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비인후과 가을 검진이 있었다.
봄과 가을에 두 차례 예약된 이비인후과 검진을 다녀오고 나면, 한동안은 얻어터진 멘탈을 다시 제 모양으로 추스르느라 정신이 없다.
“... 막힌 정도가 아주 심하고요, 대여섯 살까지 기다렸다 수술을 하는데 수술이 잘 됐을 경우 허스키하고 작은 소리가 날 겁니다.”
기관절개 수술을 처음 받았을 당시의 사진을 보고 하는 이야기라 후두내시경을 다시 하기 전까지는 늘 같은 소견일 수밖에 없다. 매번 데자뷔처럼 반복되는 상황인데도 담당 선생님의 말은 때마다 정말 아파 죽겠다. 너무나 아픈 말에 복동이까지 상처 받지 않도록 다음 진료에는 우리 아가를 밖에 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흘려들어버릴 때도 됐는데 어째서 온 세상 근심이 다 내게로 온 듯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마는 것일까. 까닭을 찾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그러다 ‘허스키하고 작은' 아가의 목소리에 방점이 찍힌다. 아-, 복동이의 목소리가 내 근심의 정중앙에 아주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복동이가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절대 아물지 않을 상처가, 부지불식 간에 얇은 종이에 깊게 베이듯 무심한 의사의 말에 다시 헤집어졌던 것이다.
'목소리가 작다고 해도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지. 잘 걷고 뛰는 데다가 인지도 사회성도 잘 발달하고 있으니까. 어린이집을 못 가는 대신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잖아. 지금 걱정해본들 얻어지는 건 얼굴의 그늘뿐이야.'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늘 되뇌는 말들을 있는 대로 다 꺼내어봐도 쉽사리 보송해지지 않는 슬픈 마음.
일주일쯤 지났을까. 가족과 시간에 기대어 나는 가까스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에게 이상 징후가 있었다. 매번 나에게 언덕이 되어주었던 남편이 나보다 더 오래도록 깊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때와 다르게 유독 가슴이 아파 일하는 중에도 늘 병원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며 말을 잇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뭐라고 위로를 했더라. 너무 놀란 나머지 다독인답시고 다 괜찮을 테니 이제 그만 당신도 빠져나오라는 뉘앙스가 풀풀 풍기는 빵점의 말 밖에 건네지 못했다.
차라리 그냥 듣고만 있을 걸. 그럴 땐 아무리 훌륭한 위로도 약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복동이를 키우며 남편이 쭈욱 그래 왔던 것처럼, 그저 아내와 엄마로서 건강한 심신으로 자리를 지키는 것. 그렇게 나를 받쳐주었던 남편과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복동이 덕에 나는 여기까지 뚜벅뚜벅 걸어올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찌하여 당신도 아플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했던 것인지 모를 일이다.
당신이 슬퍼하고 있을 때에는 내가 더 밝은 사람이 되려고 하네. 내가 기다릴 테니 당신은 천천히 일어나요. 한번 휘청였으니 우리는 더 단단한 가족이 되었겠지. 다시 아가의 조그마한 양 손 꼭 붙들고 우리의 특별한 나날을 성실하게 엮어 가보자는 말을 건네고 싶어서, 이렇게 조금은 간지러운 글을 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