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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Aug 16. 2023

아이가 웃으면 내가 괜찮은 엄마가 된듯해

2화. '나'는 '너'를 통해 완성된다

엄마를 웃게 하고 싶었던 아이


어린 시절, 내가 마음을 쏟은 노력 중 하나는 엄마를 웃게 하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20대의 어느 지점까지도 그랬다. 그녀의 웃음기 없는 표정을 보는 게 힘들었다. 어린 나에게 어른의 세계는 늘 알 수가 없었지만 엄마의 얼굴에서는 우울과 분노를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곳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곳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이상하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더랬다!!). 그러나 때때로 나를 통해 엄마가 웃을 때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어린 나'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당시 엄마 아빠의 얼굴은 나의 세상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표정이 나의 책임인 것만 같은 착각을 했다. 실제로 나 때문에 불같이 화를 내기라도 할 때면 공포와 동시에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우울하거나 화가 나거나 일그러진 표정은 내가 너무 못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소중한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못난 사람'

 


어른이 된 지금이야 그것이 얼마나 헛된 노력이었는지를 안다. 심리적으로 너무 밀착되어 있을 때 보일 수 있는 아픈 모습이라는 것도. 그래서인지 그때의 어린 내가 짠하다. 타인을 내 뜻대로 변화시킨다는 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자신의 기분조차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게 바로 작디작은 인간이 아니던가.


이렇게 작고 연약한 인간. 그중에서도 삶의 경험치가 적은 어린아이들은 종종 오해를 하곤 한다. 엄마아빠의 어두운 표정이 내 잘못인 것 같다는 생각. 내가 노력하면 감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착각. 부부싸움은 그저 부부간의 문제일 뿐인데도 아이는 내심 뭔가 자신이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애써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갖은 노력을 하게 된다. 노력의 일부는 성공하기도 하고 (또 성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많은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자라며 엄마, 또 아빠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화가 나게 하지 않기 위해 순종적인 아이가 된다거나,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타인의 눈치를 민감하게 살피는 아이로 자라난다. 자신의 욕구에는 둔감해지고 타인의 욕구에는 민감한 아이로 자라나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할 테다.



 활짝 웃는 아이, 안도하는 엄마


아이를 키우며 다시 그때의 '어린 나'가 된 것 같다. 아이를 웃게 하려고 이렇게나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나는 또다시 타인을 웃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건 좀 더 자연스럽고 재밌다. 처음 아가와 눈 맞춤을 하고, 나의 표정에 반응하는 아이를 보며 얼마나 많이 웃어 보았는지. 그리고 내 미소를 보며 아이는 또 얼마나 해맑게 웃었는지. 마치 내게 '사는 건 정말 즐거워 엄마 그치. 이렇게 엄마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잖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아. 내 아이가 기나긴 인생을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걸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내게 참 축복일 것이다. 지금까지도 딸아이는 정말 자주 웃고(웃는 만큼 떼쓰고 화내는 것도 잘하지만^^), 그걸 보는 것만으로 뭔가 안심이 된다. 내가 마치 내 소중한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자가 된 것 같달까.


아이는, 아니 우리는 왜 그토록 타인의 얼굴을 밝게 혹은 편안하게 바꾸려고 애쓰는 걸까. 그리고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데 왜 내가 안심하는 걸까.




타인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인간


타인의 감정은 나의 영역이 아닌데,  때로 타인의 표정을 보며 평안과 행복을 찾는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면 내 마음이 편안하다. 타인이 행복해하면 나도 행복해진다. 나의 웃는 얼굴에 미소로 반응하는 아이를 보면서 또, 힘들다가도 아이의 미소를 보면 저절로 웃게 되는 나를 보면서 생각한다. 이건 본능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 개인의 감정은 완전히 타인과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감정은 전염성이 있다. 사람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략)... 여러분이 무엇을 느끼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과 연결 관계가 가깝거나 먼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 외. <행복은 전염된다> 중에서 -


그렇기에 우리는 아파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나 혼자 행복해질 수 없다. 웃음이 많은 사람을 옆에 두고서 울상이 될 수는 없다. 그가 만약 친구 혹은 가족처럼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가장 많이 보는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라 타인의 얼굴이다. 이름도 그렇다. '나'의 이름인데 내가 만들지 않았고 사는 동안 남이 훨씬 더 많이 부르게 된다. 내 이름은 그저 가장 많이 '듣는'이름일 뿐, 가장 많이 부르는 이름은 아마도 가장 가까운 사람. 지금의 나에게는 남편과 아이의 이름이지 않을까.


유대계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말한다. '나'의 존재는 '너'의 존재를 통해서만 인식이 된다고. '너'라는 대상이 없이는 나의 존재가 증명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는 만남, 관계를 중요시한다. 단, 너와 내가 어떤 조건이나 이해관계없이 순수한 영혼으로서 만날 수 있을 때 서로는 서로를 성장하게 하고 완성시킨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눈으로 구분할 수 있는 한 사람,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지금의 나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할 때 아내이자 엄마인 것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남편과 아이라는 타인이 '나'라는 정체성 속에 포함되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타인과 나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라 할 수 없다. 지금의 아이는 나를 설명해 주는 중요한 대상이자 나를 완성시키는 존재 중의 하나이다. 아이와의 만남 없이 한 여자는 결코 엄마가 될 수 없고,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엄마는 점차 성장하고 자신을 발현해 나가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부버의 말에 더더욱 끄덕여진다.


지인 K의 말이 생각난다. 삼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오빠에게도 동생에게도 밀려 늘 부모님의 사랑에 후순위였다고 했다. 오빠보다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뛰어나게 이쁘거나 잘난 게 없어서 자신은 못난 사람이었다고. 아니 그런 마음을 내심 안고 살아왔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는 것이다. 오로지 나만 찾고 나에게 눈빛을 주고 나에게만 의지하는 아이를 보며 자신이 난생처음으로 대단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어보았노라 했다. 그러면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단다.


K가 특별해진 건 오롯이 자신의 특별함이 아니라 아이, 그리고 그와의 만남과 관계 속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어쩌면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느껴보지 못했을 그런 자신에 대한 느낌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중 특별하지 않은 존재가 누가 있을까. 모두가 귀하고 유일무이하다. 그런데 그 특별함을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타인이다. '관계'속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상대를 대단하게 만들고 더불어 나도 소중해진다. 그 대상이 내 아이라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이에게 엄마는 첫 타인, 첫 관계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주는 대상


아이의 시점에서 생각해 보자. 아이는 엄마라는 대상을 통해 자신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아이를 통해 나를 성장시켜 가는 것처럼 아이는 엄마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나가며(*) '나'를 인식해 가고 자아를 형성시켜 간다. 차이가 있다면, 아이는 엄마라는 첫 대상을 통해 처음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자신을 인식해 나가는 것이고,  엄마는 아이라는 의미 있는 대상을 통해 기존의 자아를 허물고 새롭게 세우는 과정일 것이다.


* 아이는 초기에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못한다. 즉, 엄마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며 엄마를 자기 신체의 연장선으로 여기기도 한다. 기어 다니고 걸어 다닐 수 있게 되면서 점차 엄마와 물리적 거리가 생기고 그즈음 아이는 엄마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내면서 자아를 발달시킨다. 만 2세 정도에는 자신과 타인을 구별할 수 있게 되고, 이때 명확한 자아인식은 소유권 주장으로 이어져 '내 거야 내 거!'를 만 번쯤 말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다. 모두에게 형편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아이와 남편에게는 좋은 사람이고 싶다.  마르틴 부버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어쩌면 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오직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아이를 통해, 더 정확히는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내'가 되고, 좋은 엄마도 되고,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완전히 별개의 존재이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는 우리. 나를 '나'일 수 있게 해주는 아이와 또 우리의 만남이 귀하고 소중해지는 이유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다. 어린 내가 엄마의 웃는 모습만을 보기 위해 애를 썼다면, 지금의 나는 다르다. 아이의 웃는 모습만이 아닌 짜증 내고 울고 화내는 모습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싶다. 그 또한 아이의 모습이니까. 밝음도 어둠도 똑같이 품어보려 마음을 넓혀보고 싶다. 온 세상을 밝힐 것 같은 미소만큼이나 나를 캄캄하게 바꿔버릴 것 같은 분노까지도 기꺼이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게 가능하다면, 아이가 웃을 때만 내가 괜찮은 엄마인 것 같은 착각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가 울거나 화낸다고 해서 내가 못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아이에게 항상 웃어줄 수만은 없다는 것 또한 받아들여 본다. 때로는 아이를 위해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우울과 두려움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줄 수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숨길 수 없는 관계이니까. 우리는 인간이니까.  


타인을 통해 나를 만들어가는 나의 기나긴 여정에 함께 걸어주는 아이. 새삼 아이가 고맙고 든든하다. 여전히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깊은 곳에서 느껴지지만, 그렇게 아이의 모든 모습을 품어주고 그것을 통해 나 또한 넓은 품을 가진 엄마로 또 나 자신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둘이어야 완성되는 시소놀이처럼. 잘해보자 아이야


<아이라는 타인을 마주한 여자들에게>는 매주 수요일 오후에 업데이트됩니다. 20화 연재 예정이니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 저도 부지런히 걸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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