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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 Feb 05. 2020

그 여자의 기억법

당신은 약속을 지키는 어른인가요?

여자는 의사고, 남자는 조직의 보스였습니다. 의사와 조직의 보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의 세계를 무너뜨리며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조직의 보스는 평범하기 힘들죠. 영화 속의 조직 보스의 여자는 항상 위험합니다. 반대파로부터 여자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먼저 이별을 선언합니다. 그 와중에 여자의 안식처이자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죠.


여자의 깨복쟁이 친구는 여자에게 그 남자와 멀어질 미국행을 권하지만 여자는 남자와 이별이 전제되는 미국행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 앞에는 또 다른 이별이 다가옵니다. 무너진 조직, 심복의 죽음 앞에 이성을 잃은 남자가 또 다른 죽음을 부른 것입니다. 남자는 잠적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기다립니다. 남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98년도에 개봉하여 많은 흥행을 했던 영화 <약속>의 줄거리입니다.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영화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조직보스와 의사와의 약속, 좀 어울리지 않나요? 약속이라는 단어보다는 로맨스라는 단어가 더 먼저 떠오르나요? 그럼 다른 영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흥행은 못했지만 지난해 5월 개봉했던 <어린 의뢰인>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엄마가 없는 남매가 있었고, 어린 남매 스스로가 스스로를 키워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요즘 애들은 모두 가지고 있는 휴대폰 하나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이지만 밝게 그리고 환하게 커갑니다. 원하지 않는 새엄마가 생겼고, 새엄마의 학대와 참을 수 없는 아픔에 힘들어집니다. 우연히 남매와 얽히게 된 변호사 J는 귀찮음에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게 되고, 남매는 오지 않을 J를 기다리다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당신은 약속을 지키는 어른인가요?>가 이 영화의 메시지입니다.


    

10년 전 약속을 지켜 12세 소녀의 생명을 살린 여성 검찰수사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10년 전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킨 여자가 있다. 10년 전 봄, 여대생이 거닐 던 대학 교정은 유난히 푸릇푸릇했다. 교정을 걷던 여자는 장기기증 및 조혈모세포 기증 신청을 받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여자는 기증신청서를 작성했고, 세월은 여자를 주부로, 그리고 검찰수사관으로 자리해 주었다.


조직적합성항원이 일치할 확률은 2만분의 1. 여자가 기증약속을 한지 10년, 여자와 유전인자가 일치하는 백혈병의 12세 소녀가 나타났고, 여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아직 피지 못한 12세의 소녀가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 10년전 의 약속이었지만 여자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던 10년 전 여대생의 꿈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과 남편의 걱정을 뒤로하며 여자는 1박2일 동안 입원과 15시간의 주사바늘을 견뎌냈다.     


검찰방송에서 제작하여 유튜브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검찰수사관은 10년 전의 기억과 약속을 잊지 않았고, 12세의 소녀에게 세상의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자그마치 10년 전에, 그것도 대학 교정을 지나며 우연히 했던 기증약속이었습니다. 이를 지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말입니다.




사소한 약속이라도 약속을 지키기는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저와 친구들의 술자리에선 공약이 많습니다. 다음주말엔 지리산종주를 하자, 그 다음 달엔 해외 4천미터 이상의 산에 가보자, 아니 당장 이번 주말에 가까운 산에 가자. 술기운에 지금 당장 배낭을 메고 히말라야에 갈 기세입니다. 다음 날 술이 깨면 거의 기억도 못하고, 기억을 한다 해도 술자리 약속을 지킬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죠. “술기운에 한 약속인데 뭐.” 남아일언 중천금이 아니라 취객일언 두부가 되는 순간입니다.


술자리에서 한 약속이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막상 닥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취소하면 그만입니다. 약속에 대한 개념이 무딘 것이지요. 약속 개념이 없다고 뭐라 하는 친구도 딱히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무디게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전 10년 전의 약속의 지켜준 분이 고맙고 존경스럽습니다. 이 여자 수사관 외에 몇 년 전의 기증 약속대로 조혈모세포를 기증 했다는 또 다른 남자 수사관의 이야기도 들립니다. 전 장기기증신청도, 조혈모세포기증신청도 해보지 못했지만 후배 수사관들의 용기와 선행이 부럽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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