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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Aug 09. 2023

내 아이만큼 나도 소중해서

1화. <아이라는 타인을 마주한 여자들에게> 연재를 시작하며


경계를 지키는 게 중요한 엄마,

경계를 침범하며 자라는 아이


세살 난 아이가 있다. 3년 전쯤 출산을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진통을 느낀 적이 없다. 이미 그 전에 날을 잡고 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담당 선생님께 여쭈어 수술이 가능한 가장 빠른 날에 날을 잡고 제왕수술을 했다. 아이가 큰 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누군가 온전히 내 몸에 의존해 있는 그 상황을 얼른 종결시키고 싶었다. 비슷한 이유로 모유수유도 하지 않았다. 몇일 초유를 먹인 것을 끝으로 단유마사지를 받았다. 아가가 집에 온 첫날부터 분리수면을 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을 거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머리속에는 어쩌면 조금은 냉정해보이는듯한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오를 것 같다. 자신을 내어주기 싫어하는 작은 마음의 여자를 상상하지 않을까. 물론 자연분만과 모유수유의 장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디어 시대를 사는 덕분에 자주 또 많이 들었다. 많이 들을수록 강요받는 느낌도 함께 들었다(저만 그런가요?). 모르지 않았기에 그 모든 선택들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모성이 좀 부족한 엄마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아이는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다. 그 것과 별개로 '나' 라는 사람은 경계를 지키는 게 너무 중요한 사람이었다. 아이는 내 몸에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라는 아주 평범한 사람은 타인을 위해 한없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늘 타인과의 관계에서 체력과 심리적인 여유가 부족해 좌절하는 평범한 내향인이었을뿐. 


 내 한계를 너무 잘 알았기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될 수 있는 한 너무 무리하지 않는 방향으로 했다. 그럼에도 육아는 무한히 아이에게 경계를 내어주는 일이었고 아이는 열정적으로 나의 경계를 넘어서며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아무리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다고 해도 (당연히) 쉽지는 않다. 특히 '나'와 '엄마'사이의 균형잡기.


출산 전에 들었던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는 말과 너무 힘들어서 다음 생에는 딩크족으로 살 것이라는 말.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이라는 말과 깊은 우울감에 못이겨 아이를 데리고 뛰어내릴 상상도 했다는 말.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조각이 잘 맞춰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임신기 동안의 혼란스러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뱃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지만 엄연히 타인이었고, 나는 그 존재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타인을 내 몸속에 품고 다니는 것. 신기하고 설레는 동시에 몹시 불편하기도 한 일이었다. 아이와 한몸이었던 280여일의 시간동안 종종 불편함과 부담감을 느꼈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사소한 제약부터 무거워진 몸으로 인한 신체적 불편함까지. 게다가 잠깐도 떼어놓을 수 없어 1만프로 오롯이 내 영향을 받는 상황. 혹시라도 나의 잘못으로 아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2인분의 몫으로 걷고 먹고 대중교통을 타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그 모든게 조심스러웠다. 특히나 그 당시는 코로나가 한참 확산되던 때여서 외출 자체가 위험한 일로 느껴졌다. 원고작업을 해오던 도서관이나 카페를 갈 수가 없어, 월세의 부담을 안고 처음으로 개인 작업실(겸 상담실)을 구해 일을 했다. 


잠든 아이를 가만히 바라볼때면 불쑥불쑥 물음표가 솟아올랐다. 


너는 어떤 사람일까?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너와 잘 지낼 수 있을까?
너는 나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과연 나는 너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이는 미지의 세계,

하지만 가장 많은 걸 알려줄 타인


궁금했고 알 수 없어서 두려웠다. 내 아이인데 미지의 세계였다. 익숙해지지 않은 존재와 한 공간 안에 단둘이 있는 것은 참으로 생경했다. 아이는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 앞으로 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예측할 수 없음'은 인간의 불안을 부추기는 가장 큰 요소가 아닌가. 



넘치는 행복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이의 미소를 보며 '와 이 맛에 아이를 여럿 낳겠구나' 싶었고, 처음 걷고 처음 '엄마'라 말하고 새로운 개인기(?)를 보여줄 때마다 놀라움과 환희의 연속이었다. 경이로웠다. '행복'이 이렇게 나노단위로 닿는 느낌은 처음이었으니까.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이제 만 3년이 지나, 아가는 어린이가 되었고 나 또한 초초초X100보 엄마에서 초초보 엄마 정도가 된듯 하다. 그 사이 폴란드라는 낯선 나라에 이사를 왔고, 아이는 자신과 매우 다르게 생긴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적응했다. 내 안의 많은 질문들과 고민들은 경험을 통해 해소되거나 옅어졌다. 엄마됨은 생각에 있지 않고 돌봄 과 사랑의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낯선 존재였던 아이는 수동적으로 돌봄을 받기만 하는 존재에 멈추어 있지 않고, 요구하고 표현하고 때로 잔소리도 하는 (ex. 급해서 운동화를 구겨 신으면 내 뒤에 쭈구리고 앉아 뒤꿈치를 밀어넣으며 '엄마 이거 넣어' 라고 한다. 뜨거운 냄비를 만지다가 앗뜨거 하면 '엄마! 뜨거운거 조심해야지' 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이의 자아는 점점 또렷해져 더더욱 '타인'의 존재감이 물씬 난다. 


아이라는 타인을 독립할 때까지 잠깐 머무르는 손님이라고 생각하면 생각보다 덜 두렵다. (아니 뭐 여전히 두렵다.) 그리고 더 소중해진다. 낯선 타인으로 왔지만 우리에게 사랑과 우정과 행복과 고통을 알려줄 존재. 친구였다가 애인이었다가 짝사랑이었다가 남이었다가 때로는 나의 일부였다가 할 존재. 그런 가장 의미있고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라 생각하면 뭉클하고 애틋하다.


엄마라는 역할은 여전히 어색하지만 이것만은 알겠다. 아이와의 관계에서는 꼼수를 부릴 수 없다는 것. 숨을 수도 피할 수도 없고, 괜찮은 척 좋은엄마인척 꾸며낼 수도 없다는 것. 기나긴 '엄마ing'의 시간을 그저 정면으로 통과해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불안과 우울과 분노를 기꺼이 마주해야 하고, 무수한 아픔과 좌절과 혼란을 끌어안아야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겠다. 


그리하여 앞으로 아이라는 타인과의 시간을 관통해 나가며 경험한 복잡다단한 감정과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대부분은 초보 엄마들이 겪는 자아의 혼란, 감정의 기복, 불안과 우울에 대한 얘기들이 될 것이다. 또 아이라는 타인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육아를 풀어보고, 그 안에서 겪는 내면의 갈등과 어떻게 돌보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나눠보려 한다. 물론 아이와 함께하는 기쁨 또한 빼놓지 않고 나누고 싶다.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사랑스런 타인, 나의 아이. 이 무해하고 소중한 존재와의 동행을 기꺼이 경험하고 있는 나와 당신을 응원하며. 



오늘부터 시작되는 [아이라는 타인을 마주한 여자들에게] 연재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발행되며 20화로 채울 예정입니다.


부지런히 함께 걸어가보자 (너가 독립할 때까지^^)
덧붙여,

기존에 <아이라는 타인을 마주한 여자들에게> 매거진으로 여덟편의 글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새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하나의 책처럼 느껴질 수 있게 새로 구성해 보고자 합니다. 기존의 글들도 매거진의 흐름에 맞게 퇴고하여 다시 업로드 될 예정이니 참고해 주세요. 기존의 매거진은 <아이를 통해 나를 키우며>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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