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우리가 다시 마주한 중심과 권력의 얼굴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정교하고 완성도 높아 보이는 체계조차 시대의 요구 앞에서는 균열을 드러낸다. 나는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서평을 쓴 적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절대적 기준을 해체하고 다양성을 껴안던 그 정신은 어느 순간부터 다시 중심과 질서를 지향하는 모더니즘의 언어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정치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트럼프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은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태도를 당연시하며, 신자유주의의 언어로 포장된 자기중심적 정치 전략을 펼쳤다. 파리기후협정 탈퇴, 브렉시트, 팬데믹 시기의 국경 봉쇄는 모두 세계 공동체보다는 국가 중심의 통제를 선택한 사례다. 연결된 세계라는 믿음보다, "우리는 우리만 지킬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문화와 담론의 언어 속에서도 모더니즘적 회귀는 감지된다. 우리는 복잡한 질문보다 빠른 정답을, 다양한 해석보다 명료한 논리를 선호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알고리즘과 데이터, 명료성과 통제가 신뢰를 얻는 풍경은, 다의성과 모호함을 껴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지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 단일한 기준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욕망 속에 위험이 있다. 중심을 다시 세우는 순간, 주변은 소외된다. 진리를 하나로 고정할 때, 차이와 다름은 오류로 취급된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문장은 오랫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이미 사람이 살고 있던 땅에 ‘신대륙’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들의 삶은 지워졌다. 누가 중심을 정하며, 누구의 언어가 세계를 정의하는가? 지금 회귀하는 질서 또한, 그러한 폭력성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나는 신을 믿는 사람으로서, 믿을 수 있는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 믿음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제도도 절대화되어선 안 된다는 경계로 이어진다. 그래서 ‘균형’과 ‘중도’라는 단어가 오히려 더 귀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역사의 수많은 실패 속에서 우리가 어렵게 찾아낸 가장 절실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확신 속에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일. 나는 그 태도를 신앙과 이성 사이, 인간성과 진리 사이 어딘가에서 계속 연습하고 싶다.
2025.04.19. 균형을 위해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냈던 날,
칭다오에 사는 이방인
칭다오 학교 연합 문학 동아리 '찬란' 4월의 장르는 '칼럼'입니다.
정치, 인문, 과학 분야로 나눠서 친구들이 칼럼을 쓰고 있는데, 저도 재외부재자 선거 등록을 하며 작성했습니다.
“The heaviest penalty for declining to rule is to be ruled by someone inferior to yourself.”
– Plato, Republic, Book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