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해가 바뀌었다. 어릴 적부터 그래 왔듯 열두 시가 넘어가는 것을 기다렸다 잠이 들었으나,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그 특별한 찰나는 더 이상 나의 가슴을 뛰게 하지 못했다. 올해도 휴직을 이어가기로 한터라 새해라고 나의 과업에 변동사항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나이를 한 살 더한 들 작년이나 올해나 삼십 대 후반의 아기 엄마라는 내 자리 역시 그대로다.
나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지 못한다. 나의 시계는 '복동이의 수술까지 D-몇 해'라는 대주제와, '다음 검사와 진료까지 D-몇 개월'이라는 소주제들이 맞물려 돌아가도록 세팅되어 있다. 앞날을 상상하며 고대하기보다, 다음 진료일로부터 현재까지 남은 날을 자주 거꾸로 헤아려보는 것은, 내 현재에 실망이나 불안을 더 얹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의 일종일 것이다.
올해 2월, 아가의 세돌을 즈음하여 후두내시경이 예정되어 있다. 기관절개 수술 이후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수술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캐뉼라 졸업까지 대략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늦가을에 접어들어 날이 차가워지면서 나는 점점 긴장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주 몸서리를 쳤다.
아기를 데려온 이후로 '언젠가는 우리도'라는 연약하고 어슴푸레한 희망을 꼭꼭 묻어두고 지냈다. 꿈이라도 꾸어보기에 그 날은 너무나 요원했고, 현실의 나는 매번 허망한 마음을 감당해야 했다. 재잘거리는 복동이와의 어느 한 때를 그려보는 것조차 죄스러워 떳떳하게 그 희망을 꺼내어 보지도 못하는 겁 많은 엄마는, 내시경이 보여줄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책 반납일이 멀다 하고 즐거이 다니던 도서관도 발길을 끊고, 운동도 그만두고서 주야장천 피곤한 상태로 지내고 있다. 그저 나의 온 신경은 그 날을 향해 날카롭게 곤두서서 쉭쉭 거리고 있다. 머릿속에 복동이의 이름이 회복실 환자 명단에 나타난 직후 벌어질 법한 몇 가지 시나리오들이 자꾸 떠올랐고, 그것들은 담당 교수의 퍼석하고 느린 목소리를 빌려 반복 재생되었다. 참으로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질 노릇이 아닌가.
주말 아침 남편에게 등 떠밀려 나와 커피를 마시며 임경선 작가의 다정한 구원이라는 책을 정말로 오랜만에 끝까지 읽었다. 주변은 대체로 고요했고, 책은 마음을 간간이 건드렸다. 시계를 흘끔거리며 내가 이렇게 평온한 상태여도 되는 건가 하는 묘한 불편함에 가슴을 졸이면서 이렇게 타닥타닥 글을 적고 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시간에 이렇게 어두운 글을 쓰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지독하게 희망은 옅고 어둠은 짙은 시절이었다고, 그 '언젠가'의 '우리'가 되었을 때 되돌아볼 발자국을 남겨두는 것으로 해두자. 역시 허망하다. 그러나 살아야 하는 자, 도리가 없다. 이렇게라도 견디며 기다리는 것 말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