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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Dec 13. 2020

화문화답(畵問和答) 1

그 그림이 내게 물었다


일러스트 김억중




나를 바라다보는 나는 누구인가?


평소 나는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의 그림에서 몇 개의 익숙한 고전건축의 오브제들과 그림자 깊은 적막한 광장, 그를 둘러 싼 건물들이 만들어낸 알 수 없는 공간의 힘을 느끼며 그 중에 한 점만큼은 꼭 소장하고 싶은 야무진 꿈을 지닌채 보고 또 보곤 해 왔다. 언제쯤 되어야 필요 이상의 현란한 테크닉과 혐오스런 수다도 다 멈추고, 목이든 어깨든 힘 다 빼고 난 후의 순수한 힘을 내장할 수 있을지 자문해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화면 속 진공(眞空)에 서서, 내 건축이 다다라야할 길을 예감하기도 했다.


여느 화가들 못지않게 데 키리코가 남긴 10여 점의 자화상 중에서도 이 그림만큼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대뜸 뇌리에 남아 기어이 수수께끼 같은 불안의 씨앗을 내 가슴 안에 확 흩뿌려놓았던 셈이다. 허긴 그의 그림이 대부분 그렇듯, 그는 익숙한 것들, 관습적이어서 너무도 당연한 것들을 맥락을 바꾸어 놓거나 이질적인 상황 안에 병치시켜 보이는 것들의 가치와 의미를 명징하게 놔두지 않고 되묻게 하는 측면이 있다.


이 자화상만 하더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반대편에 서서 자신을 조롱해 보임으로써 그림을 보고 있는 나의 에고(ego)를 불러내어 나와 정반대의 다른 모습을 보게 하기도 하는가하면 더 뻔뻔하게 위장하고 싶은 내 안의 두 마음이 있다는 사실과 그 두마음을 내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여지없이 드러내라며 정조준하고 있으니, 제아무리 대가 센들 그 파고드는 질문의 힘으로부터 어찌 자유로우랴. 데 키리코로부터 전수받아 ‘나를 바라다보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시작했던 나는 언제부턴가 컴퓨터 배경화면에 1922년에 그려진 그 자화상을 띄워 놓고 꼼짝없이 ‘나를 바라다보는 그’의 염치를 보아가며 문하생의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De Chirico, Autoportrait, 1922-1924


그렇다. 내 안에도 두 사람이 있다.

처음 그의 자화상을 보는 순간 실제로 드러나 보이는 자신의 존재는 하나인데 그 모습을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자화상으로 그린 화가의 속내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오른 쪽의 나는 3/4만큼 고개를 돌려 전방 세상을 향해 “나야! 나! 화가 키리코!”하며 제법 득의만만한 모습으로 나름 폼을 잡고 있지만, 왼쪽의 나는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벌거벗은 채로 “웃기지 마! 허세 좀 그만 부려!”하는 매섭고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조롱하듯 바라다보고 있다. 어쩌면 오른 쪽의 나는 애써 왼쪽의 나를 외면하려 내심 노력하느라 미간이 편치 않은 모습인지도 모른다.


내면과 외면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있는 나는 결국 한 인간으로서 진정 행복하기나 한건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모습과 은밀하게 감추어져 그럴 듯한 모습이 동시에 공존하는 나는 과연 진정한 예술가이기는 한 건가 하는 의구심이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쪽에서는 눈가에 다크써클이 내려앉도록 수도 없이 채근하며 그림을 왜 그리느냐고 묻고 있다면 다른 한 편에서는 잘 관리된 표정으로 삶이 이 정도면 잘 나가는데 뭐 다른 고민이 더 필요하겠느냐며 무언의 날선 공방이 오고가는 듯하다. 진정한 성공이 뭐냐며 왼편의 나는 순수한 빛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저 심연의 외침, 그 메아리 없는 외로움으로 부풀어 오른 몸이 꽤나 고통스러워 보인다. 


어쩌면 정물처럼 놓고 그리다 만 과일 하나, 그 소재조차 업신여기며 화가로서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듯 팔레트도 한 편에 제쳐두고 그림에 매진해야 할 재능의 손마저 힘없이 다 내려놓은 나는 파업이라도 할 기세로 벌거숭이 몸으로 “그래 겨우 이 정도 밖에 아니었어?”라며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이편의 나 또한 이젠 지쳤으니 제발 내게서 물러서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하는 나일 수도 있다.


하루에도 수 백 번씩 화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의 내가 때로는 동지처럼, 때로는 적처럼 아등바등 한 몸속에 동거하고 있는 것이 나의 자화상이다. 나는 어찌 되었든 전쟁터 같은 세상을 상대로 주어진 화폭만큼 단 한 치라도 벗어날 수 없이 살아가야하는 실존적 존재다. 그림 속의 내게는 본질과 현상의 틈, 이상과 현실의 간극 그 사이를 출렁이는 대로 줄 타듯 불안하기도 하지만, 왼편이든 오른편이든 내가 바라다보고 있는 나조차 때로 누가 진정한 나인지도 몰라 현재진행형 화두처럼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멈출 수 없다. 


너의 핏줄은 나의 것처럼 붉고

너의 심장은 내 안에서 두근거린다.

너의 바닥에서 일렁이는 저것은 무엇인가

너의 유물은 무엇인가

[김경인,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일부,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민음사]


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야 할 인간인 나와 예술가로 살아야 할 나 사이의 대립만으로도 둘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 그리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본연의 나와 세속의 나 사이, 그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가 문제인데다 하나인 나를 해체하여 보는 주관적인 관점과 객관적인 관점의 차이가 더해지고 여러 갈래의 철학과 가치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연립방정식을 풀어내기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삶의 생태가 그러하듯 왼편의 나와 오른 편의 나는 누가 더 옳고 그르다고 단언할 수 없으며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인지 조차 정답은 없다. 건축가인 내게도 예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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