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으로 포장한 오만함

나만 몰랐던 것

by 한시영


지난 밤은 거의 잠을 설쳤다. 2주 가량 독감과 더불어 후유증을 앓고 방광염까지 온 탓에 괴로운 밤을 보냈다. 그러다 잠시 잠에 들어 꿈을 꿨는데 자기 직전까지 읽었던 책의 내용이 꿈에 나왔다. 정확히는 작가가 장애를 가진 애인과 만나며 꾼 꿈, 책 에서 읽은 그 꿈이 내 꿈 안에서 재현되었다.


밤에, 그것도 새벽에 자지 못하고 잠깐 든 잠에도 꿈을 꾸며 설친 것은 비단 컨디션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날 저녁 둘째 아이에게 화를 내고 다그친 것이 내내 마음에 남았었다.


올해 여덟살이 됐으나 스스로 하는 것이 잘 되지 않는 아이. 아이는 그런 자신이 누구보다 힘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처럼 나도 그런 아이가 힘에 겨웠다. 힘에 겨웠다는 것이 아이의 그런 면 자체보다도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주했어야 할 난처한 상황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보다 몇 곱절은 큰 내가 작은 아이를 몰아세우고 난 뒤에도 쉬이 감정이 가라앉지 않아 방에 들어가 책을 폈다. 그러고선 제일 마지막 페이지를 펴 문장을 적었다. ‘이제 아이는 자신을 향한 엄마의 사랑이 조건부임을 알게 될 것이다.’


적고보니, 아마도 아이는 한참 전부터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만 몰랐던 것.


수많은 양육서와 영상에서 말하듯 일관성을 유지하는 양육자가 되기 위해 애썼지만 종종 아니 자주 기분 내키는대로 사랑과 관심을 줘놓고서… 마치 오늘 하루, 이 사건으로 모든 것을 망쳤다고 구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아닌가? 그동안 모든 것을 잘해왔다 생각하기에 이 하루가 마치 결정적 사건인 듯 느껴지는 것이겠지. 자책감으로 포장한 마음 속 오만함. 헛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나에게 자명한 사실은 나는 내가 낳은 아이여도 아이가 타고난 기질과 성향에 불편함을 느끼고 화를 내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은 노력하고 나를 쥐어짜고 아무리 좋은 엄마인 척 굴어도 나보다 아이들이 먼저 알고 있을 진실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헛웃음이 나왔다.


질책에 마음이 상한 아이가 내게서 얼굴과 몸을 돌려 등을 보인다. 아이의 등이 참 작다.


애초에 아이의 그 어떤 모습도 사랑할 수 있다는,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그런 너그러운 양육자의 모습을 쉽게 갖고자 했던 것이 오만임을. 육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부분에서 오만과 욕심으로, 그 뒤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자책과 자괴감으로 무너지던 내가 떠오른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가지 않고 다시 아이 앞에 서는 것. 부끄럽지만 아이 눈을 쳐다보고서 아까 목소리를 내어 미안하다 말하는 것. 나 스스로도 억울한 마음이 있지만 그것을 잠시 눌러놓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오늘은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재워놓고 거실로 나와 챗쥐피티를 켜 오늘 있었던 일을 몇 자 적었다. 그러자 ‘최고의 엄마 보다는 항상 유지되는 바닥선이 필요합니다’와 같은 조언과 뒤이어 나를 격려하는 말이 딸려 나온다.


일정한 바닥선, 바닥, 선, 일정한. 결국 돌고 돌아 똑같은 답에 나오는 헛웃음. 산다는 것은 이토록 정형화된 일이며 웃음이 나오는 일이던가.


여덟살이라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진 않아.

나이가 들었다고 모든 걸 다 잘 하는 건 아니지.


씩씩대며 내게 대들던 아이의 모습. 나름 엄마의 질책에 자신을 방어하는 사나운 모습 안에는 정확함이 있어 움찔했다. 그래 나이가 든다고 다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 갑자기 달라지진 않지. 아이의 말을 새기며 오늘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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