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마차 : 이동식 도서관 2020.02.02.

-살려야겠다는 본능이 살아야겠다는 본능을 앞서는 찰나의 순간_아파트 봉쇄

황금마차 : 이동식 도서관 2020.02.02.

-살려야겠다는 본능이 살아야겠다는 본능을 앞서는 찰나의 순간_아파트 단지 봉쇄 직후


1월 28일, 황금마차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교민들이 책을 원했다. 노선 확인을 위해 1월 29일에 내가 살고 있는 지역(청양)을 답사하려고 차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도는데, 출입을 통제한 곳이 많았다. 아파트 입구 쪽에 컨테이너 박스가 설치된 곳도 있었고, 일부 문을 폐쇄한 곳도 있었다. 언제나 정체되던 도로에는 차가 없었다.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야겠다’라는 본능은 움직임을 최소화시켰다. 도서관이 있는 단지도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만 출입증을 받고 출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 교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주차하고 생필품을 사기 위해 나온 사람들의 표정을 한참 동안 봤다.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위축된 사람들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보다가 내가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도 잊고,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멈춰버린 이 도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 싶어졌다.


불현듯 ‘북캉스’가 생각났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호텔에 들어가 꽉 막힌 공간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시간인 호캉스에 책이 더해지면 북캉스 아닌가.

황금마차 첫날 노선


“신청하신 단지나 상권만 찾아갈 예정입니다.
지도에 표시된 곳과 천태까지 갈 예정이니 신청해주세요^^
응원해주시는 분도 많고 언제 오는지 물어보시는 분도 많은데
어딘지 알아야 갈 수 있습니다^^
황금마차는 저에게 감염 증상이 없고 방역 도구(소독제 분무기용)가 도착하면 일정표를 공지하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일정표 작성을 위해 미리 신청 부탁드립니다.
신청은 모멘트 댓글로 받겠습니다^^

도서관처럼 황금마차도 무료로 운영합니다.
그동안 바쁜 일정 때문에 무료 도서관 혜택을 못 받은 분들은 이 기회에 북캉스 해보세요.
책은 도서관에서 차 트렁크에 들어갈 만큼만 실어서 다닐 예정입니다^^”
_2020년 1월 30일 오후 15시 35분에 올린 공지


한인회 단체방이 만들어졌고, 마스크 배포가 시작되었다. 1차는 각종 협회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배포되었고, 2차로 마스크를 배포하기 시작했다. ‘한인회’에 대한 인식은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들마다 다르겠지만, 마스크를 배포하기 전까지 한인회는 그냥 가끔 축제를 준비하는 단체라고 알고 있었다. 생업이 있는 사람들이 도시의 불씨가 꺼지기 전에 열심히 부채질을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희망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뭐라도 시작한 것이다.


사진 1 : 2020년 2월 2일 한인회 공지사항, 사진 2 : 황금마차 일정표, 사진 3 : 황금마차 이용방법


‘살아야겠다’는 생존본능을 거스르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살려야겠다’는 본능이다.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선한 본성은 ‘희생’을 감수하게 만든다. 그 상황이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용기를 내는 것이다.


2020년 2월 2일 19시 46분, 심호흡을 깊게 쉬고 ‘황금마차’ 공지를 올렸다. 이제 진짜 시작하는 거다.



경향도서관 황금마차(찾아가는 도서관) 내일부터 달립니다^^
집에 3일만 있어도 뭔가 무기력해지고 ‘이게 뭐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나날입니다.
책이 약이 될 수 있을까요?
2018년 4월에 개관한 이후 ‘칭다오 사랑방’을 꿈꾸며 한인 무료 도서관을 운영했습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교민들에게 ‘보답’하려고 기획했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군대에서 훈련지역에 찾아오던 이동식 매점 황금마차에 간식 대신 책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용방법과 일정표는 사진을 참고해주시고, 일단 이번 주 일정만 올립니다. 각자의 삶에서 조금씩 배려하고 조금씩 헌신하다 보면 이 시련의 끝에서 “그래도 우리 칭다오는 정이 있는 곳이구나.”라고 회자하게 되겠죠? 우리 같이 힘냅시다~ “할 수 있는 게 이 노래.. 황금마차 밖에 없다~”
차와 번호판을 이렇게 공개하는 게 뭔가 부담스럽지만 이 차를 찾으시면 됩니다^^ 별도의 표시를 하면 영업처럼 보이고 단속당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서 모멘트에 실시간 정차 위치를 사진으로 공유하려고 합니다~시간과 장소 잘 확인해주시고 나와주세요^^ 이 게시물은 공유해주셔도 좋습니다^^
_2020년 2월 2일 19시 46분에 올린 공지


게시물을 올리자 사람들은 자신의 단지 상황을 댓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어느 단지에 어디 문이 폐쇄되었는지 알려주기 시작했다. 도서관 개관 1년 10개월 만에 은혜 갚을 기회가 생겼다. 찰나의 순간 불꽃이 튀었고, 용기라는 이름으로 불타올랐다. 바이러스의 기습으로 잔뜩 긴장된 마음이 아주 잠시 녹는 순간이었다.


아주 어릴 때 동네에 책 보부상이 오곤 했다. 사실 트럭인지, 버스인지, 서점인지, 도서관 인지 잘 기억이 안 난다. 황금마차는 이동식 매점 때문에 생각난 것이지만, 아주 어릴 적 누군가의 헌신 덕분에 무의식에 가까운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동식 도서관. 공간을 봉쇄하면 책이 이동하면 된다. 내일부터 출발한다. 변수가 많지만, 내 본능은 살아야겠다는 생존본능에서 살려야겠다는 헌신으로 넘어가버렸다, 대책도 없이.

이 글을 복기하며 쓰고 있는 시점에도 주변 도시는 봉쇄되었고, 내가 사는 청양에도 위기가 왔다. 도서관은 추석(중추절)이 겹쳐서 잠시 임시 휴관 중이다. 만약에 도시가 또 봉쇄하게 된다면, 나의 선택은 여전히 황금마차일 것이다.


두려움, 이거 하나 모른 척했더니 세상엔 즐길게 정말 많네요. 생각 없이 사는 거 꽤 가볍고 재미있네요. 철학이 이러다 생기는 걸까요?
_이다한, 『다한이 뭐하니?』(KONG,2020) 중에서


두려움 너머엔 갈림길이 나온다. 생존과 헌신, 누군가 생존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헌신이 필요하단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깨달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될지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기에 헌신을 강요하고 싶진 않다. 다만, 두려움 하나 극복하면 꽤 재미있는 일들이 생긴다는 사실은 알리고 싶었다.


2020.02.02. 생존과 헌신 사이에서

칭다오에 사는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