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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Aug 23. 2023

아이를 통해 나를 키워갈 뿐

3화. 하찮아지는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엄마

아이 키우면서 내가 변했다고?


"제가 살면서 좀처럼 화낼 일이 없었거든요.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아니에요. 근데 아이를 키우면서 자꾸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어제도 제가 이미 털린 상황에서 얘가 나를 시험하려는 듯이 자꾸 숟가락을 집어던지는 거예요. 참다가 참다가 버럭 했는데 밥그릇까지 밀치더라고요? 꼭지가 돌아서 막 소리를 질러버린 거 있죠."


언젠가 비슷한 개월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 P와 나눈 대화 중에 기억에 남은 말이다. 그녀는 마치 자신을 어찌할 수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남편까지 가끔 버럭 하는 걸 보면서 육아는 원래 이런 건가 싶기도 하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아이를 둘까지 계획했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 둘째에 대한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단다.


'내가 원래 이렇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아니다'는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화내거나 짜증 날 일이 잘 없었던 나였다. 그런데 늘 잠이 부족한 상태, 체력이 달리는 상태에서 아이가 고집을 부리거나 생떼를 쓸 때, 위험한 행동을 할 때 나도 모르게 짜증이 훅하고 올라와 나조차도 깜짝 놀라곤 했다. 이게 내가 맞나? 하면서. 어쩌면 나는 나를 잘 모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친구 B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평소에도 무뚝뚝한 편이었던 B는 자신의 아이를 키우면서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이제는 세상 모든 아기들이 너무 이쁘고 사랑스럽다고. 원래는 아이 없는 삶을 고려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여력이 되면 셋까지 계획하고 있단다. 또 어떤 귀여운 생명체가 나올지 궁금하다면서 육아는 힘들지만 자신이 아이를 이뻐하고 책임감 있게 키울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기에 자신 있다고 말한다. 그녀도 스스로에게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데, 아이 앞에서 저도 모르게 애정표현을 하고 재롱(?)을 부리는 자신을 보면서 '오 내가 이렇게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나?' 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공부하고 취업준비하고 직장 생활하며 나를 위해서만 살았던 자신이 나 아닌 존재를 위해 이토록 정성을 쏟을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라고. 그 변화가 너무 즐겁다고 했다.


아이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들여다보면 천차만별이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하긴 하는데, 방향도 색깔도 다 다르니까. 무엇보다 감정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건 분노나 짜증일 수도 기쁨이나 사랑의 감정일 수도, 그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익숙지 않은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 그것은 공통된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스스로를 다시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이 때문에 없던 화가 생겨나고, 없던 기쁨이 생겨난 걸까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내게 전혀 없던 것이 짠하고 나타날 수 있을까. 그저 내 안에 있었지만 발현될 계기가 없었고 아이와의 만남 혹은 아이를 돌보는 특정 상황 속에서 촉발되어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발견'인 것이다. 아이를 통해 나의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는 것.


그렇다. 이전 화에서도 말했듯 '내가 어떤 사람인가'하는 것은 관계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보통 성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렇다. 성격은 생각, 감정, 행위를 포함한 큰 범위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나타나는 모습이자 일관된 패턴이다. '패턴'이라는 것은 자극을 통해 나오는 반응이다. 가장 중요한 자극이 바로 타인과의 만남이고. 그런데 내 아이는 어마어마하게 영향력 있는 타인이 아니던가. 덕분에 우리는 '나'라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엄청난 무대 위에 오른 것이다.




'나'를 키우는 육아(我)


마치 화학작용처럼 어떤 자극을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는 색과 모양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어떤 친구, 혹은 어떤 애인을 사귀느냐에 따라 내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은 나의 밝은 면을 끌어내주고, 어떤 사람은 나를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나를 피폐하게 만드는 잘못된 만남도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서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며 놀라는 경우가 있다. 결혼은 그 만남의 심화된 단계이다. 나아가 육아는 완결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훨씬 극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키우며 새로운 나를 마주한다. 하루종일 함께 있는 데다가 밀착된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에 그만큼 선명하게 자신을 바닥까지 비춰준다. 영아기에는 일방적으로 돌봄을 주기만 하기 때문에 아이라는 자극으로 인한 반응을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의 자아가 발달하며 점차 상호작용하는 관계로 변화해 간다. 그에 따라 새로운 나를 서서히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몰랐던 나의 일부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을 '성장'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라는 강력한 타인을 만나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새로 드러나는 나를 발견하고 탐구하고 때로 괴로워하며 아이와 다름없이 자라는 중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이를 통해 '나'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아이를 통해서 나를 더 잘 돌보고 가꿔야 할 책무가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이 키우는 것도 힘든데 나까지 키우라고?"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애초에 아이를 키우는 것은 중간과제 정도일 뿐 우리는 인생을 통틀어 나 자신을 키울 뿐이다. 긴 인생에서 아이는 잠깐동안 내 옆에 머무르지만 나는 평생 나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원더윅스

- 한계와 취약성을 마주할 수밖에


아이가 정신적, 신체적으로 급성장하는 시기를 원더윅스(wonder weeks)라고 한다. 급성장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또 자기 나름의 성장을 위해 두려움과 혼란, 혹은 신체적 통증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난 후 아이는 부쩍 성장한다. 그런 아이를 마주하면서 엄마들도 일종의 원더윅스를 겪게 된다. 엄마로서의 역할, 그리고 아이와의 관계에 적응해 가면서 엄청난 두려움과 좌절감을 맛보게 되니까. 그리고 그 시기가 지나면 엄마도 한 뼘 정도는 성장해 있을 수밖에 없다.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소문으로만 듣게 되는) 아이의 사춘기 시절도 엄마들에게는 강력한 원더윅스이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 본다. (상상하기 두렵다)  그렇게 해서 성인이 된 아이를 독립시킨 엄마의 연륜 혹은 여유는 그런 숱한 원더윅스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리라.


그 과정에서 아이는 내가 스스로의 무엇을 돌보아야 할지 알려주는 가이드, 안내자 같은 존재다. 아이가 알려주는 방식은 다소 잔인(?)하다. 취약성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순간을 예고 없이 눈앞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도망칠 수 없도록, 정면으로 만날 수밖에 없도록. 아이가 아플 때마다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느끼는 엄마로서의 한계.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킬 때마다 느낄 수밖에 없는 죄책감, 머리로는 알면서도 아이에게 단호하게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 아이의 짜증이나 신경질을 품어주지도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못하는 자신을 보며 느끼는 좌절감.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고 괴로워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취약성을 만나고 싸워보고 화해하고 때로는 외면해 보면서 그렇게 계단을 오른다. (실제로는 늪으로 빠지는 것 같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 계단 위에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알아간다.


이렇듯 아이를 통해 나를 키운다는 건 수많은 취약성을 발견하게 되는 모험이다. 그런데 어떻게 취약성을 발견하는 게 나를 돌보고 성장시키는 발판이 되는 걸까. <마음 가면>, <나는 불완전한 나를 사랑한다>등을 쓴 브레네브라운 교수는 취약성의 힘에 대해 강조했다. 그녀가 말하는 취약성은 위험을 감수하고, 불확실성에 직면하며 정서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취약성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개인의 삶 또는 부모로서의 역할에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모든 것들을 기꺼이 경험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취약성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고, 또 인정할 수 있을 때에 취약성은 성장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한계가 있고 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리고 때로는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감정들까지 스스로 껴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나를 받아들일 열린 가슴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내가 만난 엄마들은 대부분 좌절과 혼란을 토로하고 또 많은 시간을 고민하는 이들이었다. (혹시라도 육아하면서 효능감이나 자신감만 느낀 엄마가 있다면 제보해 달라.) 그들은 분명히 아이와 마찬가지로 성장하고 있고  또 계속해서 자신을 잘 키워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물러나는 귀한 경험


언젠가 남편이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되게 하찮게 느껴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아이는 나를 하찮게 여기기도 한다 ㅠㅠ) 마치 낯선 나라에서 길을 잃었을 때와 같달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가진 능력이나 지식들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인간은 누구나 자기 중심성을 갖고 살아간다. 자아를 가진 인간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행복, 나의 성공, 나의 복지'만을 생각하던 [나 중심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아이가 태어나면서 세상의 중심이 아이로 바뀌는 경험을 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앞서 말한 B의 경험처럼 나만 생각하면서 살 때는 느끼지 못하던 것들을 느끼게 된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모든 것이 달리 보이지 않겠는가. 잘난 줄 알았던 내가 사실은 한계를 가진 작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 그렇지만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깨달음. 나의 성공이나 행복에 매달리지 않아도 아니, 나의 행복에 매달리지 않을 때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 타인에게 돌봄을 주고 나의 것을 나눌 때 훨씬 더 깊은 기쁨과 충만감을 경험할 수 있다는 배움까지도. 그렇게 세상의 중심에서 물러났을 때야 비로소 내가 살던 세상이 아주 작은 세상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이런 귀한 경험을 무료로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렇듯 아이를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작업, 그중에서도 나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 또 세상의 중심에서 물러나 더 큰 세상을 알아가는 그 모든 시간들이 결국은 나를 돌보고 키워가는 육아(我)의 과정일 것이다. 이다음 단계에서는 어떤 퀘스트를 만나게 될까.  또 이 긴 (그러나 몹시 짧은) 여정 후에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얼마나 레벨업이 되어있을까.... 는 생각은 잠깐 접어두고 이제 아이에게 가봐야겠다.


3화 끝.

프라하에서 해질녘즈음 너와 나. 같이 쑥쑥 자라나보자.



<아이라는 타인을 마주한 여자들에게>는 20화 연재 예정이며 매주 수요일 오후에 업데이트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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