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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 Jan 09. 2020

깍두기의 협박  "밤길 조심해라"

엄마가 하면 걱정이 되고, 깍두기가 하면 협박이 되는 말은?   

            

어려서 모친으로부터 길조심해라는 말을 수시로 듣고 살았습니다. 생각해보니 길조심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지요? 차조심해라, 물조심 해라, 불조심 해라는 차, 물, 불을 조심하라는 말인 것이 확실하지만 길을 조심하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길에 다니는 차를 조심하라는 말이었을까요. 제가 어렸을 적엔 차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차를 조심하라는 말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예전에는 포장길이 아니었던지라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걸을 때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었다면, 하긴 이해가 가기는 합니다. 


 ‘밤길 조심해라’는 말을 모친에게 들으면 걱정이 되고, 깍두기에게 들으면 협박이 됩니다. 저는 짧지 않는 검찰생활에 밤길 조심해라는 걱정을 수시로 듣고 살았습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써서 그런지 깍두기 등 많은 사건관계자분들이 밤길 걱정을 해주었고, 그 걱정 때문인지 딱히 밤길 사고 없이 지금까지 잘 지내왔습니다.       


예전 제 밤길을 걱정해준 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검찰에 입사한지 5년 만에 한 직급 승진하여 검찰서기가 되었습니다. 검찰의 직급은 검찰서기보, 검찰서기, 검찰주사보, 검찰주사, 검찰사무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5급 이하의 경우만이고 그 위의 직급도 있습니다. 아직도 전 검찰주사이니 검찰에 들어와 사무관을 달려면 관운도 따라야 하고, 입사한 시기 선배나 동기들의 숫자가 적어야 가능한 일이니 저에겐 관운은 별 없나 봅니다. 모친은 제 관운이 짱짱하다 하셨는데 말입니다. 


여하튼 서기로 승진한 나는 타 청으로 전보되어 집행업무와 징수업무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규모가 큰 청에서는 집행업무와 징수업무가 분리되어 있으나 소규모 청에서는 인원도 적고 업무도 많지 않다보니 두세 가지 업무를 한 사람이 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징수업무의 경우 벌금 미납자 검거업무가 주 업무이고, 경찰에 잡혀온 벌금미납자를 교도소 노역장에 수감하는 업무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25년여 전의 벌금 미납자들은 지금보다 더 드센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 기준이니 다른 수사관들은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루는 조폭 생활을 하다 벌금 미납으로 경찰에 잡혀온 똘마니 하나가 계속해서 궁시렁 거리며 자신이 조직생활을 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범죄단체조직죄로 잡혀온 것도 아니고 벌금을 못 내서 잡혀 온 분이 조직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요. 


검찰청에 들어와 조폭생활을 과시하는 놈은 완전히 조직 생활 초짜이고 똘마니일 확률이 높습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놈이라는 것이지요. 계속 해서 궁시렁 거리는 똘마니에게 조용히 있으라 한마디 했더니 그때부터 그분은, 입으로 조직생활을 했는지, 얼굴을 봐두었다느니 벌금으로 살아봐야 며칠을 살겠느냐며 읍내가 자기 조직의 영역이니 밤길 조심하라며 제 걱정을 한 시간 내내 해주었습니다. 제 밤길걱정까지 해주는 똘마니가 고맙기는 하지만, 2시의 데이트 김기덕의 목소리도 10분을 듣지 못하는 저에겐 고역을 넘어선 고통이었습니다. 

결국 그 분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그 분 손에 수갑을 채웠습니다. 


손이 말을 했을 리 없으니 사실은 입에 재갈을 물리고 싶었지만 그 분 말대로 조직생활 하시는 분을 가오 상하게 재갈을 물릴 수는 없어, 수갑이 입을 좀 막아주겠지 하는 바람과 수갑을 함께 채웠습니다. 바람이 통했는지 수갑을 채우자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항상 방심은 금물입니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그 분 조직의 행동강령에 삼십육계가 있었는지 위대하신 조직원이 쪽팔리게 도주를 시도했습니다. 


크나큰 팔찌를 두 개나 차신 분이 뛰면 얼마나 뛸 것이며, 시골 바닥에서 도망을 가봐야 어디로 가겠습니까. 재빨리 나가 뒤를 쫒으니 그분은 앞으로 뻗어진 수갑 찬 손을 강호동 처럼 흔들며 논으로 뛰고 있었습니다. 같이 튀어나온 수사관 3명이 삼각 세 방향을 잡아 뒤를 쫒았고, 5분을 뛰던 그 분은 제풀에 지쳐 논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조직에서 체력 훈련은 시켜주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씨익 웃어주며 뒤쪽 허리춤을 잡아 올리는 저를 향해 그 분은 또 다시 밤길 조심하라 악을 써가며 걱정을 해주었고, 저는 걱정해주는 고마운 맘에 그길로 경찰관을 불러 학교(교도소 노역장)로 보내주었습니다.       


두 달 가량 후, 지인들과 저녁술자리를 마치고 관사로 돌아가는 중 읍내 골목에서 조직생활 하신 그 분을 만났습니다. 노역기간이 종료하여 교도소에서 석방된 모양이었습니다. 저도 놀랐지만 그 분은 더 놀란 눈치였습니다. 시간은 마침 밤이었으니 전 정말 밤길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밤길을 걱정해주던 놈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잔뜩 긴장을 했습니다. 


그 분이나 저나 덩치는 별 차이 없고, 그분도 놀란 행색을 보니 그리 많이 위험하지는 않겠으나 흉기라도 꺼내면? 그런데, 어라? 갑자기 놈이 반대방향으로 도망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영문을 몰랐던 저는 당연히 수배자도 아닌 놈을 쫒을 이유는 없었고, 멀뚱거리다 어두운 밤길을 조심하며 관사로 돌아왔습니다. 아직도 놈이 아니 그분이 도망간 이유는 알 수가 없고, 그 뒤로 그 분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조심(操心)’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을 잡는다’라는 뜻이고, 조심의 반대어는 ‘방심(放心)’이라고 합니다. 

긴장이 풀려 마음을 놓아버린다는 의미로, 방심의 뜻을 듣는 순간 무언지 몰라도 매사를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기는 합니다. 이제 검사실 생활이나 수사과에서 수사를 하지 않는 저에게 밤길 걱정을 해주는 분들은 없으니 스스로 방심하지 않고 밤길을 조심해야지 하고 있습니다. 25년 전 제 밤길을 조심하도록 걱정을 해주었던 그분은 지금 잘 살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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