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오늘의 질문_ 시간이 쌓이고 싸여 기품이 깃든 깊은 삶

가을과 익어감과 기품 그리고 황인숙

오늘의 질문


가을은 가을만의 색이 있는 거 같습니다. 건조한 색감, 따가운 가을 햇살에 수분이 사라진 나뭇잎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떨어집니다. 지난봄에 도서관 앞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된 후론 사시나무가 흔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마치 아는 사람이 대화하는 내용을 듣는 기분으로, 문을 열어놓고 도서관 BGM과 조화를 이루는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도서관 앞 사시나무도 이제 가을의 운명을 받아들인 거 같습니다.


무르익는다는 건, 깊어진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쓸쓸함과 자연스러운 기품을 함께 품는 일입니다. 윤기가 흐르는 나뭇잎들이 건조해지고 떨어지는 모습은 쓸쓸하지만, 초라해 보이진 않습니다, 적어도 시월에는요.


어림과 소란을 지나 어른이 된다는 건 가을을 향해 가는 일과 비슷합니다. 어딘가 쓸쓸하지만, 기품이 깃드는 일, 기품은 겨울의 추위와 봄의 기운과 여름의 뜨거운 더위를 잘 견뎌야만, 가을의 따가운 햇살까지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깃드는 기품은 마냥 초라해 보이진 않습니다.


가을입니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고, 사색에 잠기기 쉬운 계절입니다. 나에게 시간은 깃들고 있는지, 스쳐 지나가며 나라는 존재를 풍화시키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봅니다. 나이가 쌓여가고 있는지, 어림과 젊음과 청춘을 까먹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봅니다.

20대에는 마흔이 가을처럼 보였는데, 마흔은 여전히 초록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나에게 남은 어림과 소란에 감사하며, 시간이 천천히 스며들길, 너무 서둘러 중간 정산을 하려고 하지도, 결론을 내리지도 않길 바랍니다.


어제는 마음이 소란했습니다. 도서관 연체된 책은 부디 내일까지 반납하셔서 연체료를 내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다음 주 화요일부터 강화된 연체 규정이 적용될 예정이니 반납일은 스스로 잘 확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시간의 풍화에 이기려 들지 않고 시간이 쌓이고 싸여 기품이 깃든 깊은 삶을 살 수 있을까?"입니다.


머무는 문장

 오늘 청춘들이여, 아직 DNA가 바뀌지는 않았겠지. 그 뜨겁고 싱그러운 피와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따르며 자기만의 삶을 가꾸기를! 세상에 지지 말기를! 뻔뻔스러울 정도로 떳떳하기를! 어떤 책은 세상을 이기는 힘을 키워준다.


_황인숙, 『좋은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달, 2020), p.220-1


 황인숙 시인의 산문이 코로나19 시대를 통과하는 동안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삶이 수직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깊게 스며들어야 기품이 생긴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고마운 책입니다.


 이곳에서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만나는 중입니다. 가끔 가을의 기운이 느껴지는 어린이와 청소년,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그럴 수밖에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만나면 조금 더 밝게 인사하게 됩니다. 뻔뻔한 게 당당함이 되는 나이가 있습니다. 떳떳한 게 용기가 되는 시절이 있습니다. 눈치와 염치가 무용한 시절, 어린이와 청소년기가 바로 그런 시절일 겁니다.


아무리 계절이 뒤섞인 시대라 하더라도 어린이와 청소년이라는 계절은 지켜주고 싶습니다. 좀 뻔뻔해도 된다, 떳떳해도 된다, 부탁해도 된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깊음과 기품은 그 시절을 충분히, 햇빛을 충분히 받은 뒤에 챙겨도 될 것입니다. 주말에는 오후 2시~6시까지 개관합니다. 시집 하나 골라 세기 공원에서 책 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커피는 가까운 카페에서 사시면 더 좋겠습니다.  


#황인숙시인 #좋은일이아주없는건아니잖아 #달출판사 #김선미디자이너 #청춘 #어린이  #오늘의질문 #칭다오 #칭다오청양 #칭다오경향도서관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의 문장_무의미한 공회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