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기 위해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안타깝게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은 편입니다. 한국인만큼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도 없을텐데 참 아이러니하죠. 행복이라는 건 단지 열심히 살아가는 것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짐작해봅니다. 그러면 우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요.
구글의 엔지니어이자 명상연구가인 차드멍탄(Chade-Meng Tan)은 외부자극 없이도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때 행복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상황여건과 상관없이 즐거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죠. 보통은 행복해지고 싶다는 이유로 외적인 것들을 바꾸려고 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많이 성취하려고 해요. 그 노력의 이면에는 '이렇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돈과 같은 물질적 보상이나 주변 사람들의 인정이 없으면 무언가를 할 마음이 생기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활동을 할 때에 자신의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고, 그 기쁨은 비로소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철학자 버드런트 러셀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당신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은 모두 특정한 것들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부분 그 자체로 즐거운 활동이다 (중략) 바람직한 목표를 명확하게 지향하면서 그 자체로 본능에 거슬리지 않는 활동이라야 즐거운 것이다.
버드런트 러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중에서
‘본능에 거슬리지 않는 활동’은 다른 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활동’입니다. 요즘은 남들이 하니까 좋아보여서 쫓아서 하거나, 과시와 인정을 위해서 하는 활동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취미생활이든 운동이든 시작하고 나면 ‘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잘해야만 자랑이 되고 인정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잘 해야만하는’거라면 일과 다르지 않아요. 좀처럼 즐겁게 해내기가 쉽지 않아 금방 흥미가 떨어집니다. 반대로 순수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활동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 되며 그 시간을 통해 ‘진정한 나 자신’이 되어갑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 헤르만 헤세와 에밀리 디킨슨에게는 ‘정원가꾸기’가 그런 활동이 되어주었다고 해요. 식물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단순한 노동을 하는 동안 평화로운 여가가 되고 동시에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죠.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는 달리기가 그랬다고 하고요. 여러분에게는 어떤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즐거움이 되어주고 있나요? 순수하게 몰입할 수 있는 그 시간을 통해 기쁨을 늘려가보면 어떨까요.
그렇지만 행복을 그저 즐거운 느낌을 갖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 만족감이나 즐거움과 동일한 것이라 오해하지만, 감정적 쾌락은 행복의 일부가 될 수는 있어도 전부가 될 수는 없어요. 그저 쾌락일뿐이라면 우리는 매일 술을 마시거나 충동적으로 뭐든 하고 살아도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는 거겠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게다가 ‘기분좋은 느낌’은 지속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갖고 싶은 가방을 사도 잠깐의 만족을 줄 뿐 또 다른 것을 갈망하게 되지 않던가요? 게다가 점점 더 크고 자극적인 것을 가지지 않으면 이전만큼의 즐거움이 느껴지지도 않아요. 일시적 기쁨에 행복한 삶이 있다고 믿는다면 더 많은 물건이나 음식을 끝없이 욕망하는 쳇바퀴에 갇혀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프랭클은 ‘의미’에 그 해답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2차 대전을 겪으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사람들을 관찰하며 깨닫게 됩니다. 극단적으로 괴로운 상황에서도 사람을 살게하는 것이 바로 ‘의미’라는 것을요. 그러면서 모든 걸 집어치우고 싶은 때에도 자기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해요.
맞습니다. 이는 수많은 심리학 연구를 통해서도 증명이 되었어요. 반복되고 지치는 일상 속에서도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한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쉽게 비관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단한 밥벌이가 퇴근후 반겨주는 자녀들을 보며 기꺼이 할만한 일이 되는 건, 삶의 의미가 ‘가족의 건강과 행복’에 있기 때문이겠죠.
행복한 삶에는 슬픔과 불안이 없을까요? 행복해지면 슬퍼할 일도 분노할 일도 생기지 않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어요.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죠. 하지만 행복한 삶을 일구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되는 삶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 의미는 단순한 즐거움 이상의 충만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고요. 그렇기에 우리는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지?’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라고요.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다보면 자기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겠지요.
행복이 곧 즐거운 감정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우리의 감정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은 만족스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너무나 중요하며, 가장 첫 번째로 돌보아야할 것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우리는 보통 ‘생각’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몰려올 때’를 예로 들어볼게요. 불안감을 낮추기 위해 미래를 철저히 대비하죠.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는 것으로서 삶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성을 통해 통제할 것이 아니라, ‘불안한 마음’을 돌보는 것이 우리가 진짜 해야할 일인 겁니다.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감정'은 그 자체로 진실입니다. 덜어내야 할 생각은 많아도, 감정은 어느 하나 버릴 게 없어요. 나의 감정은 모른 체하면서, 현실을 바꾸어보려고 생각으로 빠지는 것은 행복과 멀어지는 대표적인 방식이에요. 특히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그 감정이 불편해서 생각으로 피하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 걱정을 통해서 불안을 낮추려고 하죠. 다가올 일을 걱정하고 철저하게 대비하면 일시적으로 불안감이 덜해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피하려고 하면 긍정적인 감정 또한 생생하게 느낄 수 없습니다. 감정은 외부자극에 대한 신체반응이기 때문에, 선별된 감정만을 느낄 수는 없어요. 자신에게 경험되는 그 모든 감정이 당연하고 또 소중합니다. 그런데 불안과 우울같은 감정을 억압하는 데에 익숙해지다보면 감정 자체에 무뎌져 버립니다.
꽤 오래전 유럽여행을 다니면서 자주 깨달았던 것이 있습니다. 그 곳 사람들의 표정과 표현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얼굴에 생동감이 넘치고 제스처도 많더군요. 그런 사람을 보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뭔가 경직되어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이건 단지 표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표정은 감정의 통로지요. 감정을 모른 체 하는 데에 익숙해진 우리가 경직된 모습이 되어버린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에요. 자신의 불안은 보지 않으면서 ‘생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그저 열심히만 살아온 탓이죠.
십여년전 제가 무척 힘들었던 시기에 매체를 끊었던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일체 보지 않았어요. 감정적으로 무너지는게 겁이나서 감정을 건드릴만한 자극은 차단했던 거지요. 드라마나 뉴스를 보다보면 감동적이어서 뭉클하기도 하고, 분노감이 올라오기도 하잖아요. 저는 그런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아예 감정을 느끼지 않기로 한 겁니다. 그러나 그 이후 우울감이 꽤 오래 찾아왔어요. 감정이 모두 말라버렸기 때문이죠. 시간이 흘러 상담사가 되었고, 그 때의 저처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돈도 벌어야 되고 성공해야 하는데, 언제 울고, 괴로워하고, 화내고 있느냐고요. 할 일이 산더미인데 그런 불편한 감정을 어떻게 다 받아주고 있느냐고 합니다. 정말 마음이 아프죠. 게다가 우리 사회는 너그럽지가 않아서 슬픔이나 불안을 마음편히 털어놓기도 힘든 게 사실이에요.
우리 문화는 슬픔에 인색한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빨리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돌아오라고 압박을 가한다. 그러나 슬픔을 수용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않으면,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일자 샌드, <서툰 감정> 중에서
이제는 우리 자신에게 ‘충분히 울어도 괜찮아.’혹은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굳어져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줘야 해요. 두려움도 수치심도 우리가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인정해줘야 할 감정입니다. 모든 감정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충분히 안아주세요. ‘그래, 화가날만해’ ‘너 많이 두려워하고 있구나. 그래, 충분히 두려울 수 있어.’ 라고 이해해주는 겁니다. 그 감정이 내 마음안에서 충분히 놀다 갈 수 있게 허용해주세요. 그러면 오히려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흘러가버릴 겁니다. 그렇게 감정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수용해줄 때 얻는 가장 큰 혜택은 더 생생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에요.
자, 이제 행복한 삶에 대한 감이 조금은 잡히셨나요? 파랑새를 찾아 헤매듯이 '열심히 살면, 목표를 이루면,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질거야' 라고 생각하며 보이지 않는 행복을 찾아 달리지 마시고, 지금 여기서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위해 한걸음 내딛어 보세요. 자신의 모든 감정을 안아주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지요.
여러분의 행복을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