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쟁이 할머니한테 일부러 가서 돈을 주며 음식을 먹듯이 삼촌의 욕은 기분 나쁘기보다 정감이 있었다.
그중 제일 잘하는 욕이 "섞을 가시네"였다.
젖니가 빠지려고 하니 여기저기 흔들흔들 거리는 이빨을 손가락으로 건드는 걸 본 삼촌이 말했다.
"이리 와 삼촌이 빼줄께."
"어떻게?"
"안 아프게 빼는 법이 있지."
"뭔데?"
"이게 어딨 더라. 아! 여기 있네."
연장통에서 펜치를 꺼내 내 앞에 들이밀었다.
"엄마~~~!!"
"섞을년 이리와~"
그런 삼촌이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왔다.
그것도 2명을...(지금 생각하면 양다리였지만, 그래도 미리 선보이고 결혼생각으로 사귀려고 했던 것이다.)
"형수 누가 나은 거 같아?"
"어휴.. 그걸 나보고 말하라고?"
"어때? 누가 나은 거 같아? 첫번째? 두번째?"
엄마와 삼촌의 대화에
"난 두번째 언니. 그 언니가 딸기도 사오고 웃는게 이뻐"
내 말에 삼촌은 실실 웃으며
"그치? 웃는게 이쁘지. 삼촌도 그 언니가 좋다."
삼촌은 그렇게 두번째 데리고 온 여자와 결혼했다.
엄마는 내게
"삼촌이 결혼했으니 너도 이제 삼촌이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럼?"
"작은 아버지. 해야 해."
"작은 아버지?"
"맞아. 작은 아버지. 그 이쁜 언니는 작은 어머니."
그렇게 나에게 삼촌이 작은 아버지가 됐다.
작은 아버지는 관광지에서 식당을 크게 하셨고, 아들, 딸 낳으며 돈도 벌어 식당은 더 커졌다.
언젠가 엄마랑 그곳을 방문했다.
"형수 온다고 내가 홍어를 준비해 놨지. 근데 이 홍어가 흑산도 홍어야."
"뭘 홍어를 준비해."
"아야. 형수님 드시게 밥 준비해 놨냐."
주방에 있던 작은엄마한테 작은아버지가 얘기했다.
대꾸 없이 그냥 주방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던 작은 엄마를 향해
"저 섞을년. 빨랑 안 갖고와!"
그 호통에 민망해서 작은아버지한테 난 뭐라 했다.
"미쳤어. 부인한테 섞을년이 뭐야. 섞을년이."
"우린 그게 애정 표현이야."
"애정 표현 한번 살벌하네."
그때 작은 엄마는 준비했던 음식을 갖고 나오기 시작했다.
"준비해 놔라. 난 홍어 좀 갖고 올라니깐."
"꼭 저렇게 먹는 사람 불편하게 하고 가네."
"야 가시네야. 니 먹으라고 냉장고에 동동주 가득 넣어놨으니깐 그거 다 먹고 가."
웃으며 가계를 나섰던 작은 아버지였다.
어릴 적부터 스스럼이 없어서일까 작은 아버지가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았어도 허물없이 대했다.
자식 사랑은 얼마나 끔찍한지 아들이 공부 잘한다고 학교에서 소풍 가면 모두 집으로 초대하고, 선생님이 하라는 공부는 어떻게 든 시켜서 그 아들은 서울에서 알아주는 대학에 들어갔다.
얼마나 기뻐하던지 작은 아버지는 사촌 동생이 대학을 들어가자 동네잔치를 3일 동안 했다.
"작은 아버지 입원 하셨단다. 가봐야지."
"또 올라오셨대? 작은 엄마도 고생이시고, 작은 아버지도 큰일이네."
엄마랑 병원으로 갔다.
병원 복도에서 우리를 맞던 작은 엄마는 왜소했던 몸이 더 왜소해져 있었다.
"형님 오셨어요."
"고생이 많네. 서방님은 좀 어떤가?"
"본인 고생이죠. 많이 안 좋아졌어요."
엄마와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 침대에 앉아 벙실 벙실 웃던 작은 아버지.
너무나 말라 가죽만 남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형수님 오셨소. 니도 왔냐."
'전에 입원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마르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마르셨지?'
"작은 아버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작은 아버지는 숨만 쉬는 것도 힘들어 보이셨다.
내가 알고 있던 작은 아버지와 다른 모습에 난 쉽게 말을 꺼내 지도, 평소처럼 장난을 치지도 못했다.
작은 병상에 누워 미소만 짓고 있는 작은아버지 역시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혈액암.
작은아버지의 병명은 혈액암이셨다.
"엄마 어제 꿈에 어떤 할머니가 회색 한복바지를 입고 천보따리 배낭을 메고서 산을 올라가는 거야.. 근데 거길 작은 아버지가 조용히 따라가더라고. 근데 산에 올라가니 작은 초가집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그곳으로 들어가고 작은 아버지도 들어갔는데, 할머니가 먼저 나오고 다음은...... 관이 나오는 거야."
"................."
엄마는 내 말을 다 듣고서 입을 꽉다문셨다.
"무슨 꿈이 이래?"
"느그 할머니가 데려갔네."
"누구? 할머니?"
"니 작은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아침에 전화 왔다."
평소 꿈이 잘 맞았던 내 꿈 얘기를 듣던 엄마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거리셨다.
아직도 그 꿈을 생각하면 20년이 더 된 얘기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들 3형제.
그중에 아빠는 중간이었다. 자신의 동생의 죽음에 비통한 마음으로 장례를 다 맞히고 올라오시곤 한동안 술, 담배가 더 느셨었다.
어릴 적 아빠의 한량끼에 지칠 때로 지쳐 엄마가 집을 나가신 적이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의 부재에 하루종일 엄마를 찾아 우느라고 눈이 짓무를 때였다.
"내가 엄마 찾아올게 그만 울어라."
작은 아버지는 나를 달래 고모한테 맡겨 놓고 엄마를 찾아다니셨다.
어디 멀리 도망도 못 가면서, 자식 걱정에 눈물 마를 새도 없던 엄마는 작은 아버지의 설득에 조용히 집으로 오셨었다.
작은아버지는 결혼 전 서울과 지방에 왔다 갔다 일을 하셨다.
서울에 일이 있으면 우리 집으로와 과일이며 과자를 잘도 사 오셨다. 한량끼를 갖고 있던 아빠가 집을 며칠째 비우는 날이면
"염병도 저런 염병이 없어. 처자식 내버려 두고 어떻게 저럴 수 있어. 미친놈"
작은 아버지는 시원하게 대신 화를 내고 욕을 해줬었다.
아빠가 그럴 때마다 미안함이었는지, 불쌍함이었는지 더 신경 쓰고 더 챙겼다.
그러다 보니 엄마와도 동생 누나처럼 허물없이 대할 때도 있었고, 나도 삼촌이 오면 기분이 좋았다.
가끔 엄마와 고향을 갈 때 삼촌집을 못 들리면 그렇게 서운해했다.
"형수 여기까지 내려왔으면서 여길 안 들리면 나 서운해요."
"가면 손님인데 동서 피곤해서 그렇지. 장사하는 것도 힘든데 우리까지 보탤 일 있어."
"그래도 담에 꼭 들려요."
또 언젠가 눈이 많이 오던 겨울.
"야. 니 온다고 해서 이건 놔뒀지."
작은 아버지는 수북이 쌓인 눈 속에서 커다란 무를 뽑았다.
"그게 맛있어?"
"섞을년.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그자리에서 무를 깎아서 어서 먹어보라고 잘라준 무는 정말 달았다.
눈 속에 있으면서 얼지도 않고 차갑지만 아삭아삭 맛을 내던 무를 아직도 기억한다.
식당방 중 하나에 노래방기계를 갖다 놓은 방이 있었다.
"작은 아버지 노래방 방에 가서 노래해도 돼?"
"섞을년 니 목청껏 불러라."
"그 섞을년 좀 그만해. 내가 결혼해서도 그럴 거야?"
"섞을년을 섞을년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냐."
"으~~~~"
작은아버지 하면 '섞을가시네"가 생각나지만,
그래도 간다면 반가워하며 냉장고 채워둔 맛있는 동동주가 생각난다.
"느그 할머니게 데려갔네"처럼 할머니가 막내아들 잘 인도해서 좋은 곳에 계셨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