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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장_창을 열고 심호흡을 한다

환기와 위로 그리고 이수명 2023.09.14.

오늘의 문장은 난다의 '詩란' 시리즈 첫 번째 책, 이수명 시인의 『내가 없는 쓰기』(난다, 2023)에서 가져왔습니다.

창을 열고 심호흡을 한다. 이사한 집이 아직 적응은 되지 않는데, 창을 열면 겨울의 높고 차고 맑은 기운이 밀려와 마음을 안정시킨다. 창을 여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창을 열고 싶어 얼른 일어나기도 한다. 새로운 하루, 새로운 한 해가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는 모른다. 다만 창을 열고 오늘을 이렇게 맞이하는 느낌, 약간은 비밀스럽고 평화롭다. 아주 멀리까지 아파트와 건물들이 보인다.
_14p

 

환기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피로가 누적되는 속도는 빨라지고, 피로가 해소되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는, 부모님이 주신 건강에 밑천이 드러나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9년 전에 제주 함덕해수욕장에서 봤던 풍경이 생각납니다. 바다펜션인가, 바다가 보이는 저렴한 펜션 2층 창가에 앉아서 2박 3일 동안  바다만 봤습니다. 어딜 가지도 않고, 최소한의 음식만 시장에서 사서 먹으면서 봤던 풍경이 생각납니다. 밀물과 썰물이 해수욕장의 모래를 순환시켜 주는 모습이 누군가를 다독이는 모습 같아서 멍하게 바라봤습니다. 사직서 쓰고 어학연수 떠나버릴지 고민하던 저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출근했고요.

병원의 풍경은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이러니합니다. 링거를 거는 쇠막대기와 가을의 분위기를 내는 나무 사이에는 창이 하나 있습니다. 병원과 나무와 창, 생각해 보니 입원했을 때 창밖을 보면 '나무'가 보였습니다. 가을의 냄새를 맡기 위해선 창을 열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에 구멍을 내는 일, 주삿바늘이 핏줄을 파고들고, 작은 바늘구멍으로 포도당이 들어옵니다. 무엇이 들어오고 나가는 일,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의식을 잃은 채로 소아과에 실려 왔던 아이의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준서의 콧물이 멈추지 않아서 갔던 병원에선 '폐렴'이란 이야기를 듣고, 3일째 링거를 맞은 준서는 에너지가 넘쳐나서 날아다니고, 우린 기가 빨리고, 얼떨결에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의사의 열심과 부모의 간절함과 지인들의 소란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득 함덕이 생각났습니다. 끝도 없는 절망 앞에 우리는 여름의 눅눅함과 뜨거운 열기가 동시에 머무는 공간 속에서 창문을 엽니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무료입니다. 대가 없이 불어오는 것들이 우리의 지난여름을 위로합니다.

함덕의 작은 펜션은 잘 있을까요, 9년 전 그곳에 두고 온 저도 잘 있을까요?

가정과 사회에서의 역할을 취사선택할 게 아니라, 작은 창을 만들어 열어야겠습니다.

'환기'. 링거를 맞았고요. 피가 순환되었고, 조금 기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고프네요, 이제서야.


뜨끈한 어묵탕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생각과는 상관없이 저는 두부를 먹을 예정이고요.

내일 오전 10시에 뵙겠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요.

평안한 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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