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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Jul 25. 2016

나는 정말 '어른'이 되었을까

흉내내기는 쉽지 뭐.

  


어른 흉내 내지 말고

어른답게 행동해
     
드라마'미생'중 한 장면


  어느덧 삼십 대에 접어들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면서, 질질 끌던 석사논문을 완성시켰고, 미혼에서 기혼으로 접어들었으며, 동시에 고민이 많은 청춘이기도 했다. 물론 서른한 살인 지금도 다르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내가 10대에 상상했던 서른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4년 전에 취업을 한 후로, 겉으로 보기에 꽤 안정된 모습을 찾은 듯하다. 하지만 이십 대 후반서부터 서른을 갓 넘은 지금까지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이게 맞는 걸까' 하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곤 한다. 

아주 가끔은 ‘사는 건 뭘까’ 하는 답을 얻지 못할 질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뭐랄까. 내면은 늘 흔들리고 있는 듯하다. 여전히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고, 이따금씩 퇴사를 심각하게 재고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기도 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욕심을 내곤 한다. 사춘기를 일컬어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한다는데, 사춘기의 거친 바람과 파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요한 파도가 끊임없이 일렁이는 걸 보면 이 것도 일종의 과도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투른’ 성인기에서 ‘진짜’ 성인기로 가는 과도기라고 하면 될까.


 

  

 서른 살이라는 단어는 왠지 모르게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어떤 어른들은 서른 살이 지나면 노처녀, 노총각이라며 서른이라는 숫자가 어떤 기준이 되는 것처럼 말하곤 했다(물론 말도 안 되는 기준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왔던 서른은 심리적인 면에서 상당히 성숙해 있고, 커리어에서도 무언가를 이루었을 것으로 상상했다. 최소한 지금의 내 모습보다는 더 대단하고 더 단단한 성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대단한 무엇은 둘째 치고, 여전히 많은 것에 서툴다. 게다가 늘 약간의 ‘불안감’을 안고 사는 것 같다. 20대 초반에는 ‘젊음의 패기’로 좀 더 단순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성인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이 규정한 연령기준으로 성년이 된 지 십 년이 넘었으며, 김난도 교수의 말대로 ‘아프니까’ 청춘이라면, 나는 청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 할머니의 말대로라면 나는 ‘진즉에 다’ 커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는 민증을 까지 않고도 술집을 드나들 수 있으며, 어딜 가나 학생 때보다 돈을 더 내고, 성인의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19금 노래나 영화쯤은 기본이다. 그렇다. 나는 삼십 대이며, 성인이며, 청춘이다. 게다가 유부녀이다. 어른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퇴근길 버스 안에서 또다시 물어보았다.

난 정말 ‘어른’이 되었을까.



절레절레.


아직도 어려운 것, 서툰 것 투성이인 나를 어른으로 대해주는 것이 우습기만 하다

자주 불안해하고, 툭하면 넘어지는 나를 

'성숙하다'며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에 글을 짓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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