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공원에서 느낀 노년의 성(性)
어느 가을의 끝자락, 오사카 만박기념공원을 걷다가 낙엽 사이로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노인을 보았다. 붉게 물든 단풍 아래서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은, 흔히 말하는 '노인'이라는 단어가 지닌 고정된 이미지와는 달랐다. 그들에게서는 늙음이 아닌 따뜻함이, 쇠약함이 아닌 생명력이 느껴졌다. 말없이 나누는 교감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생각에 깊이 빠져들었다. ‘노인의 삶 속에서 성(性)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우리는 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종종 움찔한다. 나 자신조차도 한동안 성은 감추어야 하고,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되는 금기어로 여겨왔다. 하지만 성은 단지 성적 행동이나 신체적 접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 성적인 존재이고, 성은 '누구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누구와 어떠한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를 둘러싸고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바라고, 표현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인간의 성은 단순히 생식 기능이 아닌, 삶의 질과 자기표현의 중요한 요소이기에 노년기에도 성적 욕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이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일부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성을 젊은이의 전유물로 여긴다. 아이가 누군가에게 뽀뽀를 하면 '귀엽다'며 웃어넘기지만, 노인이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장면에는 인상부터 찌푸려지는 게 현실이다. 노인의 성적 욕구나 정서적 교감은 종종 혐오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사회는 이를 외면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와닿지 않는 그저 먼 미래의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교감하기를 원한다. 노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그 여정 속에서 더 많은 위로와 사랑이 필요하다. 누구의 자녀였고, 부모였으며, 사회의 일원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스스로의 주체로서 삶을 살아갈 권리를 우리는 종종 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일본을 여행하며, 나는 또 다른 문화의 일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키하바라의 역 앞에는 대형 성인용품점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고, DVD 대여점에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자연스럽게 드나든다. 나아가, 도쿄에는 홀로 사는 노인들을 위한 맞선을 주선하는 이벤트들이 운영되고 있고, 노인복지관에서는 어르신들에게 활용할 수 있는 성인용품에 대해 알려주며 홍보하는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일본은 다양한 방식으로 노년의 사랑과 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이 역시 완전히 건강하고 온전한 문화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성'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그들의 태도는, 금기와 숨김으로 일관한 모습과는 결코 달랐다.
얼마 전 TV 다큐멘터리 '노망일까? 로망일까?'라는 방송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제목처럼, 우리는 노인의 사랑을 ‘노망’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히려 로망, 즉 인생 후반부에 피우는 가장 순수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자녀로서, 부모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후, 이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꽃피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공원에서 마주한 두 노인의 뒷모습 속에는 어딘가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딱 붙어 있지도 않고,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점. 그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용하지만 단단한 기운이 그들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사랑의 시기에는 정해진 때가 없다. 인생의 어느 계절이든, 누구든지 사랑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 성과 사랑, 교감과 연결은 단지 젊은이들의 특권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두의 권리다.
사랑꽃은 누구에게나 피어난다.
노인의 성과 정서적 교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선.
부끄러워하지 않고, 숨기지 않고, 외면하지 않는 그런 사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고령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첫걸음이 아닐까.
30년 후 나의 계절은 가을일까, 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