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서 깨달은 것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

바닥에서 깨달은 것 :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


끝을 모르던 바닥에 드디어 닿았다. 극도로 예민한 상태,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선전포고라도 하듯 살았다. 지난 기록들을 지우지 않았다. 부끄러움은 부끄러움대로 남아있어야 하니까.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고슴도치, 바닥에서 발견한 나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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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 청양은 지난 3월 8일간 봉쇄가 되었었고,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전체 핵산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3월 봉쇄 이후에 모든 시간의 감각을 상실한 거 같다.

월요일이 도서관 쉬는 날이라 하루를 푹 쉬는 편인데, 하루 쉬고 나서 화요일 심야 독서모임, 수요일 오전 글쓰기 모임 수작, 목요일 오전 시 낭독 모임 시발을 진행하고 나면 어느덧 금요일이 되고, "왜 오늘이 벌써 금요일이지?"라는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토요일에는 어린이들과 함께 북클럽을 진행하고, 일요일에는 청소년들과 인문고전 살롱과 북클럽 소란을 진행한다. 전투적인 일주일을 보내고 나면 다시 월요일,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주변에 있는 분들은 이렇게 일을 많이 해도 괜찮냐고 물어보지만, 지금의 나는 이렇게 일하지 않으면 온전히 정신을 붙들고 살 자신이 없다. 작년 3월 19일, 한국에 갇힌 채 발만 동동 구르다가 만 1년 만에 칭다오로 돌아왔다. 그리고 1년 하고도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문제는 나 혼자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떠날 때 당시 4개월이던 아들은 이제 19개월이 되었다. 첫 뒤집기를 보고 왔는데, 이제는 뛰어다닌다. 첫아들의 첫 돌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빠로서 자괴감이 든다. 아내는 모든 것을 혼자 그것도 내가 없는 시댁에서 감당하고 있다. 부모님들이 잘해주시지만, 잘해주는 것과 힘든 것은 별개이니까. 언제나 아내와 아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단 말만 나온다.


매일 같은 곳을 보지만 매일의 풍경이 다르다. 그 풍경이 삶의 질감을 더 높여준다.

이곳에 오려면 그동안 성정부 초청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으로 보면, 동사무소 같은 곳에 서류를 접수해서 구청과 시청을 거쳐 나오는 서류다. 그러나 이곳 동사무소인 '가도'라는 곳은 권한이 굉장히 많다. 중앙정부의 힘이 강할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이곳의 지방정부의 힘도 절대적이다. 물론 중앙에서 마음만 먹으면 무조건 따라야 하지만, 중앙의 정책이 지방 가도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말도 안 되게 가도 직원이 우기기도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칭다오는 현지 정부와 영사관과 한인회 사이가 굉장히 좋다. 그래서 성정부 초청장도 어려움 없이 나오도록 협의를 했는데, 동사무소 격인 가도에서 버티는 바람에 지난 9개월 동안 모든 과정이 멈춰 있었다. "그래, 내일은 될 거야. 다음 주는 될 거야. 다음 달에는 될 거야."라고 희망 고문을 반복했다. 모든 방역의 책임이 가도에 있기에 그들의 사정도 이해는 된다만, 무작정 전화도 안 받고 버티는 이들을 보며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사실 마라톤과 같은 일인데, 지난 1년 동안 단거리 달리기처럼 달리다 보니 나도 번아웃은 차치하고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다. 바닥을 드러낸 사람이 루틴에 의해 살아가는 삶이란 거의 좀비와 비슷했다. 영혼을 잃은 삶이라고 할까. 매일 집에 돌아와서 소파에 앉아 멍하게 있는 시간들이 늘어났고, 어쩔 땐 해 뜨는 걸 보고 잘 때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싶어서 건강 관리를 시작했고, 채식 위주의 식단 조절도 하게 되었다. 나의 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 욕하려고 도서관 주변 광장에 나갔는데, 일몰이 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일몰을 보며 어떻게 욕을 할 수 있을까. 바닥을 찍은 날부터 매일 일몰을 보려고 광장에 나왔다. 1분이 걸린다. 하루라는 삶 속에 1분의 여유가 깃들기 시작했고, 조급했던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가 날 때마다 꽃을 사고, 짜증이 날 때마다 꽃을 사니 도서관이 꽃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있게 되다 보니 단거리 달리기를 멈추고, 마라톤을 준비하게 되었다.

WeChat Image_20221025020811.jpg 이런 일몰 앞에서 어떻게 욕을 하겠나

아내에게 아들 유치원을 알아보라고 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건강하게 만나자고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에 조급함은 사라졌다. 그렇게 조급함을 없애고 나니 좋은 소식이 왔다. 6월 13일부터 문제였던 성정부 초청장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공식적으로 확인이 되어 다음 주에 먼저 비자 연장을 하고, 연장된 비자로 동반비자를 신청하려고 한다. 앞으로도 살면서 감당이 안 되는 문제들은 자주 내려놓아야겠다. 이제는 고공행진 중인 비행기 티켓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며칠 밤새고 나니 '이건 전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 일부 여행사에서 바뀌는 정책을 눈치채고 티켓을 사재기하여 현재 7월 티켓은 웨이하이 기준(50분 비행) 편도가 438만 원이다. 여러 고민 끝에 배수의 진을 치기로 했다. 최후의 보루로 가장 합리적인 가격(50만 원)의 티켓을 확보하니 10월 5일 티켓이었다. 무료 취소가 가능하기 때문에 언제든 좋은 티켓이 생기면 취소하고 다시 발급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수강 신청과 운동 경기와 똑같다.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과목을 확보하고 나머지 과목을 신청하는 것, 백업 선수를 확보하고 주전 선수를 구하는 것. 다음 주 월요일 비자가 연장되면 본격적으로 스토브리그에 참여할 예정이다. 인간의 절박함을 이용해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길은 가장 빠르고 싼 티켓을 구해서 잘 들어오는 것 같다. 은혜를 갚는 데도, 복수하는 데도 진심이기에 진심을 다해 복수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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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서의 돌도 함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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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싸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쌀 때다,라는 말이 생각나던 시기였다. 배수진을 치는 데 성공.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들이 마음을 지켜준다.

살면서 좋아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들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꽃과 일몰, 달과 별과 같은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들이 저의 마음을 지켜주고 있다. 올해의 목표는 "건강하게 가족을 만나는 것." 이 단순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중이다. 마라톤은 완주만 하면 된다. 잃어버렸던 리듬을 찾으며 천천히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들을 보며 결승점까지 걸어가려고 한다.


2022.06.17. 단거리와 마라톤 사이에서

칭다오에 사는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