장례식은 언제나 그렇다.
슬픔보다는 충격이 크다.
평소 다니는 스님을 모시고 기도를 했다.
"스님, 평소 낚시를 좋아했던 사람인데 바다에 뿌려주는 게 좋겠죠?"
"본인이 평소 그렇게 얘기했으면 그렇게 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안돼 엄마. 자식이 있는데 바다에 어떻게 뿌려."
"얘는 니 아빠가 그렇게 원했잖아."
평소 자신을 바다에 뿌려주라고 얘기했던 말을 엄마는 기억하고 좋아하는 바다에 뿌려주는 것도 좋을 거 같다고 말씀하셨다.
기도를 마친 스님은
"바다에 뿌리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아까와 다르게 말씀하시곤 절로 가셨다.
"거봐 납골당으로 가자."
난 엄마에게 올케언니를 모신 납골당에 계약한다고 얘길 했다.
염을 하고 발인을 하고 난 아빠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내드렸다.
서럽게 눈물이 나올 거 같지 않았지만, 염을 하며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발인을 하며 이 세상에서의 작별에 눈물은 멈출 수가 없었다.
아빠를 납골당에 모시고 온 날부터 난 가슴을 치며 울었다.
그렇게 아빠를 보낸 것에 죄책감이 물 밑듯이 들어왔다.
차를 괜히 팔았나. 그것 때문에 상실감이 많으셔서 돌아가셨나...
조금만 더 잘해 드릴걸...
조금만 이해할걸...
조금만 참을걸...
참회의 눈물은 울분을 넘어 가슴을 치며 울게 했다.
절에서 49재를 하며 눈물로 절을 하며 좋은 곳에 가시라고 기도를 열심히 했다.
부모와 자식은 무엇일까?
부모은중경을 읽으면 부모는 자식걱정을 태중부터하고 죽어서야 그 걱정이 끝이난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자식걱정은 없이 그렇게 자신만을 위해 살다 돌아가셨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다.
나는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은 없다.
없다고 표현하는게 맞을까 싶지만, 아빠와 함께하며 행복해하거나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이 든 행동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도 아빠에게 정이 많지 않았다.
엄마를, 가족을 괴롭히는 사람으로 인식이 더 컸다.
그래서였을까...
더 많이 아프고, 더 많이 후회를 했다. 내 행동에 후회를 했고, 이 관계를 만든 아빠의 행동을 탓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우울증 증세에 병원을 찾았다.
"반려의 죽음은 평소 사이가 좋았던 부부보다 사이가 안 좋았던 부부가 우울증이 생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선생님은 엄마를 보고 말씀하셨다.
아마, 살아온 세월의 억울함과 허탈함이 같이 와서 일 것이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고,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의 부재에 공허함이 왔을 것이다.
나에게 아빠는...
아빠다.
그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고, 많은 정도 주지 않았다.
그런 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아빠'였다.
10년이 된 얘기지만 지금도 아빠를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난다.
가끔 엄마랑 아빠얘길 하면 이 얘기는 꼭 나온다.
"정말 아빠는 이 평생 후회나 미련은 없었을 거야.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가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