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울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내면에 남아있는 응어리가 풀어지기 위해서는
충분히 아파야 하고, 충분히 울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 찬, 하지만 차마 울지 못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깨를 토닥여주며 꼭 말해주고 싶다.
마음껏 울라고. 충분히 울어도 된다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개운하게 울고 나면
내일 아침은 분명 지금 같지는 않을 거라고.
어릴 때 엄마로부터 들었던 말 중에 따가웠던 말을 꼽으라면 ‘네가 왜 울어?’이다. 풀어서 말하면 너가 잘못해놓고 뭐 잘했다고 우는 거냐 정도가 될 것이다. 어린 나로서는 눈물이 나는 걸 막을 길이 없는데 잘못해서 혼나고, 운다고 두 번 혼나는 그 상황이 참 괴로웠다. ‘니가 왜 울어?’ 는 지금도 마음에 남아서 울 때마다 나를 다그치는 사감선생이 되어버렸다. 펑펑 울지 못하고 어떻게든 재빨리 눈물을 거두려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나의 경우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슬픔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마음 편히 울어도 돼’라는 말보다, ‘울지마’ ‘뚝그쳐’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은가. 아무렴,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다는 크리스마스 대표곡까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왜?’ 라고 묻고 싶다. 우리는 왜 울음을 그쳐야 할까. 기쁨만큼이나 슬픔이나 서러움도 소중한 감정이다. 모든 감정은 그 주인에게 똑같이 의미있는 손가락이다. 그런데 행복이나 기쁨은 ‘좋은 감정’으로 슬픔이나 불안과 같은 감정은 ‘나쁜 감정’으로 나누어 버린다. 때문에 그 감정이 드러날 때마다 불편감이 따를 수밖에 없다. 슬픔도 불안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개운하게 우는 대신에 억압하거나 숨기려든다. 그럴수록 마음은 건강해질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눈물 또는 슬픔은 기쁨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울음은 생의 첫 번째 언어다. 알다시피 신생아는 울기만 한다. 하루종일 우는 아기도 있다. 그 울음에도 다 뜻이 있는데. ‘기저귀 갈아주세요.’ ‘배고파요’ ‘더워요’ 혹은 ‘추워요’ 정도이다. 그 중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울음은 ‘불안해요 엄마. 나 좀 안아주세요’ 이다. 아직 언어를 쓸 줄 모르는 아이는 모두 우는 것으로 표현한다.
말을 할 줄 아는 어른이라고 다를까 싶다. 상담실에서 내담자에게 ‘어떤 일로 상담실을 찾게 되었어요?’라고 물으면 한마디도 채 떼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분들이 있다. 언어로 정돈해서 표현할만큼 간단하지가 않은 것이다. 얼마나 괴로운지 말로 설명할 방법이 없기에 쏟아지는 눈물이다. 감당하지 못할 큰 상처와 그에 따르는 복합적인 감정과 생각은 차마 문장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그저 울기만 할밖에.
시간을 두고 생각을 정돈하고 내면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엉켜있던 실뭉치가 자연스럽게 풀어진다. 그 때에는 차근차근 언어로 표현할 수도 있다. 물론 아주 오랜 기간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눈물이 언어의 한 종류인 것은 확실하다. 그것도 놓쳐선 안되는 엄청난 보물을 함축하고 있는 언어. 자신이 그 언어를 듣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매우 중요한 시그널을 놓치는 셈이다. 그러니까 ‘울지마. 뚝 그쳐.’ 는 내가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마’라며 입을 막아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면 그 무수한 말들은 갇혀버리고 슬픔은 갈 곳을 잃는다.
순간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거나, 작은 일에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질 때 모른 체 하지 말고 찬찬히 들여다 보길 권한다. 때로는 이유 없이 울고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 때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자.
눈물을 쏟아내는 그 자체가 정화작업이다. 우리는 충분히 울어야 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 있다. 회복의 한 단계를 건너가는 것이다. 감정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한다. 생각해보라. 지금 당신은 오늘 아침에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는가?
중요한 건 변화하는 감정이 계속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다. 울음이 터져나오는데 울지 못하게 하거나, 화가 나는데 애써 밝은 척을 해야 한다면 그 감정은 막혀버린다. 흘러가지 못한 감정은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상처가 깊은 사람에게 눈물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상처는 곪아 터져버릴 것이다.
심리치료의 한 갈래인 게슈탈트 치료에서는 내면에 떠오르는 충동이나 욕구를 중요하게 본다. 욕구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미해결된 과제를 해결하게 만드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욕구를 스스로 알아차리고 그에 맞게 행동하면 욕구는 해소가 된다. 하지만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욕구가 원하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미해결된 상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즉, 내 안의 슬픔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도록 허용되지 않는 환경에 있다면 결국 우리의 욕구는 미해결된 상태로 남는다. 그러면 심리적 에너지가 묶여버려 건강하게 살아갈 자원이 고갈된다. 안그래도 살아가는 게 힘이 드는데 필요한 에너지마저 낭비해버릴 수는 없다.
내면에 남아있는 응어리가 풀어지기 위해서는 충분히 아파야하고 충분히 울어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단계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마음껏 우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으면서 멀쩡하게 살라고 독촉한다.
우리 문화는 슬픔에 인색한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빨리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돌아오라고 압박을 가한다. 그러나 슬픔을 수용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않으면,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일자 샌드, <서툰 감정> 중에서
울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기꺼이 울 수 있는 사람이 강하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매끈한 아기피부로 살아갈 수 없다. 연약한 아기피부는 보기에 좋지만 상처에 취약하다. 넘어지고 데고 예상치 못하게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새살은 돋아날 것이다. 다만 새살이 돋아나고 회복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흉터는 감히 성장의 증거라 할 수도 있을테다.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 찬, 하지만 차마 울지 못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깨를 토닥여주며 꼭 말해주고 싶다. ‘마음껏 울어요. 충분히 울어요.’라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개운하게 울고 나면 내일아침은 분명 지금 같지는 않을 거라고.
눈물은 또 하나의 언어이며, 회복의 과정임을 잊지 말자. 그러므로 타인의 눈물에 무턱대고 ‘울지마’라고 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의 눈물을 충분히 허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상처 입은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적어도 상처가 더 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부디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가 아니라 마음 편히 울고 그 눈물을 통해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범죄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기관인 [스마일센터]의 소식지에 실은 칼럼입니다. (소식지 바로가기)
회복과 치유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일상속에서 많은 눈물, 슬픔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어른이 될 수록, 또 삶의 무게가 무거울 수록 그 슬픔은 안으로 안으로 눌러담게 되는게 아닌가 싶어요.
모두가 충분히 마음껏 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힘듦이 나아지지는 않더라도, 울지 못해서 더 괴로워지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가, 상담심리사 김혜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