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바이올린
나의 아버지와 언니의 아버지 그리고 오빠들의 아버지는 한 분 그분은 농부셨다. 꽤나 넓은 밭과 논을 소유하셨다. 나라가 1차 산업으로 삶의 기반을 다지던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아주 잠깐 부농의 자식들이란 소리를 시골마을에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급자족으로도 밥상에는 쌀밥과 신선한 나물과 고기반찬이 올라왔다. 2차와 3차 산업으로 시대가 급변한다는 소식이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매스컴에서 터져 나올 때쯤 큰오빠는 언니를 불렀다.
-너 그거 바이올린 그만해라.
언니는 거부의 의사를 여러 번 밝혔고 오빠는 언성을 높였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언니가 관현악단이 있는 여고를 선택하려고 하자 이쯤에서 미리 말려야겠다는 생각을 아버지보다 먼저 한 모양이었다. 가세가 기울고 있다는 것을 장남인 오빠는 먼저 파악을 했고 본인 먼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할 생각이었다. 오빠도 결국엔 대학에 진학을 했지만 말이다.
-우리 집에서 생산하는 쌀을 다 팔아도 네 개인 렛슨비는 못 댄다. 알겠나?
큰오빠는 마치 자기가 아버지인 것처럼 못을 박았다. 오빠가 렛슨비를 주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당시 언니의 바이올린 렛슨비는 한 달에 오천 원이었다. 천주교재단 여학교 현악부에 들어가서 악기는 단체 주문으로 가장 저렴한 것을 구입했고 일주일에 한 번 단체 레슨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냥 특별활동일 뿐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는데 오빠는 다르게 보는 눈치였다. 오빠가 우려한 바는 언니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도 바이올린으로 연결이 된다면 경제적인 문제가 커질 것이란 것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이 아닐까.
-알았어 알았다고 안 하면 될 거 아냐!
언니는 옆에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발로 차 버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우는 소리가 한참이나 흘러나왔다. 밀쳐진 바이올린은 아무도 만지지 않고 마루에 놓여 있었다. 한두 시간 지났을까. 부은 눈을 하고 언니는 방 밖으로 나왔다. 큰오빠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이올린을 주워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언니는 수업이 끝나고도 일찍 집으로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집 안에서는 바이올린을 연습하지도 않았다. 언니가 다니는 여자중학교의 전깃불이 꺼질 때까지 연습을 하고 마지막으로 하교하는 여학생으로 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