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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Sep 13. 2023

나를 잃는 게 두려워서

6화. 엄마들의 '나' 상실 방지책

그저 '나'로 있는 시간


5년 전쯤이었던가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지인은 아이를 키우면서 시력이 많이 나빠졌다고 했다.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캄캄한 방 안에서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는 습관 때문이었단다. 눈이 나빠지는 걸 알면서도 그걸 멈출 수가 없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당시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의 나도 아이가 잠들고 나면 쉽게 잠들지 못하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어떻게든 시간을 쓰다가 잠이 든다. 그럴 시간에 잠을 더 자야 내일 덜 피곤할 걸 알면서도 잘 안된다.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닌 그저 '나'로 있는 시간.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엄마가 되고서 더 부지런히 책을 읽고 운동을 하는 여자들을 잘 알고 있다. 안 하던 취미 생활이 생기고, 또 틈만 나면 밖에 나가서 걷는다는 친구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몸부림이다. 미치지 않기 위한 몸부림. 육아에 살림에 지친 나를 일으키기 위한 몸부림. 일과 육아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걸어가기 위한 몸부림. 그러니까 나를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 




'나'를 잃어보았던 경험


나는 분명 나인데 '내'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20대 중반쯤이었다. 친구를 비롯한 인간관계가 가장 넓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하루는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엄청난 공허감이 올라왔다. '나를 잃고 싶지 않다.'는 분명한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나는 분명 존재하는데 '나'같지가 않았다.  그 당시 우울증을 겪고 계셨던 엄마는 불쑥불쑥 전화가 와서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긴긴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 남편(나의 아빠)때문에 힘들 다는 이야기, 당신 친정과 시댁 이야기,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크고 작은 이야기들. 나는 들어주고 맞장구쳐주고, 엄마의 마음이 편안해질 만한 이야기를 해드리곤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 의견과 상관없이 서울에 불쑥 올라오셔서 좁은 하숙방에 며칠씩 지내다 가시곤 하셨다.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나는 엄마가 뭘 필요로 하는지, 내게 무얼 요구하는지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게 나의 최선이라 생각했다. 나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구들이 서운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누군가 만나자고 할 때면 거절하는 것도 어려웠다. 여럿이 만난 자리에선 항상 친구들의 기분이나 고민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관계에 서툴렀던 나는 주변에 사람이 많았지만 늘 피곤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버스 안에서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듯한 공허감을 느끼면서 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는 유독 타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타인의 힘은 강력하겠지만.) 내가 나를 찾지 않으면 이대로 '나'는 영영 사라져 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공포였다. 그렇지만 방법을 잘 몰랐고. 나를 이해하고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친구를 잃었고 또 엄마와 멀어졌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점차 세상을 알아가고 자아가 자라나는 것처럼 서서히 나를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이제 아이를 키우며 아이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를 본다. 그러고 보니 주위엔 나와 같은 수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엄마들. 아내, 며느리,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역할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아주 쉽게 나를 잃어버릴 수 있다.  아주 잠깐 내 역할에 충실했을 뿐인데 '나'는 온데간데없고 남편과 아이만 있더라는 그런데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니 아이들도 사라지고 없더라는 슬픈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많은 엄마들의 경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녀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나'를 찾기 시작하는 모습들. 많은 엄마들의 슬픔과 고민이 이 지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이를 키우며 더 적극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썼다는 김슬기 작가는 서재에서 자신을 찾고, 불안을 내려놓고 자신을 성장시켰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며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자신의 진실한 열망을 발견하기도 했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강요하는 틀에 갇혀 내가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 다른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나는 이제 그런 사람으로 살겠다.  

김슬기 <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 중에서 


누구보다 자신에게 친절하고 자상하겠다는 다짐은 얼마나 뜨겁고 또 절실한지. 아이에게 엄마가 꼭 필요하듯 내게도 내가 필요한 그런 존재가 되어주겠다는 그 마음을 너무 잘 알 것 같다. 


저마다의 힘겨움이 다르듯이 자신을 찾고, 돌보고, 지키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아이의 기질에 따라 달라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나를 잃지 않는 데에 있어서는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방법이 있고, 모두에게 통하는 방법이 있기에 이곳에서 몇 가지만 나누어 보고자 한다. 



나를 잃지 않는 몇 가지 방법들


1. 혼자 있는 시간


아이를 보며 집에만 있던 시기에 육아선배들과 연락을 하면 한결같이 해주던 말이 있다. "꼭 밖에 나가. 잠깐이라도 아이 맡길 수 있으면 공원이나 카페라도 다녀와 꼭!" 그들은 마치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는 듯 절박하게 간절하게 말했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는 완전한 휴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집에 있으면 눈에 보이는 온갖 집안일과, 아무리 아이가 자고 있더라도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없다는 것을. "호흡해 호흡해! 어서 탈출해!"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나에게 말해줄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이제는 너무 잘 알겠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공간이 주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더라도 집은 엄마로서의 공간이 크다. '오롯한 나'로 있기 힘들다는 뜻이다.  물론 나가지 않더라도 집에서 적절히 지혜롭게 쉬는 것도 중요하지만. 꼭 주기적으로 밖으로 나가 엄마도 아내도 아닌 시간. 그저 '나'일 수 있는 시간. 혹은 아무 존재도 아니어도 괜찮은 시간에 머물러 보길 바란다. 수많은 '해야 한다'를 벗어두고 책임과 부담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이다. 새로운 공기가 몸과 마음에 순환되도록. 잠깐이라도 나로 숨 쉴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것만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2. 순수한 즐거움을 주는 것


인정이나 보상에 얽매이지 않는 행위, 그 자유로운 활동이야 말로 내가 나 일 수 있는 시간이다. 그저 좋아서 하는 취미를 만들어 보자. 거창할 필요도 남을 따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면 된다. '애 보느라 시간도 체력도 돈도 없는데 취미는 무슨 취미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당신의 시간과 돈이 남아돈다면? 충분한 체력과 에너지가 있다면 무엇이 하고 싶은가? (상상만으로도 좋다 ㅠㅠ) 충분히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중에서 일상에서 소소하게 틈틈이 배우거나 해볼 수 있는 것을 골라보자. 외국어 공부도 좋고, 뜨개질도 좋고, 초콜릿복근 만들기도 좋다. 독서나 영화도 좋고, 좋아하는 배우나 예술가를 덕질하는 것도 좋다. 


 중요한 건 '엄마'의 세계를 빠져나와 잠깐이라도 나의 마음이 순수하게 푹 빠질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모이면 드라마 얘기를 열정적으로 하시던 게 생각난다. 과몰입해서 불륜한 여자를 맹비난하거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해피엔딩을 간절히 바라는 이야기들. 엄마들이 드라마를 그토록 사랑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나의 역할과 책임에서 물러나 '다른 세계'에 잠시 머무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홀가분하면서 재밌을까.


엄마라서 관심을 갖게 되는 육아서나 동요가 아니라, 그저 좋아서 즐길 수 있는 음악, 책, 영화면 충분하다. 결코 수단이 될 수 없는 것. 보는 행위, 읽는 행위, 배우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이 될 수 있다면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그 시간은 결국 내가 아닌 무엇이 될 수가 없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 자체로 즐거운 활동'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자기만의 즐거운 활동은 아주 사소해 보일지언정 삶의 질을 좌우한다. 틈틈이 즐기는 그 시간들을 통해 '나'를 지킬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행복과도 성큼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3. 나를 위한 질문들 


2번의 활동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뭘 해도 아이가 생각나고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수도 있다. 혹은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혼자만의 시간이 생겨도 무엇을 해야 내가 충분히 즐거운지 몰라 휴대폰 속의 아이 사진만 보게 된다. 그렇게 '아이는 잘 있을까?' 걱정만 하다가 육아에 복귀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세 번째로 권해드리는 방법은 나를 위한 질문을 끊임없이 해보는 것이다.


 '나는 무얼 할 때 즐거웠더라?' '보상이 없더라도 시간을 들여서 해보고 싶은 건 무엇이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점차 확장해 보자. '내가 정말로 원하는 삶은 무엇이지?' '나는 내 삶에서 무얼 중요하게 생각하지?' '나는 내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지?'까지. 넓은 시야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묻고 답해보자. 학교 시험지에 답을 쓰듯 바로바로 답을 내어놓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묻고 답하는 시간 자체가 나를 선명하게 찾아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로서 중요하고 소중하다면 나에게 큼직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엄마라는 역할을 떼어놓고도 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계획 없이 갑자기 엄마가 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 꿈이나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살다가 엄마가 된 경우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나로서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던져진 '엄마'라는 역할은 쉬는 시간도 없이 24시간 돌아간다. 그렇게 굴러가다 보니 미쳐 자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긴 한데 이게 맞는지 틀린 건지도 모르겠고, 어떤 날은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그럴 때 자신을 향해서 아주 작은 질문부터 던져 보자.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가는 것처럼 호기심을 가지고서 찬찬히 묻고 또 고민해 보라. 작은 취향부터 깊게는 삶의 가치관까지. 시간이 걸릴 수는 있겠지만 이 과정을 통해 나의 생각, 감정, 욕구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게 바로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첫 단계이다. 




내가 '나'를 잊지 않을 수 있게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나의 시간과 체력을 아이와 나누게 된다. 하지만 아이 때문에 내 시간이 없고, 체력이 바닥나는 건 아닌 듯하다. 어떤 날은 아이로부터 에너지를 받는다고 느낄 때도 있으니까. 또 아이를 키우며 (체력이 바닥나지 않도록) 내 몸을 더 챙기고 건강하게 챙겨 먹게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내 마음이 지칠 땐 '아이 때문에'라는 생각이 둥둥 떠오를 것이다. 


나를 위한 시간을 하루 5분이라도 내어줄 수 있다면, 내가 나를 위해서 틈틈이 시간과 마음을 내어줄 수 있다면 다르다. 나를 만드는 것.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을 찾아야 한다. 내가 나라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는 시간과 행위를 놓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나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또한 나다움 안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선택한 귀한 돌봄의 경험 그리고 시간. 누구보다 강력한 타인인 이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행위가 나를 만들어 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또 혼자 있는 시간 모두 당신을 당신답게 만들어주고 있다면, 결코 나는 어떠한 순간과 관계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6화 끝



어쩐지 집에 자꾸 모래가 밟히더라



 

 덧붙이는 말.


저도 제 글을 읽는 독자이다 보니, 제 글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글(책)을 쓰기로 한 것부터가 나를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처음에 편집자님과 책을 구상할 때 육아가 꽤나 힘들다고 느끼기 시작한 때여서) 그래서인지 정말로 <아이라는 타인을 마주한 여자들에게>가 한 꼭지씩 쌓여갈수록 힘을 얻는 느낌이에요. 물론 아이가 이제 세돌이 지났으니 아주 조금 수월해지기도 한 덕분이겠죠. 이런 글을 쓸 수 있어서, 이 글을 나눌 수 있는 독자분들이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더랍니다. 서툰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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