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아닌 동료로
책상 위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지역에 있는 영업사원의 전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하고 전화를 받으니 “어우 매니저님~~ 아침부터 매니저님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아요, 맨날 지역에서 칙칙하게 있다가.”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라는 속담처럼 반가움이 가득 섞인 목소리에 찬물을 끼얹기는 싫었지만 저 멘트를 꿀꺽 삼켜 소화하긴 더 싫었다. “제 목소리가 왜요? 여자라서요? 그래서 듣기 좋으신 건가요?” 퉁명스럽게 받아치자 곧바로 해명에 들어간다. “아니에요~ 매니저님! 요즘 미투다 뭐다 난린데, 오해 하실라. 절대 그런 거 아닌 거 아시죠? 친근감의 표현!” 2018년 여름의 일이다.
흔히 있는 전화였고 자주 듣는 멘트였다. 서울에 위치한 본사에서 기업 대상 서비스를 런칭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던 나는 각 지역 영업사원들의 전화를 받고 그들의 요청사항을 처리해주기도 했다. 40대 중 후반 남성 직장 동료들의 통화 시작 멘트는 조금씩 달랐으나 그 의미는 하나같이 비슷했다. 내 목소리가 좋다거나 혹은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거나.
2년 전 팀장 이상 급만 들어가는 월례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부문을 대표하는 부문장을 필두로 팀장, 본부장을 포함해 약 40명이 들어오는 회의였다. 갑자기 우리 팀장이 다른 이슈로 미팅이 잡혔고 그 대타로 내가 들어가게 됐다. 당연히 선임급 매니저가 들어가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보고서를 직접 쓴 사람이 들어가야 발표 후 쏟아질 질문들에 잘 대응할 수 있다는 팀장의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다. 관리자 급만 모인 회의에서 팀을 대표해 발표를 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회의를 한시간 앞두고 숫자나 맞춤법 표기 오류를 검증하기에 여념이 없는데 50대 중반 부장님이 오셔서 위로를 건넨다. “국희 매니저 잘 할거야. 걱정마. 뭐 국희 매니저 들어가면 내용과 관계 없이 이미 끝났지 뭐. 입장 자체에서부터 분위기가 굉장히 릴렉스 해질거야~”
긴장하고 있는 내 모습을 지나치지 못하고 응원 차 해준 말이었다. 평소 배려심이 많으셨던 부장님은 팀 내에서도 나와 친분이 꽤 두터웠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고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지에 대한 개인적 취향도 공유한 사이었으니까. 그런 부장님이 후배인 내 입장에 공감하며 건넨 말. 응원과 격려라는 의도를 가진 말. 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 부장님 앞에선 “아, 네.” 하며 대화를 마무리지었지만 내 마음은 전혀 정리되지 않았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들이 많은 그룹에서 발표를 하게 되면 그 내용이나 실력과는 상관없이 그저 좋게 받아들여진다는 의미. 부장님 무의식 속의 나는 직장 동료라기 보다는 분위기를 밝게 하고 모임의 긴장도를 완화시키는 여성으로 존재했다.
퇴근 후에 아이를 씻기면서도 재우면서도 부장님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차라리 그 말은 문제가 없고 그걸 불편하게 듣는 내가 문제가 있으면 좋겠단 생각까지 들었다. 불편함을 꺼내어 부장님과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불편함을 참고 관계를 맺는 일이 진짜 관계를 망치는 일이란 확신이 들었다.
다음 날 한 시간 일찍 출근해 메일함을 열어 부장님께 메일을 썼다. 무더운 여름이라는 날씨로 시작한 이야기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부장님이 하셨던 말을 그대로 텍스트화했고 그것이 내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썼다. 동료가 아닌 여성으로서 인식되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는 남성 중심 조직인 우리 회사에서 내가 겪는 불편함까지 나아갔다. 이번 메일을 통해서 조직 내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 부장님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길 바란다는 바람도 썼다. 마지막으로 부장님께서 이 이야길 들어주실 거란 신뢰가 있기에 용기내서 쓸 수 있었다고 마침표를 찍었다.
부장님은 곧바로 답장을 주셨고 불편하게 느꼈던 점에 대해 사과하셨다. 자신의 행동과 말을 수정한다고 하셨으며 서로가 가진 젠더 의식이 지금은 멀어보이지만 같은 곳을 지향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부장님과는 업무 중 커피를 마시고 일상을 나누는 동료로 남아있다.
아직도 내가 일하는 곳에서 크고 작게 내가 소비되는 경험을 한다. 나는 여성이라는 나의 성별을 판매대에 올려놓은 적이 없는데 누군가에 의해 나는 여성으로서 대상화되어 소비된다. 그때마다 이렇게 메일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바로 말로 받아칠 수 없는 상황도 존재한다. 아직도 나는 여성 이전에 직장 동료로서 대등한 관계를 갖기 위해 메일, 쪽지, 문자 등 그들에게 내 불편함을 표현할 방법을 연구한다. 동료가 되는 일이 이렇게나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